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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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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2007.12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주인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259 2007.12.17 10:28:00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646 Views 6 Voted / 0 Devoted
송산리 6호분 벽화(내부) :
- 송산리 6호분은 이 지구에서 발견된 유일한 벽화전축분인데 길이 4m에 폭이 2.5m의 남북 으로 긴 터널형이다. 남벽과 북벽은 수직이고 동서의 두 장벽은 상부가 둥글게 돔처럼 내경으로 접합되어 있으며, 동서 양벽에 각 3개, 북벽에 1개의 화염형 소룡이 있다. 무령왕릉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구축한 것이다. 벽에는 그릴 부분에만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를 그렸다. 남벽 주작의 좌우에는 일월 을 그려 장식했음이 특이하다. - 한국관광공사
공주 송산리에는 여러 기의 왕릉급 고분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석실분이거나 전축을 일부 가미한 석실분이다. 반면에 완전히 벽돌로만 쌓은 전축분이 2개가 있는데 무령왕릉과 6호분이다. 두 능은 축조방식이 거의 유사하다는 것 외에도, 거리도 바로 옆이고, 축조시기도 비슷하여 두 능의 주인이 아주 깊은 관계였음이 틀림없다. 무령왕릉은 한일 고대사를 통틀어 삼국시대 왕릉 중 내부에서 피장자가 어느 왕인가를 적은 근거가 나온 유일한 왕릉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6호분은 아직도 그 주인을 알 수 없다.
6호분에서는 특히 북방 부여계 문화로 알려진 사신도 벽화가 나왔는데, 남한지역에서 사신도가 나오는 유일한 지역이 금강유역이다. 이는 부여씨와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6세기 초는 고구려도 고분에 사신도를 본격적으로 그려 넣는 초창기로 아직 일반화 되지 않았을 때다. 따라서 금강유역의 사신도를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강유역의 3-4세기 고구려식 적석총에는 고분벽화가 없는데 당시는 고구려 고분에 아직 벽화가 발생하기 전이므로 없는 것은 당연하다.
6호분은 무덤의 규모나 화려한 사신도를 볼 때 왕이나 왕비에 근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두 고분은 거의 동시대에 유사한 형태로 축조되었으나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 2명을 매장한 고분이나 6호분은 1명만 매장한 고분임이 알려져 있다. 또 위치를 잡는데 6호분이 무령왕릉을 피해서 잡았다고 하여 그의 신분이 무령왕에게는 약간 미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무령왕 이후에 죽은 사람이다. 또 무령왕릉은 벽화를 그리지 않았으나 6호분은 벽을 화려하게 채색한 것을 보면 무령왕릉보다 이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동성왕과 성왕은 죽은 시기가 무령왕과 20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6호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외에 6호분은 임시무덤이 아니고 정식 무덤이라서 무령왕이 정식릉에 묻히기 전에 2년 3개월 동안 묻혔던 임시무덤도 될 수 없다. 무령왕의 임시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은 이미 발굴되었다.
무령왕릉이나 6호분이나 축조 시기가 비슷하여 축조한 사람이나 다 성왕일 것이다. 따라서 성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진왕제 하에서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으나, 왕이 즉위하게 되면 왕비 중에 1명을 택하여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다. 오래 전에 태자로 책봉되어 왕이 될 준비를 한 사람은 미리 자립위왕에 걸맞은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자립위왕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즉위와 동시에 그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면 된다.
하지만 (마치 일본서기의 응신이나 인덕처럼) 태자가 아니었다가 갑자기 왕이 된 사람은, 대부분 이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왕이 된 후에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맞아 왕후로 맞아 세워야 자립위왕이 된다. 더우기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왕은 과거의 진왕제에 의존할 가능성이 있다.
왕과 왕비를 한 능에 합장을 해야 될 때 왕후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되면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아버지인 왕과 함께 합장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왕후가 아닌 경우에는 누구를 아버지와 합장해야 하나? 공식적인 왕후인가? 아니면 나를 낳은 왕비인가? 왕의 능에는 왕후를 합장하는 것이 법도다. 따라서 공식적인 왕후가 왕 옆에 묻혀야 한다. 반면에 다음 왕을 낳은 그 어머니 역시, 다른 여타 왕비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비록 합장한 왕후는 아니나 그에 버금가는 예우가 필요하다고 본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다. 동성왕이 갑자기 죽자 그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것이다. 그는 동성왕과 자신의 어머니를 매개로 하는 담로관계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실제 관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동성왕의 제2자가 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30대 젊은 여인의 이빨이 무령왕을 자립위왕 시킨 공식적인 왕비, 즉 왕후의 이빨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6호분은 성왕의 어머니 무덤이 아니었을까 한다. 진왕제에서 비록 왕후가 못 되었으나, 다음 왕의 어머니가 되는 왕비는 왕후에 준하는 예우로 장사지내졌다고 본다. 그러면 진왕제하에서는 왕릉급 무덤은 왕의 숫자보다 많을 것이다.
