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저도 기본적으로 김상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392년,396년의 전쟁명분은 391년에 나

  와야 되기때문에 "신묘년"이 언급되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비문은 392년의 18성공략을 몽땅 396년에 집어 넣었고, 영락5년기사 밑에 전쟁명분을 소급해서

  언급했으며, "래도해파"라는 문구를 넣은 당시 "장수왕"정부의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저는 이걸 장수왕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짜낸 "전쟁명분만들기"였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호태왕의 전쟁은 불완전

  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1) 선대왕의 복수 (X)  2) 한강, 금강, 영산강유역의 곡창지대 정복(X) 3)삼한백제의

  현실적인 위협제거(O) 4) 신라,가야 영향력 확대(O)..북방은 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호태왕은 20년동안 전쟁을 벌였는데도 현실적으로  이룬게 없습니다. 그런데 장수왕정부는 지금 당장 전쟁

  을 할 생각이 없고 내치에 신경써야할 처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왕시절  "전쟁"의 결과와 명분을 어떻게

  든 정당화시키고 효과적으로 선전해야할 필요성을 느낀것 같습니다.


  1. "광개토"라는 시호: 전쟁결과를 "광개토"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비문을 보는 백성들도 떨떠름하지만 반박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사실이니까요. "땅을 널리 넓혔다"라고 함으로써 정복전쟁의 불완정한 성과를 물타기

하고 있습니다.(신문 헤드라인..)


2. 방어전쟁이었다 :  묘비가 세워진 해가 414년이므로 당시 고구려 백성들은 다 알고있습니다. 호태왕이 즉위하자

마자 392년부터 전쟁을 벌였다는걸 아이부터 어른까지 알고있을겁니다.  이것은 분명히 선제공격이었습니다. 그러

나 20년간의 전쟁성과가 불완전한 현상황에서 장수왕정부는 어떻게든 방어전쟁으로 보이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트릭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392년의 전쟁을 396년과 하나로 묶었습니다.  이로써 전쟁명분이 생길 여유가 생

깁니다.  그리고 영락5년밑에 이러한 전쟁명분을 소급해서 기록합니다.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우리의 속민이었다. (而) 왜가 신묘년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임나,신라를쳐서 신민으로 삼았
다."


장수왕정부는 한마디로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적국이 먼저 건드렸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었던거죠. 또 현재 삼한배

제가 열도에 있으니 그럴듯해보입니다. 그와 동시에 선제공격및 모든걸 알고있는 백성들의 눈치를 봐서 빠져나갈

구멍도 하나 만들어 놓은것 같습니다.


"백잔과 신라는 우리의 속민인데, 삼한백제가 신묘년(391)년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잔,임나,신라를쳐서 신민으로 삼았다.."-(장수왕정부가 하고 싶었던 "우리는 방어전쟁을 했어"라는 말)

"삼한백제는 신묘년(BC30)에 건국해서 바다를 건너와 백잔,임나,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우리의 속민이었다.(- 동시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빠져나갈 구멍을 만듬)


결국 "신묘년"은 장수왕정부의 정치적의도에 따라 서기 391년과 BC 30년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담겨있고, 이로써

비류백제의 건국이 BC30년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저는 이전에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착상입니다. 왜 하필 신묘년인가에 대해서는 [삼한사의 재조명] 22장에 적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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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고구려의 건국에 대하여 죽 기술하고, 두번째로 광개토왕의 업적에 대하여 기술한 후, 마지막에 수묘인조로 매듭짓고 있습니다. 그 중에 신묘년(영락 1년, 391년)은 업적부분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간지를 써서 영락 몇년 하는 것은 업적부분입니다. 따라서 신묘년이 광개토대왕 즉위 이전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합니다.
>
>비문을 보면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명분이 있습니다. 전쟁을 하면 이기든 지든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같은 부여에서 나온 동족과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명분비이자 위령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문에 광개토왕 이전의 소수림왕이나 고국양왕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영락 몇년 하고만 진행됩니다.
>
>전쟁명분이 신묘년조에 나와야 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는 것은 392년(광개토 1년, 영락 2년)부터입니다. 그리고 392년부터 396년 사이에 공취한 58성을 성을 모두 모아서 영락 6년의 잔국토벌 부분에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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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고구려군의 공격이 392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공격명분은 언제 나와야 합니까? 392년에 공격이 시작하는데 명분이 393년쯤 나온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이지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명분은 반드시 전쟁 전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391년에 왕이 되므로, 그 이전에는 쓸 수 없고, 따라서 391년 뿐입니다. 이 해가 신묘년입니다. 또 주 전쟁 대상이 왜이므로 왜가 명분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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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1년 신묘년해석에서 버벅거리다 이런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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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의 백제건국을 나타내고 있는게 아닐까요?"  391(신묘년)이고  동명8년,BC29년도(신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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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니다. 당시 비류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 온조는 이제 10대초반이었습니다(추측입니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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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는 왕위계승 가능성이 없어서 미리 고구려에서 떠난듯 합니다.  그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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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19년 온조가 합류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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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장수왕시절 고구려인들이 봤을때  삼한백제(왜)는 신묘년(BC29년)에 비류가  세웠고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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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와  마한을 정복한후(파)  백잔,00,신라를 신민(담로)로 삼았다는게 당시 일반적인 상식인었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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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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