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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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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
2007.11
담로제가 봉건제나 군현제와 다른 점 1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247 2007.11.22 12:30:02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669 Views 8 Voted / 0 Devoted
중국사를 보면 통일을 한 후에 왕족을 각 지역에 봉하고 임기제한 없는 통치권을 준다. 그런데 임기가 없다보면 이들은 통치자의 지위를 세습하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중앙정부와 단절되거나 나아가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지방의 통치자가 중앙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이 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본래 북경지역 통치자였던(연왕) 명나라의 영락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통일 후 왕권이 안정되는 시기가 되면 과거에 봉했던 지방의 통치자들을 폐하고 중앙에서 임기를 가진 전문 관료들을 통치자로 파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통일을 완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반부가 이른바 봉건제이고 후반부가 군현제이다. 그리고 주나라는 군현제 없이 봉건제로 끝난 경우이다.
그러면 담로제(다물제, 소국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 개막기의 고구려본기를 보면 비류국이 어떻게 고구려에 통합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비류국 마지막 왕인 송양이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왕에게 눌려 자신의 딸을 동명왕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 양측이 혼인을 맺고, 이 혼인을 바탕으로 자신이 본래 통치하던 비류국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따라서 송양의 권력은 자신의 딸의 권세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다.
담로제는 삼국사기 마지막에도 나온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의 건국자인 태조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양측이 혼인을 맺고, 이 혼인을 바탕으로 경순왕이 자신이 본래 통치하던 경주지역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따라서 경순왕의 권력은 자신의 딸의 권세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다.
담로제가 봉건제나 군현제와 가장 다른 점은, 봉건제나 군현제는 통일을 이룬 다음에 실시하는 지방통치제도이나, 담로제는 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져 통일 후까지 유지되는 지방통치제도라는 점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끝나는 그 담로제가 가장 꽃을 피웠던 나라가 백제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4세기의 삼한백제와 그의 후신인 5세기의 왜국이었다. 그러면 백제의 담로제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삼한백제가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지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제도가 이 담로제인데, 그 내용은 삼국사기를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담로제에 따라 종주국이 소국을 통합하면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는 신라가 왜국(임나가야)의 담로국이 되어 삼한의 진한에 들어가는 298년-343년 사이의 신라본기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전쟁에 진 유례이사금은 폐위된다. 유례이사금 아들 대신에 구 왕족 중 한 명이 기림이사금으로 즉위하나 그는 실세가 아니고 이찬 장흔이 실세가 되어 신라를 통치한다. 기림이사금이 죽었으나 그의 아들이 아니고 구 왕족 중에서 새로운 왕을 세우니 이 이가 흘해이사금이다. 기림이사금이나 흘해이사금은 제사를 지내거나 구휼활동을 하는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이찬 장흔이 죽고 아찬 급리가 다음 실세 통치자가 되는데 그는 장흔의 아들이 아니다. 장흔은 종주국과 혼인을 못했으나 급리는 자신의 딸을 종주국인 왜국왕의 왕세자비로 보내고, 그 왕세자비가 된 자신의 딸의 권세를 배경으로 신라를 통치한다.
이렇게 소국을 통치하는 실세관료들 중 큰 소국의 통치자는 ‘엄지(臣智)’라고 하고, 작은 소국의 통치자는 ‘읍차’라였다. 따라서 삼한의 진왕은 모든 엄지들의 왕, 즉 聖音(성엄)이다. 칠지도: 百濟王世子 奇生 聖音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담로국이 되고 또 유지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담로국이 된 소국의 구 통치자를 폐위한다.
(2) 구 통치자의 아들을 제외하고 다른 구 왕족 중에서 새 통치자를 세우는데 통치권은 박탈한다.
(3) 실권을 상실한 왕은 정신적 또는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다.
(4) 관료 중에 한 명을 지정하여 그에게 통치권을 준다.
(5) 그 관료는 자신의 딸이나 누이를 종주국 왕실 가문에 시집보내고, 왕후가 된 자신의 딸이나 누이의 권세를 배경으로 소국을 통치한다.
