*백제 구수왕 11년(224년);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범해 오므로 우리 군사가 봉산 아래에서 역전하였으나 패하였다.
*신라 내해이사금 29년(224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 아래서 싸워 이를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224년에 백제가 신라와 싸워 대패하였다고 나온다. 당시 백제군의 최대 동원능력이 수천명 정도였으므로 1천명을 잃었다는 것은 엄청난 패배다. 그러면 이 기록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확인할까? 이 기록 하나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볼 때는 항상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판단해야 한다.

백제본기를 보면 1-2세기 약 80년 정도의 신라와의 평화기가 끝나고 2-3세기 초고-구수왕대부터 신라와 충돌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할 수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신라에 대해 우세를 확립하는 것은 고이왕 이후이다. 이는 한강유역을 석권한 말갈군이 신라공격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초고-구수왕대는 말갈로부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부족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모순이 발생하는데 이는 백제 진왕이 한강유역의 소국들을 신라공격에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강유역은 3세기 초 대방군 설립으로 인한 유이민들이 대거 몰려들어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런 중에 동원하였던 한성백제군이 신라에게 천여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는 결정적 패배를 당한 것이다.

한성백제사는 마한사, 그 중에서도 한강유역 마한사의 단면이다. 따라서 마한 1국의 기록인 초기 백제본기를 읽으며 마한의 다른 나라들이 어떠했는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이는 신라본기도 마찬가지인데 변진한 1국의 기록인 왜의 기록을 읽으며 변진한의 다른 나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정하는 것이다. 마한지역은 한강유역에서, 변진한 지역은 낙동강유역에서 여러 정치세력들의 힘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구수왕 11년에 한성백제만 신라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마한의 여러 소국들이 신라와 전투를 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그 중에 1국만 기록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백제군 수천명을 방어했다고 나오면 실제로는 수만대군을 방어했을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은 변진한 군대만으로 가야제국을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배후에 있던 강력한 신라의 간섭으로 실패하니 이것이 포상팔국의 전쟁이다. 이후 마한군을 신라공격에 동원하는데 한강유역의 마한소국들이 북방이주민의 공격을 막는데 급급하여 신라를 제대로 공격을 못하고 오히려 대패한 것이다.

한강유역의 마한군을 동원하기 어려워진 백제 진왕은 그 대안으로 신라의 배후에 있던 왜국을 주목하게 된다. 당시 왜국은 비미호라는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었으나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 전전긍긍하는 형편이었다. 백제 진왕은 이제 주목해 왜국에게 가야와 신라공격에 군대를 동원하면 경제적인 대가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삼국지 동이전을 읽어보면 3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국제 교역품은 철이다. 그리고 철정은 그 철을 운반하는 대표적인 형태다. 실제로 남해안에서 3세기의 철정이 발굴되어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신빙성을 준다.

그런데 백제왕으로부터 철정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신공 46년조에 있다. 왜국이 제안을 받았다면 이 무렵이 한강유역의 마한소국들 군대가 신라군에게 대패하여 더 이상 동원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삼국사기로 비교해보면 신공 46년은 서기 224년이다.

신공 46년에 백제로부터 제안을 받고 신공 49년에 군대를 동원하는데 일본서기를 보면 모두 금강유역만 나온다. 따라서 백제 진왕이 동원한 군대는 한강유역의 마한 소국군이 아니고 금강유역의 마한 소국군이라는 뜻이다. 당시 영산강유역은 아직 완전히 백제의 통치하에 들어가지 않았다.

신공 49년에 백제군이 대승하여 가야 7국이 멸망한다. 제주도(침미다례)를 정복했으며 영산강유역의 일부 불복지대는 대부분 자연항복하고 백제의 마한통치권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신라는 멸망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신공 49년조가 없다. 이는 자신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라본기에는 신공 49년조가 있다. 이는 신라가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신라왕이 직접 출전했으며, 2월에서 3월에 걸친 대규모 전투였고, 3월에 가야 7국이 멸망하였다. 일본서기 가야 7국은 멸망한 후에 삼국사기 기림이사금 10년조처럼 국명을 바꾼다. 따라서 이 직후의 한반도 가야지역 상황을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에는 일본서기 가야 7국의 이름이 없다.

이상으로 살펴볼 때 위의 서기 224년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 46년조와 일치하며, 삼국지 동이전과 일치하고, 고고학적으로도 철정이 유통되던 3세기 전반의 동아시아 교역체계와도 일치하여 사실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