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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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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2007.12
일본서기가 기록한 백제-북위 전쟁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255 2007.12.03 10:20:37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703 Views 8 Voted / 0 Devoted
성군이란 무엇이고 폭군이란 무엇인가? 왕조시대는 왕과 신하가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균형을 이루며 유지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성군이란 권력을 신하에게 나누어 주는 왕이고, 폭군이란 신하의 권력을 거두어가는 왕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조선시대를 재상중심의 입헌군주제적 성격을 가진 왕조로 이야기하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초기에는 대통령중심제적 성격이 강하고 중반 이후로는 내각책임제적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그 경계에 있는 왕이 연산군이다. 연산군이 폭군이라 하나 그것은 관료들 입장이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거나 대규모 전쟁이나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동원하거나 하는 왕이 폭군이지, 지배층 내부에서 자신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폭군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연산군은 한국사에서나 폭군이지 중국사의 폭군들과 비교해 보면 전혀 폭군 축에 들어가지 못한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백제에는 폭군이 없다. 상대적으로 나쁘게 기록된 사람은 백제 멸망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의자왕정도이다.
만일 진왕제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과연 폭군일까? 그것은 명목상의 진왕이 통치하는 담로제를 깨고 전제왕권을 수립한 사람이 폭군일 수 밖에 없다. 근초고왕은 전제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노획한 풀품을 자신이 가져가지도 못하며, 전투에서 승리하여 더 북진하고 싶어도 여러 소국의 군대가 자신의 명을 듣지 않아 불가능한 그런 입장의 군주였다.
백제사에서 폭군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 있다면 정복의 시점이다. 정복자는 후대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짐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성백제사에서 큰 정복은 온조왕 이후 단 한번 있었다. 고이왕이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한 것은 작은 정복이다. 큰 정복은 웅진 남천 후 한반도를 장악하는 시점이다. 문주왕이나 삼근왕은 패전과 이에 따른 천도라는 혼란기의 왕이라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사명은 웅진남천 후 최초로 안정된 권력자의 위치에 올랐던 동성왕의 몫이었다.
그런데 중국대륙에서 남북조 국가간에 전쟁이 벌어져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지방세력들이 출병하여 공을 세우고, 그 댓가로 왕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국제적인 보장을 통해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동성왕은 난감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동성왕 20년의 무진주 출병은 백제라는 나라의 방향을 결정짓는 대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왕이 이기면 한성백제 같은 중앙집권제로 가고, 지면 과거의 진왕 같은 담로제로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목격한 백제인들은 동성왕을 <담력이 매우 컸다>고 했는데 이는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반대로 이런 일은 담로제를 해 왔던 삼한백제의 신하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왕이 도를 어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왕들 중에 유일하게 동성왕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열천황 4년(동성왕 23년);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섬왕(무령왕)을 세웠다.
여기서 국인이란 과거 삼한 시절의 신지들을 비롯한 관료들이다. 동성왕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들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무진주 출병 같은 왕이 신권을 거두어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성왕 22년의 궁궐단장도 훗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과 같은 일종의 왕권강화책의 일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성백제 방식이지 삼한백제 진왕제하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왕제하의 궁궐은 다음과 같았다.
인덕천황 4년(410년); 2월, 궁의 담장이 무너져도 수축하지 아니하고, 지붕의 갈대가 썩어도 개수하지 않았다(궁궐의 지붕을 기와가 아니고 갈대로 이었다는 뜻임).
인덕천황 7년(410년); 4월, 황후가 말하기를 "궁궐의 담장이 무너졌어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대궐이 무너지고 (비가 새서) 의복이 젖습니다."
따라서 동성왕의 궁궐단장을 보는 국인들의 시각은 진왕제하의 백제왕이 보이는 모습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세기 왜국의 왕들 중에 철권통치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 곤지(웅략천황)이다. 동성왕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상으로 판단할 때 동성왕의 무도를 탓한 무열천황 4년조는 일본서기가 기록한 백제-북위 전쟁의 간접적 기록이라 볼 수 있다.
흔히 조선시대를 재상중심의 입헌군주제적 성격을 가진 왕조로 이야기하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초기에는 대통령중심제적 성격이 강하고 중반 이후로는 내각책임제적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그 경계에 있는 왕이 연산군이다. 연산군이 폭군이라 하나 그것은 관료들 입장이고,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거나 대규모 전쟁이나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동원하거나 하는 왕이 폭군이지, 지배층 내부에서 자신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폭군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연산군은 한국사에서나 폭군이지 중국사의 폭군들과 비교해 보면 전혀 폭군 축에 들어가지 못한다.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백제에는 폭군이 없다. 상대적으로 나쁘게 기록된 사람은 백제 멸망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의자왕정도이다.
만일 진왕제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과연 폭군일까? 그것은 명목상의 진왕이 통치하는 담로제를 깨고 전제왕권을 수립한 사람이 폭군일 수 밖에 없다. 근초고왕은 전제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노획한 풀품을 자신이 가져가지도 못하며, 전투에서 승리하여 더 북진하고 싶어도 여러 소국의 군대가 자신의 명을 듣지 않아 불가능한 그런 입장의 군주였다.
백제사에서 폭군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 있다면 정복의 시점이다. 정복자는 후대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짐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성백제사에서 큰 정복은 온조왕 이후 단 한번 있었다. 고이왕이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한 것은 작은 정복이다. 큰 정복은 웅진 남천 후 한반도를 장악하는 시점이다. 문주왕이나 삼근왕은 패전과 이에 따른 천도라는 혼란기의 왕이라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사명은 웅진남천 후 최초로 안정된 권력자의 위치에 올랐던 동성왕의 몫이었다.
그런데 중국대륙에서 남북조 국가간에 전쟁이 벌어져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지방세력들이 출병하여 공을 세우고, 그 댓가로 왕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국제적인 보장을 통해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동성왕은 난감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동성왕 20년의 무진주 출병은 백제라는 나라의 방향을 결정짓는 대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왕이 이기면 한성백제 같은 중앙집권제로 가고, 지면 과거의 진왕 같은 담로제로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목격한 백제인들은 동성왕을 <담력이 매우 컸다>고 했는데 이는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반대로 이런 일은 담로제를 해 왔던 삼한백제의 신하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왕이 도를 어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왕들 중에 유일하게 동성왕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열천황 4년(동성왕 23년);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섬왕(무령왕)을 세웠다.
여기서 국인이란 과거 삼한 시절의 신지들을 비롯한 관료들이다. 동성왕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들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무진주 출병 같은 왕이 신권을 거두어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성왕 22년의 궁궐단장도 훗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과 같은 일종의 왕권강화책의 일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성백제 방식이지 삼한백제 진왕제하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왕제하의 궁궐은 다음과 같았다.
인덕천황 4년(410년); 2월, 궁의 담장이 무너져도 수축하지 아니하고, 지붕의 갈대가 썩어도 개수하지 않았다(궁궐의 지붕을 기와가 아니고 갈대로 이었다는 뜻임).
인덕천황 7년(410년); 4월, 황후가 말하기를 "궁궐의 담장이 무너졌어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대궐이 무너지고 (비가 새서) 의복이 젖습니다."
따라서 동성왕의 궁궐단장을 보는 국인들의 시각은 진왕제하의 백제왕이 보이는 모습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세기 왜국의 왕들 중에 철권통치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 곤지(웅략천황)이다. 동성왕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상으로 판단할 때 동성왕의 무도를 탓한 무열천황 4년조는 일본서기가 기록한 백제-북위 전쟁의 간접적 기록이라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