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삼국시대 7백년 중 반세기를 기준으로 가장 평화기 언제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반도 남부와 북부가 다른데, 현재 우리가 사는 남부 입장에서 보면 4세기 전반이다. 그 이유는 한반도가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4세기 전반에는 전쟁이 없다. 전쟁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평화의 가장 큰 상징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조선시대는 굉장한 평화기였다.

4세기 전반의 백제본기를 보면 비류왕의 치세이다. 통일된 국가이니 외부압력은 없을 것이고 만일 있다면 내부 문제다. 신라는 기림이사금과 흘해이사금의 시기인데, 3세기 말에 망해서 한의 진한에 들어간 뒤이니 전쟁과 관련된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4세기 한(백제)에 들어간 나라들이 대부분 이랬을 것이다.

비류왕: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다. 오래동안 민간에 좋은 평판이 널리 퍼졌다.

평화기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유일한 고통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났는데 이전 고이왕계인 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비류왕은 고이왕계가 아닌 인물이다. 비류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죽어 비상상황에서 고이왕계가 아닌 비류왕이 즉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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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잡담임.

분서왕을 죽인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대하여 국로추사(菊露秋寫)라는 책을 보면 검술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직접 확인하여보지 않았음).

부모를 백제군에게 잃은 신라 소년이 검술을 연마하였는데, 이를 낙랑태수가 알고 복수할 계책을 만들어주어, 그 소년이 백제 저자거리에서 칼춤을 추게되고, 이 칼춤소문이 분서왕에게까지 전해져 분서왕이 소년을 불어 칼춤묘기를 구경하던 중 그 소년이 분서왕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이야기가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나온다고 한다.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언전(諺傳)에 나이 7세에 백제에 들어가서 시중에서 칼춤을 추었는데 이를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이룬 것 같았다. 백제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불러서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창랑이 이 기회를 타서 왕을 찔렀다. 이로 인하여 백제국인들이 창랑을 죽였다. 신라인들이 창랑을 애통하게 여겨서 그 얼굴 모양을 본따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다.'  

하지만 국로추사를 보면 저자가 여지승람을 참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분서왕의 암살사건은 여지승람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여지승람은 이때 죽은 백제왕이 누구라고 명시하지 않고 있으나 국로추사는 분서왕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는 국로추사에 대한 서평인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고구려유기>가 20세기 초까지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딘가에서 나올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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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로추사(菊露秋寫 )
          古 951.01-G155g
          姜璘 저, 연기미상(20세기 전반).
          2권 2책, 활자본, 29 19.8cm.

檀君朝鮮에서 新羅 말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를 여러 史書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 저자의 서문에 姜璘이라는 저자명이 밝혀져 있으나, 그의 생몰년이나 활동에  관해서는 미상이다. 편찬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自序에서 밝힌 참고 史書들 중  年紀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서 ≪東史年表≫가 1915년으로 가장 늦은 것을 볼  때  20 세기 전반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된다.

[自序]에서 저자는 본서를 편찬한  목적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國家治亂의 道가 실려 있으므로 반드시 읽어야 하나 그 수가  너무  많아 섭렵하기 어렵고, 또 지식인들이 自國史는 도외시한 채 타국의 역사만을 배우고  있으므로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古今의 여러 史書를  두루  참고하여  우리나라의역사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고 밝혔다.

또 自序에는 저자가 참고한  총  32종에 달하는 역사서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古朝鮮記≫ ≪馬韓記≫ ≪渤海記≫  ≪高句麗留記≫ ≪新羅古志≫ ≪百濟史≫ 등 古記類로 보이는 자료들이 많이  이용되었으며, 그 밖에 ≪漢書≫ ≪魏書≫ ≪晋書≫ 등의 중국자료들과 ≪三國遺事≫  ≪東國通鑑≫ ≪星湖僿說≫ ≪輿地勝覽≫ 등 다양한 자료들이 이용되었다.

본서에서 저자는  단군을 조선의 시조로 설정하고, 그 조선의 國統이  "檀君朝鮮-箕子朝鮮-馬韓-百濟-新羅"로이어졌다고 보았다. 즉 단군의 조선 건국과 기자의 문명 전파를 인정하였으며,  기자조선의 準王이 위만에게 패한 후 남방으로 내려와 마한을  건국함으로써  조선의  국통을이은 것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마한이 백제에 항복하고, 다시 백제가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국통이 신라에 이어진 것으로 서술하였다. 이에 따라 저자는 본서를  크게  [檀君朝鮮] [百濟朝鮮] [新羅朝鮮]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술하였다.  서술할  때에는각각 단군조선, 백제, 신라의 왕의 재위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해에 일어난 각국의  역사적 사실들을 서술하였다.

각 왕명을 기록할 때는 王號를 쓰고 그 아래에 왕의  이름, 出自, 재위기간 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사실을 서술하는 가운데 史論을 덧붙여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檀君朝鮮]조에서는 단군-기자-마한으로 이어지는  과정, 단군과 기자의 治績, 三韓과 三國의 성립과정 등을 서술하였다. [百濟朝鮮]조에서는 온조왕대에 마한이 백제에 항복한 이후부터 백제 멸망까지를 서술하였는데, 삼국과  가야의 정치 외교 군사적인 문제들, 삼국통일과정에서 각국의 대응 모습,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 등을 기록하였다. [新羅朝鮮]조에서는 백제가 신라에  항복한  때부터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까지의 각 왕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였고, 後三國의 정립과 항쟁, 고려의 통일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渤海에 관한  기록도  나타나는데, 발해에 대하여 "粟末靺鞨로서 고구려의 속국이 된 別種이었다"라고  서술하였다.

한편 이 책에서는 마한이 백제에 항복한 해를 백제 온조왕의 원년으로, 백제가 신라에 항복한 해를 신라 무열왕의 원년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비록  국가가  교체되기는 하였지만 우리나라가 朝鮮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단일하게 이어져 왔다는 저자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문식)

http://kyujanggak.snu.ac.kr/BA/SGP-025-00261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