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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무왕의 즉위에 대한 고찰

백제사 조회 수 1858 추천 수 0 2010.03.26 14:07:43

휴정 님의 질문과 일도안사님의 대답을 읽다 보니,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판을 두드립니다. 물론 제 대답이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도움은 될 것입니다. 글이 길어서 몇 편으로 나누어서 올리려고 하니, 양해해 주세요.

 

무왕이 어떻게 왕위에 올라서 자립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설명하려면 멀리 둘러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왕인 부여 장(이하 부여 장이라고 부름)과 그의 아내인 선화공주의 출신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죠.

 

먼저 부여 장의 출신을 봅시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부여 장이 “법왕의 아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법왕이 왕위에 올랐다가 다음해에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법왕인 부여 선의 뒤를 이었다는 기록뿐입니다.

 

『삼국사기』는 그가 부여 선의 “아들”이라고 설명하지만, 몇 번째 아들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장자(長子)나 원자(元子)라고 적었다면 못해도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렇지 않고 ‘둘째 아들’이라고 적었다면 이것은 책봉된 것이 아니라 정변을 일으켜 실력으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역시 의문을 품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서는 부여 장을 그냥 ‘아들’이라고만 부르고 있기 때문에, ‘원래는 왕위에 오를 만한 자격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 어쩌다가 왕이 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삼국유사』를 보면 의문이 더 커집니다. 그의 탄생에 얽힌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재기(才器)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랏사람들이 그 때문에 서동이라 이름지었다.”

 

―『삼국유사』「기이」무왕 조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부여 장의 어머니가 보통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귀족의 딸이었다면『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그 이름이 안 나올 까닭이 없지요. 그냥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던 “과부”라고 한 건 그녀의 어머니가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는 걸 암시합니다. 물론 이 때의 “서울”은 남부여(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오늘날의 부여시)이었을 테고(백제는 서기 538년, 즉 성왕 때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치니까요. 참고로 부여 장은 서기 600년에 즉위합니다), 이로써 그가 태어난 곳이 사비성 남쪽이라는 것은 확실해 졌습니다.

 

용(龍)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임금이나 왕족을 상징하는 동물이었고, 그렇다면 부여 장의 어머니가 용과 관계를 맺었다는 말은, 사비성 남쪽에 있는, 연못이 있는 땅을 소유하고 있던 왕족과 야합(野合)했다는 말로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이 용이 법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울 남쪽’이 아니라 ‘서울 안’에서 관계를 맺었다고 적어야 했을 테니까요. 법왕은 무왕의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양아버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부여 장이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서동이라고 불리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그의 아버지한테 정식으로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래서 늘 어려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덧붙입니다(왕족으로 인정받았다면 마 캐는 일을 하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왕족은 왕족이되, ‘몰락 왕족’이었던 셈이죠.

 

그는 그렇게 살다가 문득 선화공주(이하 ‘선화’로 부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그는 그 때 남자로서 품은 욕심(미인과 혼인하겠다는 생각)과, 처가의 힘을 빌려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일을 하는 남자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풍족하게 살고 있는 여자의 집안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썼죠.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려서 화가 난 선화의 아버지가 선화를 내쫓게 한 것입니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 혹은 선화善化라고도 쓴다 - 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그는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그것을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이렇다.

 

‘선화공주님은 서동방을 남몰래 가려두고 밤에 몸을 … (이하 생략)’

 

노래가 서울에 퍼져서 대궐에까지 들리니 백관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 떠날 때 즈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삼국유사』「기이」<무왕>조

 

누명을 쓰고 갈 곳이 없어진 선화를 본 부여 장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선화 앞에 나타나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선화가 순순히 따라나선 걸 보면 그 때 그녀는 자포자기한 상태였고, 부여 장에게 반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아마 부여 장이 당시 기준으로 잘 생겼거나, 아니면 왕족답게 선화를 교양 있게 대했던 모양이지요. 또는 둘 다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지은 죄도 없는데 귀양지에서 억울하게 붙잡혀 있느니 차라리 자기 뜻대로 갈 곳을 고르겠다는 생각을 해서 부여 장을 따라나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관계를 맺은 뒤 부여 장이 자신의 성과 신분을 밝히자, ‘그렇다면 믿어도 되겠다.’고 판단해서 그의 집으로 같이 간 것이겠지요.

