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왕때까지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비슷한 정도의 공방전을 펼치나 고이왕이 들어서면서 힘의 균형이 백제 쪽으로 기운다. 힘의 우위가 들어난다. 그런데 한성백제를 장악한 말갈인은 바로 신라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고이왕대의 신라에 대한 정책은 다음처럼 변한다. 구수왕 이전과 다르게 신라에 대한 확고한 군사적인 우위가 보인다.

편의상 고이왕의 재위기를 넷으로 나누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위왕을 위한 노력기인 제3기다. 이 시기에 고이왕의 대표 업적(제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는 이 제도를 계승한다.

가. 집권 1기 - 신라에 대한 관망기
나. 집권 2기 - 신라(백제의 지시)와 위나라(고구려의 지시) 공격에 동원됨
다. 집권 3기 - 자립위왕 노력기
라. 집권 4기 - 자립위왕 실패기

가. 집권 1기 - 신라에 대한 관망기

3년;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여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5년; 봄 2월,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나. 집권 2기 - 신라와 위나라 공격에 동원됨

7년; 군사를 보내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여름 4월,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내외의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겼다. 가을 7월, 석천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 때 냇가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왕이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다.

10년; 봄 정월,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13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 자사 관구 검이 낙랑 태수 유 무, 삭방 태수 왕 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14년;  봄 정월,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진충을 우보로 임명하였다.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직급이 우보, 좌장 등으로서 아직 좌평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22년 가을 9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군과 괴곡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신라 장수 익종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다. 집권 3기 - 자립위왕 노력기

26년; 가을 9월, 푸르고 보랏빛 나는 구름이 마치 누각 모양으로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27년; 봄 정월, 내신좌평을 두어 왕명의 출납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좌평을 두어 물자와 창고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좌평을 두어 예법과 의식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좌평을 두어 숙위 병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좌평을 두어 형벌과 송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좌평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달솔·은솔·덕솔·한솔·나솔· 장덕·시덕·고덕·계덕·대덕·문독·무독·좌군·진무·극우 등을 두었다. 6개 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8년; 봄 정월 초하룻날, 왕이 자주 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라. 집권 4기 - 자립위왕 실패기

33년;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39년;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5년;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했다.

5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 53년; 봄 정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고이왕의 집권 초기에는 진왕정부와의 관계설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로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왕이 큰 사냥을 몇 차례 나가더니 정책이 바꾸어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는 진왕백제(삼한백제)의 한반도 통일정책에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한성백제를 동원한 것으로 두 세력이 타협한 것이다.

당시 백제 내부에서 군사력은 말갈을 방비해야 하는 한강유역과, 신라와 가야제국을 방비해야 하는 낙동강유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진왕은 자신의 직속 군대는 얼마 되지 않아서 진왕군대의 실체는 여러 소국의 연합군이다. 마치 후삼국 쟁패 시기의 고려 태조의 군대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물자를 노획해도 진왕이 가져가지 못하고, 온조왕조나 근초고왕조에서 보는 것처럼 진왕이 분배하는 형식만 취하고 실제로는 군사를 동원한 각 소국이 가져가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일본서기 응신 22년조에 나오는 (신라와의) 전쟁 이후 각 세력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는 모습과도 같다.

하지만 재위의 26년이 지나자 달라진다. 나는 이를 진왕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라고 본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조치가 진왕국가에 해당하는 새로운 통치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좌평제다. 재위 22년째를 끝으로 백제는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갈문화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고이왕조를 보면 말갈문화를 추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왕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를 모르지만, 28년조를 보면 진왕도 그와 유사한 옷을 입고 통치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 "왕이 자주 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고이왕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한다. 즉 신라왕실의 여인을 보내면 왕후로 삼고 이를 주변 여러 나라에 과시함으로써 자립위왕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라는 이를 거절한다. 고이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는 충분히 자신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시 신라가 이를 거절하는 데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을 것이다.

신라본기를 보면 이 사신이 온 직후 신라 내부에 대사건이 벌어진다. 첨해이사금이 실각하고 새로운 계통의 왕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신라의 시조와 구별되는 태조대왕이자 최초의 김씨왕인 미추이사금이다. 이로 미루어 당시 첨해이사금은 온건파의 견해를 쫓아 백제와 화친하려했으나, 미추이사금을 비롯한 강경파의 반대에 밀려 실패하고 실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는 유례-기름-흘해조에 왕비 기록이 없는데 이는 이들이 삼한소국의 여인을 왕비로 맞았기 때문이다. 즉, 담로국이 된 것이다. 따라서 4세기 중반 이후 독립한 내물왕과 실성왕은 이 3명의 왕을 생략하고 미추왕에게 자신들의 정통성을 연결시킨다. 이들은 아마 미추왕 계열의 여인을 왕비로 삼았을 것이다. 마치 해방 후 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시대를 생략하고 고종황제의 사위행세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라가 거절하자 백제는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과거 관구검부대에 배속했던 강력한 선비족 기병부대를 이끌고 내려온 신라의 지배층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그러다 고이왕 53년째가 되면 다시 신라에 화친사신을 보낸다. 이는 신라의 정권이 바뀌어 강경파 왕이 죽고 새로운 통치자가 들어섰다는 뜻이기도 한다. 신라본기를 보면 이 직전인 고이왕 51년에 강경파를 이끌던 미추이사금이 죽고, 유례이사금이라는 새로운 왕이 들어섰다.

고이왕은 죽기 직전까지 자립위왕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 문제는 약 1세기가 지난 후 근초고왕에 의해 해결된다. 고이왕의 가장 큰 업적인 좌평제는 그가 자립위왕을 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