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여휘센터 주인장이 쓴 글로서 환단고기가 기록한 고구려 유적에 관한 내용이다. http://cafe.daum.net/yeohwi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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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주인장이 쓴 글 중에 [뿌리아름]대고구려 게시판 45번 글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대해서'라는 글이 있다.『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를 읽고 고구려에 있었다는 여러 유적들에 대해서 주인장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다.

1) 책성의 태조 무열제 기공비
2) 동압록 황성의 광개토경 대훈적비
3) 안주 청천강 언덕 위의 을지문덕 석상
4) 오소리강 밖의 연개소문 송덕비
5) 평양 모란봉 중턱의 동천제 조천석
6)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의 을파소의 묘
7) 운산 구봉산의 연개소문 묘

위의 것들이다. 이 중에서 현재 확인된 것은 동압록 황성, 즉 국내성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뿐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송덕비나 기공비, 석상과 조천석 등이 더 있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처음 이 내용을 읽고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했을 때는 단순히『환단고기』가 위서(僞書)니까 이 내용들 역시 거짓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인장은『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책의 내용이 100% 편찬자의 상상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봤을때 위에 기록된 나머지 6개의 고구려 유적 중 앞으로 몇개나 더 확인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넘어가고 말았는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거짓 기록이라면 왜 위와 같은 유적들만 기록했을까?' 먼저 다음 기록부터 한번 살펴보자.

『三國史記』卷15「高句麗本記」第3〈大祖大王〉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태조대왕 46년 봄 3월, 왕이 동쪽 책성으로 가는 도중에,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태조 무열제의 기공비(紀功碑). 하지만『삼국사기』에 의하면 국조태왕(國祖太王)은 책성 관리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겼다고 적고 있다. 즉,『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듯이 국조태왕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양자가 얘기하는 대상이 약간 다르다. 특이하게『삼국사기』는 거대한 조형물이나 무덤, 비석 축조에 대해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기에(광개토호태왕릉비문조차도...) 국조태왕의 이러한 遂紀功於岩 행위는 눈여겨 볼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봤을때『환단고기』의 기록은『삼국사기』같은 원사료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뭔가 중요한 원사료가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광개토호태왕릉비,『환단고기』가 광개토경대훈적비(廣開土境大勳蹟碑)라고 기록한 비문은 비록 문헌에는 없지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이유립 등이 실견했거나 신채호의 자료를 접한 뒤에 이처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광개토호태왕릉비가 알려진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이나, 그것이 고구려 19대 군주였던 광개토호태왕의 공적 등을 기록한 비문이라는 것이 알려진 시기는 상당히 늦은 시점이다. 그 이전에 이 비문에 대해 말해주는 어떠한 원사료가 확인되지 않는 이상, 이 기록은『환단고기』가 상당히 늦은 시점에 편찬된 책임을 알려주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5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 을지문덕, 연개소문, 동천제, 을파소

모두 고구려사에서 이름있는 인물들임에 틀림없지만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인물들이다. 장군도 있고, 국왕도 있으며, 대신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누구는 석상, 누구는 송덕비, 누구는 조천석, 누구는 묘가 있다고 적고 있다. 얼핏보면 일관성이 전혀 없으며 서로 상관관계도 없는 이와 같은 기록이 왜 등장했을까?

일단 동천제의 조천석을 거론해보자. 조천석(朝天石)이란『三國遺史』에 의하면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상제(上帝)에게 조회(朝會)하러 다니기 위해 밟고 다녔던 돌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실제 평양 지역에는 추모성왕이 기르던 기린을 타고 하늘로 상제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봤을때 이는 신성시되는 제례장소였다고 보이며, 그 제사장은 바로 고구려의 국왕이었던 듯 싶다. 그렇게 봤을때 조천석은 비단 동천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각 국왕들이 각각 다른 조천석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겠다. 암튼 이 부분 역시『삼국유사』에 얼핏 비슷한 부분이 나오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그럼 남는 것은 을지문덕의 석상, 연개소문의 송덕비와 묘, 을파소의 묘다. 주인장은 일단 연개소문의 송덕비와 묘, 2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 책의 편찬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당시 어려웠던 상황에서『환단고기』의 편찬자들과 연구자들은 동족들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심어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연개소문과 동시대 활약했던 추정국, 양만춘 등의 장군들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을지문덕 역시 마찬가지다. 강대했던 고구려를 대표하는 무장들에 대한 이야기와 전설을 낳은 유적들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중요한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을파소의 묘를 거론하는 것은 조금 의아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가 초기 고구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선구자적인 정치가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유적과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정보가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록에도 없고 전설상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나머지 유적들을 과연『환단고기』의 편찬자들은 왜 집어넣었을까? 어떤 이유에서? 만약 사실이라면 과연 어떤 원사료를 보고 넣었던 것이며, 거짓이라면 왜 이런 기록들을 만들어서 넣었는지 말이다. 선대에 남겨진 원사료를 후대에 편집해서 만든『삼국사기』와 같은 사료들은 하나같이 일관된 편찬원칙에 의거해 자료들을 재배열하기 마련이다. 즉, 기록을 취사선택하는데 있어서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환단고기』역시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환단고기』의 편찬자들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원사료를 인용했고, 어느 정도까지 거짓된 내용으로 채워넣었단 말인가?

그렇게 봤을때 고구려의 몇몇 유적을 소개한 이 부분 역시도『환단고기』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 유적의 상관관계가 서로 없다고 했을때 주인장은 이 기록들이 단순히『환단고기』의 편찬자들이 상상해서 집어넣은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전부터 알려져있던 사실들을 집어넣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유적이 위치한 지역까지 언급한 것은 단순히 상상해서 집어넣은 기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뭐 이런 자료들은 실물자료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현재까지 북한에서 이들 자료에 대해 발표한 연구성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단순히『환단고기』편찬자들이 상상해서 넣은 기록일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한국사에 있어서 수십년간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자료인만큼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성과가 진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봤을때 이처럼 기록 하나하나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환단고기』연구에 있어 또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카페 이름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yeohwicenter
카페 소개 : 뿌리아름. 말 그대로 우리의 조상과 우리의 뿌리를 알아가자는 뜻입니다. 이 곳이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역사 대신에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 살아숨쉬는 역사, 재미있는 역사에 대해서 토론하고 얘기하는 그런 공간으로 자리잡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저말고 방문해주셔서 모두들 인사말 남겨주세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의 힘이 모이면 우리의 뿌리를 알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상 까페 쥔장 여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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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여휘센터 주인장은 고고미술학자이며 젊은 역사학도다. 나라도 돈이 있다면 한 번 파보겠다. 그 이유는 나 역시 위 7개의 유적 기록이 그냥 임의로 적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료를 기초로 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개토왕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유적 6개가 다 나왔다고 해서 환단고기가 진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진서 여부는 내용의 진위문제가 아니라 저작권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약 10년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사학과 교수님께 배운 것이다. 그 분이 그랬다. 언제 내가 환단고기 내용이 틀렸다고 한 일이 있느냐고, 단지 위서라고만 하였지.

위서도 얼마든지 사실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진서도 얼마든지 거짓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진위서를 막론하고 항상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위판단은 연구자의 몫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한군데 정도 골라서 한 번 대대적으로 파보고 싶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