 

“공주가 장차 귀양터에 이르려 하는데, 서동은 도중에서 나와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우연히 믿고 좋아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갔으며 몰래 관계를 맺었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으며, 노래의 영검을 알았다.”

 

―『삼국유사』「기이」<무왕> 조

 

여기서 선화는 부여 장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부자임을 알게 됩니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으로 생계를 도모하려 하니, 서동은 크게 웃으면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공주는 말했다. ‘이것은 황금입니다. 한 평생의 부를 이룰 만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파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놓았어요.’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진귀한 보배이니, 당신이 지금 그 금이 있는 데를 알면 그 보물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궁전으로 나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은 말했다. ‘좋습니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처럼 많이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금을 나를 계책을 물으니 법사는 말했다. ‘빈도가 신통한 도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십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놓으니, 법사는 신통한 도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 주었다.”

 

―『삼국유사』「기이」<무왕> 조

 

저는 이 대목이 후대에 윤색/변형된 것이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담은 것이라고 봅니다. 서동(부여 장)이 금을 많이 쌓아두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 금을 선화에게 보여주고 선화의 부모에게 금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라는 이야기죠. 또 선화가 자신이 직접 금을 집에 가져가지 않고 지명법사에게 금을 궁궐로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까닭은, 아직 오해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집으로 갈 경우 그녀의 아버지가 분노할 가능성이 컸으며, 또한 아버지의 명령대로 귀양지로 가지 않고 멋대로 부여 장의 집으로 간 사실을 알면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 3자이자 명망 있는 스님인 지명법사에게 이 일을 부탁한 것입니다. 권위 있는 종교인이 중개해 주면 아버지의 노여움이 풀리리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선화가 쓴 편지에는 자신의 남편이 된 부여 장이 왕족이라는 사실과, 부여 장이 생각과는 달리 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을 것입니다.

 

지명법사가 신통한 도력으로 금을 보내 주었다는 말은 이 사실이 말로 전해지면서 다소 왜곡된 것이고, 실제로는 소달구지나 수레에 금을 잔뜩 실어서 선화의 부모에게 가져갔을 것입니다(당시 절은 왕이나 왕족/귀족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었고, 따라서 수레를 동원할 만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 기록에는 부여 장이 금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가 선화가 알려준 뒤에야 금을 활용할 마음을 품었다고 적혀 있지만, 금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자기 집에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으므로, 부여 장이 마를 캐려고 땅을 파다가 우연히 금광을 찾아냈으며 이때부터 앞날을 대비해 금을 조금씩 조금씩 집에 모아두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그는 금을 보여주면 선화와 선화의 부모가 마음을 돌리고 자신을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선화 앞에서 금이 뭐냐고 물은 건 선화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연극을 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부여 장의 계산은 맞아떨어져서, 선화의 아버지는 그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사위로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그는 처가의 힘을 등에 업게 되지요. 선화의 아버지가 태도를 바꾼 까닭은 ‘우리 딸이 왕족과 혼인을 했다고? 그것도 알고 보니 재산이 많은 왕족에게? 그렇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 나중에 그 녀석이 왕이 되거나 높은 벼슬을 얻으면 나도 그만큼 이익을 보게 될 테고!’라고 계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여 장을 용서하고 그를 사위로 삼는 것이 딸과 사위를 내치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 되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랬단 말이지요.

 

“진평왕은 그 신비로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기이」<무왕> 조

 

생각해 보세요. 만약 부여 장(서동)이 장인에게 사위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장인이 “서동을 존경해서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처가에서 사위로 인정받은 뒤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처가의 힘을 얻어 남부여(백제)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사람들에게 ‘힘 있는 왕족’임을 인정받아 남부여의 왕이 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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