- 송산리 6호분은 이 지구에서 발견된 유일한 벽화전축분인데 길이 4m에 폭이 2.5m의 남북 으로 긴 터널형이다. 남벽과 북벽은 수직이고 동서의 두 장벽은 상부가 둥글게 돔처럼 내경으로 접합되어 있으며, 동서 양벽에 각 3개, 북벽에 1개의 화염형 소룡이 있다. 무령왕릉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구축한 것이다. 벽에는 그릴 부분에만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를 그렸다. 남벽 주작의 좌우에는 일월 을 그려 장식했음이 특이하다. - 한국관광공사
공주 송산리에는 여러 기의 왕릉급 고분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석실분이거나 전축을 일부 가미한 석실분이다. 반면에 완전히 벽돌로만 쌓은 전축분이 2개가 있는데 무령왕릉과 6호분이다. 두 능은 축조방식이 거의 유사하다는 것 외에도, 거리도 바로 옆이고, 축조시기도 비슷하여 두 능의 주인이 아주 깊은 관계였음이 틀림없다. 무령왕릉은 한일 고대사를 통틀어 삼국시대 왕릉 중 내부에서 피장자가 어느 왕인가를 적은 근거가 나온 유일한 왕릉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6호분은 아직도 그 주인을 알 수 없다.
6호분에서는 특히 북방 부여계 문화로 알려진 사신도 벽화가 나왔는데, 남한지역에서 사신도가 나오는 유일한 지역이 금강유역이다. 이는 부여씨와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6세기 초는 고구려도 고분에 사신도를 본격적으로 그려 넣는 초창기로 아직 일반화 되지 않았을 때다. 따라서 금강유역의 사신도를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강유역의 3-4세기 고구려식 적석총에는 고분벽화가 없는데 당시는 고구려 고분에 아직 벽화가 발생하기 전이므로 없는 것은 당연하다.
6호분은 무덤의 규모나 화려한 사신도를 볼 때 왕이나 왕비에 근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두 고분은 거의 동시대에 유사한 형태로 축조되었으나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 2명을 매장한 고분이나 6호분은 1명만 매장한 고분임이 알려져 있다. 또 위치를 잡는데 6호분이 무령왕릉을 피해서 잡았다고 하여 그의 신분이 무령왕에게는 약간 미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무령왕 이후에 죽은 사람이다. 또 무령왕릉은 벽화를 그리지 않았으나 6호분은 벽을 화려하게 채색한 것을 보면 무령왕릉보다 이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동성왕과 성왕은 죽은 시기가 무령왕과 20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6호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외에 6호분은 임시무덤이 아니고 정식 무덤이라서 무령왕이 정식릉에 묻히기 전에 2년 3개월 동안 묻혔던 임시무덤도 될 수 없다. 무령왕의 임시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은 이미 발굴되었다.
무령왕릉이나 6호분이나 축조 시기가 비슷하여 축조한 사람이나 다 성왕일 것이다. 따라서 성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진왕제 하에서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으나, 왕이 즉위하게 되면 왕비 중에 1명을 택하여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다. 오래 전에 태자로 책봉되어 왕이 될 준비를 한 사람은 미리 자립위왕에 걸맞은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자립위왕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즉위와 동시에 그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면 된다.
하지만 (마치 일본서기의 응신이나 인덕처럼) 태자가 아니었다가 갑자기 왕이 된 사람은, 대부분 이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왕이 된 후에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맞아 왕후로 맞아 세워야 자립위왕이 된다. 더우기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왕은 과거의 진왕제에 의존할 가능성이 있다.
왕과 왕비를 한 능에 합장을 해야 될 때 왕후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되면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아버지인 왕과 함께 합장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왕후가 아닌 경우에는 누구를 아버지와 합장해야 하나? 공식적인 왕후인가? 아니면 나를 낳은 왕비인가? 왕의 능에는 왕후를 합장하는 것이 법도다. 따라서 공식적인 왕후가 왕 옆에 묻혀야 한다. 반면에 다음 왕을 낳은 그 어머니 역시, 다른 여타 왕비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비록 합장한 왕후는 아니나 그에 버금가는 예우가 필요하다고 본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다. 동성왕이 갑자기 죽자 그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것이다. 그는 동성왕과 자신의 어머니를 매개로 하는 담로관계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실제 관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동성왕의 제2자가 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30대 젊은 여인의 이빨이 무령왕을 자립위왕 시킨 공식적인 왕비, 즉 왕후의 이빨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6호분은 성왕의 어머니 무덤이 아니었을까 한다. 진왕제에서 비록 왕후가 못 되었으나, 다음 왕의 어머니가 되는 왕비는 왕후에 준하는 예우로 장사지내졌다고 본다. 그러면 진왕제하에서는 왕릉급 무덤은 왕의 숫자보다 많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