(6) 실세 관료의 지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이상의 내용은 백제본기로도 판단이 가능하다. 분서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당하여 죽는 통에 그의 어린 아들 대신에 다른 인물이 왕이 되니, 그가 4세기 전반의 한성백제를 통치한 비류왕이다. 비류왕은 고이왕 이전 왕통인 구수왕 계열의 여자를 자신의 가문에 들임으로써 삼국사기는 그를 구수왕의 제2자로 기록하게 된다. 담로제하에서는 실제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구 왕통의 여인을 매개로 하여 연결되면, 새 왕은 전 왕의 제2자가 된다. 신라본기는 백제본기와 다르게 이런 경우 무조건 사위로 기록한다.
비류왕이 죽자 왕위는 이전에 즉위하지 못한 분서왕의 아들에게 돌아가니 이 이가 계왕(설왕)이다. 계왕이 왕위를 찾아온 것을 보면 이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2년만에 퇴위한다. 그리고 한성백제는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
삼한백제는 계왕의 아들이 아니고 구 왕족 중에 한 명을 선정하여 명목상의 한성백제 왕으로 즉위시킨다(근초고왕). 이 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된 것을 볼 때 역시 비류왕 가문과 여인을 매개로 연결된 것이다. 각료 한 명(조정좌평 진정)을 선정하여 실권을 주는데, 이 각료는 자신의 딸 혹은 누이를 진왕의 "왕후"로 들여보내 혼인을 맺고, 그 왕후가 된 자신의 딸 혹은 누이의 권세를 배경으로 한성백제를 통치하게 된다. 따라서 한성백제에서는 이 조정좌평 진정이 엄지가 된다.
나는 오래 동안 왜 계왕이 2년만에 퇴위하였는가를 두고 고민하여왔다. 그가 퇴위한 이유가 자립위왕을 하고 백제왕을 칭하려 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자 백제왕(진왕)은 그를 폐하고 한성백제를 아예 신라처럼 완전한 담로국으로 만들어 버리려 한 것이 아닌지. 재위 2년만에 퇴위하였다는 것도 근거가 된다. 근초고왕조를 보면 재위 2년째가 왕이 엄지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명목상의 군주로 옮겨가는 해이기 때문이다. 침류왕조도 유사한데 침류왕도 2년째에 실각하기 때문이다.
왕력은 기본적으로 왕실의 기록이다. 그런데 왕이 실권을 상실한 명목뿐인 하수아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왕실의 입장에서 불편한 것이다. 근초고왕조의 공백은 신하에게 역사서를 쓰게 한 당사자인 근초고왕이 스스로 삭제한 것이라고 본다. 김부식이 받은 백제왕실의 원사료에도 근초고왕 전반 20년은 비어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이제 그 원대한 식견이 무엇이었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통일 후 왕권이 안정되는 시기가 되면 과거에 봉했던 지방의 통치자들을 폐하고 중앙에서 임기를 가진 전문 관료들을 통치자로 파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통일을 완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반부가 이른바 봉건제이고 후반부가 군현제이다. 그리고 주나라는 군현제 없이 봉건제로 끝난 경우이다.
그러면 담로제(다물제, 소국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 개막기의 고구려본기를 보면 비류국이 어떻게 고구려에 통합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비류국 마지막 왕인 송양이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왕에게 눌려 자신의 딸을 동명왕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 양측이 혼인을 맺고, 이 혼인을 바탕으로 자신이 본래 통치하던 비류국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따라서 송양의 권력은 자신의 딸의 권세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다.
담로제는 삼국사기 마지막에도 나온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의 건국자인 태조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양측이 혼인을 맺고, 이 혼인을 바탕으로 경순왕이 자신이 본래 통치하던 경주지역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따라서 경순왕의 권력은 자신의 딸의 권세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다.
담로제가 봉건제나 군현제와 가장 다른 점은, 봉건제나 군현제는 통일을 이룬 다음에 실시하는 지방통치제도이나, 담로제는 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져 통일 후까지 유지되는 지방통치제도라는 점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끝나는 그 담로제가 가장 꽃을 피웠던 나라가 백제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4세기의 삼한백제와 그의 후신인 5세기의 왜국이었다. 그러면 백제의 담로제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삼한백제가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지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제도가 이 담로제인데, 그 내용은 삼국사기를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담로제에 따라 종주국이 소국을 통합하면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는 신라가 왜국(임나가야)의 담로국이 되어 삼한의 진한에 들어가는 298년-343년 사이의 신라본기를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전쟁에 진 유례이사금은 폐위된다. 유례이사금 아들 대신에 구 왕족 중 한 명이 기림이사금으로 즉위하나 그는 실세가 아니고 이찬 장흔이 실세가 되어 신라를 통치한다. 기림이사금이 죽었으나 그의 아들이 아니고 구 왕족 중에서 새로운 왕을 세우니 이 이가 흘해이사금이다. 기림이사금이나 흘해이사금은 제사를 지내거나 구휼활동을 하는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이찬 장흔이 죽고 아찬 급리가 다음 실세 통치자가 되는데 그는 장흔의 아들이 아니다. 장흔은 종주국과 혼인을 못했으나 급리는 자신의 딸을 종주국인 왜국왕의 왕세자비로 보내고, 그 왕세자비가 된 자신의 딸의 권세를 배경으로 신라를 통치한다.
