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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의 남해순수2

고구려사 조회 수 2279 추천 수 0 2010.03.05 01:01:58
一道安士 *.147.80.208

이제 고구려의 새 집권층이 되어 후한을 방비해야 하는 고씨 고구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동족이 마한으로 건너가 백제라는 강력한 해상국가를 건국하였다. 태조왕의 남해순수 무렵 백제본기와 신라본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를 건국시절부터 백년이상 괴롭히던 말갈의 공격이 108년(태조 56, 기루 32)을 끝으로 갑자기 뚝 그친다.

 

*백제본기 온조왕 2년 봄 정월;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와 연접해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거짓이 많으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백제본기 온조왕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니 왕은 굳센 군대를 거느리고 ...

 

<<말갈의 공격이 백년동안 계속됨>>

 

*백제본기 기루왕 32년(108, 태조 56)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으로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고 돌아갔다. - 말갈의 마지막 공격

 

그리고는 고구려왕이 남해로 떠났다가 3개월만에 돌아온다. 남해는 자신들의 동족인 백제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이 전후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후한으로부터 강한 군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남해순수 전에는 후한에 저자세였는데 3개월 순수 후에는 고자세라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믿는 것이 생겼다는 말인가?

 

*고구려본기 태조왕 59년(111, 기루 35); 사신을 한에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구하였다.

 

*고구려본기 태조왕 62년(114, 기루 38); 가을 8월, 왕이 남해로 순수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고구려본기 태조왕 66년(118, 기루 42); 여름 6월, 왕은 예맥과 더불어 한의 현도를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남해순수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외교정책으로 친 고구려 종족인 예맥이 고구려와 합세하는 것이다. 예맥뿐만이 아니다. 곧이어 후한과 고구려가 대치하고 있던 요서에서 어마어마한 대사건이 벌어진다.

 

*고구려본기 태조왕 69년(121, 기루 45, 지마 10) 겨울 12월, 왕은 마한과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한과 합세하여 싸우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고구려본기 태조왕 70년(122, 기루 46, 지마 11) 겨울 12월, 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왕이 구원군을 보내어 부수었다.

 

요서에 마한군이 출현하고 고구려와 합세하여 후한과 전쟁하는 것이다. 즉, 이 또한 외교관계로서 친고구려계 종족인 마한이 고구려에 합세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말갈이 백제에 대한 공격만 중단하였지 신라에 대한 공격까지 중단한 것은 아니다.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4년(125, 태조 73, 기루 49) 가을 7월, 말갈이 대령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서니 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준다 하니 적이 이를 듣고 물러갔다.

 

말갈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말갈을 군사력으로 물리칠 생각을 하지 않고, 대신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한다. 당시 신라는 기루왕이 동맹을 맺고 자립위왕을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한반도 동남부의 최대 군사강국이었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신라를 구원한다는 말이 들리니 말갈은 그 소식을 듣고 신라에서 물러난다. 그 용맹한 말갈군이 왜 갑자기 물러났을까?

 

