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로제하의 소국에 항상 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왕통을 폐하고 아예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남가야가 여기에 해당한다. 대가야와 남가야(수로왕에 시작하는 금관가야)는 1세기라는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어 6세기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 통합되어 사라지는데, 대가야는 합리적인 숫자의 16명의 왕이 있는 반면에, 남가야는 왕의 숫자가 10명으로 6명이나 적다.  대가야는 227년에 멸망하고 5세기 초에 재건국되는 약 180년 동안 명목상의 왕이 존재하였지만, 남가야는 그 180년 동안에, 즉 이시품왕과 좌지왕 사이에 왕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담로제하에서 항상 명목상의 왕과 실세 관료가 분리되어 등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왕이 직접 종주국과 혼인을 맺고 엄지가 되어 소국을 통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엄지는 세력이 점차 막강하여져서 나중에는 종주국을 능가하게 된다. 이것이 3세기 중반에 발생한 현실이다. 소국 중에 마한지역의 마한왕과 진한지역의 진한왕은 스스로 외교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마한왕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진왕을 세우게 된다.

진왕을 세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진왕의 왕족 중에 자신에게 가장 호의적인 인물을 골라 그 사람에게 자기 왕실의 여인을 출가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왕의 왕족은 실세인 마한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워 삼한의 여러 소국들로부터 진왕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마치 무신정권의 실력자 딸과 혼인하였던 고려왕이나, 막부의 최고 실권자 딸을 왕비로 택해야 했던 일본의 천황과 유사한데 이것이 소위 진왕의 자립위왕이다.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진왕의 왕족 중에 마음에 드는 인물이 하나도 없으면 마한왕은 자기 휘하의 장군 한명에게 왕실의 여인을 주어 이전 진왕의 양자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 진왕은 명목상으로는 삼한의 최고 통치자이므로 마한왕 위 서열이나, 실제로는 마한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의 예가 이른바 461년에 있었던 곤지(왜왕 武) 가문의 왜국 이주다.

웅략조를 보면 다음 왕인 청령천황을 웅략의 왕후가 아닌 원비 한원의 딸로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윤공(왜왕 濟)의 양자로 들어온 웅략 자신은 왕후의 제5자로 기록된다. 즉 진왕제에서는 실제로 왕위를 잇는 경우에는 사실대로 기록하고, 양자가 왕위를 있는 경우에는 왕비 중 왕후의 아들로 기록하는데, 순서는 아들로 들어온 순서대로 적는 것이다.

응신의 양자인 인덕의 경우도 같다. 토도태자가 자립위왕을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에게는 왕의 시호와 대수를 주지 않고, 그의 재위가간은 아버지인 응신의 재위기간을 연장하여 포함시켜버린다. 그리고 진왕이 된 인덕은 응신의 왕비 중 왕후의 아들로 입적한다. 응신의 제4자라는 것은 친아들인 토도태자를 비롯하여 양자로 들어온 순서다. 응신의 양자에는 인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명이다. 따라서 인덕은 응신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진왕제의 서열상으로는 토도태자의 동생이 된다. 일본서기의 5세기 천황들 중에 중국풍 표현을 써서 가장 요란하게 치장한 인물이 인덕과 응략이라고 한다.

실력 있는 소국의 왕이 직접 진왕가에 자신의 여인을 출가시키고 스스로 엄지가 되어 소국을 통치한 경우로 진사왕과 전지왕이 있다. 응신의 왕후 중희가 진사왕의 딸로 추정되고, 인덕의 왕후 팔전황녀가 전지왕의 누이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