이렇게 소국을 통치하는 실세관료들 중 큰 소국의 통치자는 ‘엄지(臣智)’라고 하고, 작은 소국의 통치자는 ‘읍차’라였다. 따라서 삼한의 진왕은 모든 엄지들의 왕, 즉 聖音(성엄)이다. 칠지도: 百濟王世子 奇生 聖音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담로국이 되고 또 유지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담로국이 된 소국의 구 통치자를 폐위한다.
(2) 구 통치자의 아들을 제외하고 다른 구 왕족 중에서 새 통치자를 세우는데 통치권은 박탈한다.
(3) 실권을 상실한 왕은 정신적 또는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다.
(4) 관료 중에 한 명을 지정하여 그에게 통치권을 준다.
(5) 그 관료는 자신의 딸이나 누이를 종주국 왕실 가문에 시집보내고, 왕후가 된 자신의 딸이나 누이의 권세를 배경으로 소국을 통치한다.
(6) 실세 관료의 지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이상의 내용은 백제본기로도 판단이 가능하다. 분서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당하여 죽는 통에 그의 어린 아들 대신에 다른 인물이 왕이 되니, 그가 4세기 전반의 한성백제를 통치한 비류왕이다. 비류왕은 고이왕 이전 왕통인 구수왕 계열의 여자를 자신의 가문에 들임으로써 삼국사기는 그를 구수왕의 제2자로 기록하게 된다. 담로제하에서는 실제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구 왕통의 여인을 매개로 하여 연결되면, 새 왕은 전 왕의 제2자가 된다. 신라본기는 백제본기와 다르게 이런 경우 무조건 사위로 기록한다.
비류왕이 죽자 왕위는 이전에 즉위하지 못한 분서왕의 아들에게 돌아가니 이 이가 계왕(설왕)이다. 계왕이 왕위를 찾아온 것을 보면 이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2년만에 퇴위한다. 그리고 한성백제는 다음과 같은 수순을 밟는다.
삼한백제는 계왕의 아들이 아니고 구 왕족 중에 한 명을 선정하여 명목상의 한성백제 왕으로 즉위시킨다(근초고왕). 이 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된 것을 볼 때 역시 비류왕 가문과 여인을 매개로 연결된 것이다. 각료 한 명(조정좌평 진정)을 선정하여 실권을 주는데, 이 각료는 자신의 딸 혹은 누이를 진왕의 "왕후"로 들여보내 혼인을 맺고, 그 왕후가 된 자신의 딸 혹은 누이의 권세를 배경으로 한성백제를 통치하게 된다. 따라서 한성백제에서는 이 조정좌평 진정이 엄지가 된다.
나는 오래 동안 왜 계왕이 2년만에 퇴위하였는가를 두고 고민하여왔다. 그가 퇴위한 이유가 자립위왕을 하고 백제왕을 칭하려 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자 백제왕(진왕)은 그를 폐하고 한성백제를 아예 신라처럼 완전한 담로국으로 만들어 버리려 한 것이 아닌지. 재위 2년만에 퇴위하였다는 것도 근거가 된다. 근초고왕조를 보면 재위 2년째가 왕이 엄지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명목상의 군주로 옮겨가는 해이기 때문이다. 침류왕조도 유사한데 침류왕도 2년째에 실각하기 때문이다.
왕력은 기본적으로 왕실의 기록이다. 그런데 왕이 실권을 상실한 명목뿐인 하수아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왕실의 입장에서 불편한 것이다. 근초고왕조의 공백은 신하에게 역사서를 쓰게 한 당사자인 근초고왕이 스스로 삭제한 것이라고 본다. 김부식이 받은 백제왕실의 원사료에도 근초고왕 전반 20년은 비어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이제 그 원대한 식견이 무엇이었지를 짐작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