신라의 지마이사금은 지금 요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신라인의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에 백제를 이용하여 말갈을 퇴치한 것이다. 백제는 말갈에게 '신라는 우리 동맹이니 공격하지 마시오’라는 뜻을 전달한 것이고, 백제의 의사를 확인한 말갈은 군사를 돌려 철군한 것이다. 요서에서 마한군이 고구려를 돕는 마당에 말갈이 백제의 의사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백제는 마한의 국호였다.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초기 고구려 시절인 1세기 대무신왕 때 대동강유역의 낙랑을 점령하였다고 하고는, 그 이후 후한 광무제때 복건된 낙랑을 이후 더욱 강력해진 고구려가 왜 밀어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느냐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의 낙랑을 뛰어넘어 강력한 말갈군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만일 중간의 대동강유역 낙랑이 강력한 군사적 세력이라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삼국사기의 이 마한출현기사는 결국 대동강유역의 낙랑이 고구려의 영향권이었다는 말 밖에 안 된다. 고구려가 마음만 먹으면 말갈군을 동원하여 언제든지 밀어버릴 수 있었지만, 마치 과거의 홍콩처럼 중국정부에게 경제적 이익이 크고 잘못하면 평화시에 괜히 국제적인 분란만 일으킬 수 있으므로, 그냥 두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다, 삼국사기를 보면, 위나라의 침략이라는 계기가 생기자 대동강유역의 낙랑을 접수한다. 대동강유역의 낙랑사 연구하는 사람은 요서의 마한출현과 이에 따른 백제의 다섯장군 기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나라 침략시 중간에 위군에게 합세한 낙랑군은 요동의 낙랑일 수밖에 없다. 요동의 낙랑은 군사지역이었고 대동강의 낙랑은 경제지역이었다. 미천왕 14년(313)을 끝으로 고구려본기에서 낙랑이 사라지는데, 이 미천왕 14년에 공격한 낙랑군은 요동의 낙랑군일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조를 보면 고구려는 이미 3세기 후반에 황해도지역인 대방에 이르렀고, 북한고고학계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고구려는 4세기 초에 황해도 장수산성 부근에 이미 남평양을 건설하고 있었다. 미천왕 15년의 대방군 공격도 요동반도의 대방군이다. 만일 황해도의 대방이라면 고구려는 자신들이 건설 중인 도시를 공격하였다는 모순에 빠진다.

 

마지막 의문이 남는다. 고구려가 요청한다고 하여 진왕의 마한이 과연 당시 세계 최대국인 후한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는냐는 것이다. 말갈의 공격이 그치는 실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원정군을 파견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더욱이 상대가 세계 최대국인데, 이에 맞서 전쟁을 하려면 실리와 더불어 국민들에게 군사 동원을 호소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함께 동원된 예맥으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맥은 고구려와 비슷한 종족이다. 고구려 태조왕이 마한의 진왕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였기에 백제가 요서에 마한군을 동원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4세기 후반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고구려의 공격을 받던 백제의 최고 국정책임자가 외국에 국서를 보내서 고구려의 배신감을 토로한 글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백제본기 개로왕 18년; 사신을 위에 보내 조회하고 표를 올려 말하기를 ...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기로(源出扶餘) 선대에는 옛정을 돈독히 하였는데...

 

따라서 고구려가 백제(마한)에 제안한 명분은 <원출부여>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상이 삼국사기로부터 추정할 수 있는 태조왕의 남해순수 배경이다. 사건의 시간적 순서가 아주 논리적이다. 삼국본기가 서로 얽혀 있어서 순서가 하나라도 바뀌면 삼국사기 기록이 자체모순이 될 것이다. 

그런데 라디오님은 남당유고를 기반으로 "추정 백제왕 기년"이라 하고서는 기루왕은 137년에서 188년 사이에 재위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기루뢍 기록들이 137-188년 사이로 옮겨가게 되면 한중사서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하 라디오님이 추정한 남당유고에 기반한 초기백제왕력

추정 백제왕 기년. (라디오)
1, 召西奴(소서노) 재위 13년 BC18년- BC6년
2, 溫祚王(온조왕) 재위 33년 BC6년- AD28년
3, 多婁王(다루왕) 재위 15년    28년-  42년   馬婁
4, A왕                 재위 47년    42년-  88년   
5, B왕                 재위 33년    88년-  120년  
6, C왕                 재위 18년   120년 - 137년
7,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137년- 188년  已婁
8, 蓋婁王(개루왕)  재위   1년  188년
9, 仇知王(구지왕)  재위 39년  188년 - 226년    
10,肖古王(초고왕)  재위 29년  226년 - 254년     簡位居      牛加= 고시?
11,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麻余
12,沙泮王(사반왕)                 264년                 
13,古爾王(고이왕)  재위 23년  264년 - 286년     依慮 (의려)가 자살.  (모용외)의 침입.

-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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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도 삼국사기를 다 보았을텐데 그가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추수기에 창궐하는 메뚜기떼를 구제하려 왕이 남쪽 바다에 3개월이나 갔었다는 것이다. 남당유고가 한중기록은 물론 고고학적으로도 모순이 된다는 것을 하나하나 짚어가기로 말하면 끝이 없다. (단, 화랑세기에서는 아직 이것이 틀렸다고 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남당의 생각도 당시 선지적 연구자로서의 연구결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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