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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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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의 자립위왕 1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239 2007.11.05 22:04:41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591 Views 1 Voted / 0 Devoted
백제 고이왕은 초기 한성백제사에서 온조왕 이후 최대의 정복자이자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고이왕대는 이전시대와 전혀 다른 단층의 모습을 보인다. 지배층이 변화되고 제도 역시 좌평제를 실시하는 등 다 바뀐다. 백제본기에 처음으로 쏠 射자가 등장하는 등 본래 고구려 대표문화인 활문화가 나타나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대 행렬도에 나타나는 북과 피리를 백제가 사용하는 등 풍습도 모두 고구려식으로 바뀐다. 고이왕의 백제군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군의 편제방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이왕의 전술 역시 기마전술로서 東에 번쩍, 西에 번쩍하는 말갈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런 모든 변화는 한성백제의 지배층이 解씨로 대표되는 부여계에서 眞씨로 대표되는 말갈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항복한 말갈족의 집단거주지이던 북부의 眞씨가 중앙으로 들어오는데, 만일 삼국사기가 眞씨를 북부출신이 아니라 다른 부 출신이라고 하였다면 이는 서술의 모순이 된다. 眞씨는 백제가 한반도로 들어온 후에 만난 세력으로, 본래 황해도 남부지역에 선주하던 고조선 계열로 추정된다. 혹시 말갈이라는 말이 부여/고구려인들이 과거의 잔존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말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풍납토성은 3세기 초에 축조가 중단되는데 이는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말갈을 막기 위해 쌓았던 풍납토성이 말갈군 손에 떨어진 것이다. 한성백제의 고이왕대는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서해안에 이르는 한강유역 교통로의 대부분이 말갈군에게 넘어갔다고 생각된다. 백제본기에 처음으로 강화도(서해대도)가 등장하는 것으로부터 중국 대륙으로 가는 뱃길도 새 백제(말갈)에게 넘어갔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결국 고이왕의 말갈은 이전 한성백제의 모든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고 생각된다.
혹자는 고구려가 말갈을 흡수하였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거짓이며, 실제로는 후대의 일로서 말갈군이 고구려군의 명령을 받아 전투를 치룬 최초의 기록은 4세기 말 진사왕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3세기에 고구려가 외침을 당해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속민>이던 말갈군을 동원한 전투기록도 있다.
*고이왕 13년(246년이 아니라 245년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치니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요동의) 낙랑의 변방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잡아왔다.
일제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석촌동을 비롯한 한강유역에 3-4세기에 성립된 백여 기 가까운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덤이 있었는데 고이왕 집단은 그 주인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 혹시 근초고왕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나, 근초고왕은 4세기 후반의 인물이라서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근초고왕의 성격도 거대고분을 쓰는 정복군주가 아니고 중흥군주이다. 4세기 후반에 한강유역에 고구려식 고분이 사라지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어서 고고학적사료와 문헌사료가 일치한다.
그런데 그 강력한 고이왕이 자립위왕을 하지 못했다. 자립위왕에 실패하였다는 가장 큰 증거는 삼국사기다. 그의 사신은 백제왕의 사신이 되지 못하고 백제에서 온 사신일 뿐이다. 반면에 자립위왕 한 근초고왕의 사신은 백제왕의 사신이어서 그가 진왕급 지도자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근초고왕 재위시 백제 진왕은 백제사 최초로 낙랑태수 직을 받은 여구였다. 훗날 왜국을 건국한 응신은 여구-여휘-응신으로 이어지는 계열의 왕이다.
중국 사서를 보아도 그렇다. 삼국지 동이전이 그의 재위시기에 해당하나 당시에 금강유역에 진왕이 따로 존재하였으며, 3세기 후반에는 마한왕이 서진에 외교관을 파견하는데 고이왕은 대 중국 외교도 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이왕 같은 강력한 정복군주가 들어서면 과거 3루왕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여 자립위왕을 시도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이왕을 개루왕의 제2자라고 하였는데 백제본기에서 제2자란 담로관계로 왕통이 계승된 경우, 즉 어떤 여인을 매개체로 하여 둘이 연결된 경우를 뜻한다. 아마 고이왕은 즉위 무렵 개루왕 계열의 여인을 왕비로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립위왕을 하려면 이것으로는 안 되고 신라 같은 강력한 소국출신의 여인을 왕후로 세워야 한다.
한강유역을 장악한 고이왕은 당연히 자립위왕 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 흔적이 삼국사기에 남아있을 것이다. 특히 집권 초창기는 자신들이 가져온 고구려문화를 이식하는 과정이었으나, 정권이 안정되면서 진왕의 담로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립위왕을 위한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고이왕이 자립위왕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