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은 501년에 40세로 백제왕이 되고, 23년을 재위하다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런데 그의 능에서 발견된 왕비는 이빨을 분석한 결과 30대의 젊은 여인이었다(자세히 말하면 능에서 사람의 어금니가 한개 나왔는데 30대 여자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어금니는 합장한 왕비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무령왕릉을 쓴 사람은 그의 아들인 성왕인데 무령왕릉에 묻힌 왕비는 그와 거의 동년배다. 따라서 학계는 이 여인을 통상 무령왕의 둘째 부인으로 본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왜 큰 부인이 아니고 둘째 부인이 왕 옆에 묻히느냐이다. 아들인 성왕 입장에서도 자신을 낳은 생모를 합장해야지 대신에 젊은 둘째 부인을 합장하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상식에 어긋난다. 나는 이 문제를 설명한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신라의 왕통을 비롯한 지배층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골품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골품제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완성이다. 신라 멸망의 한 원인으로 골품제의 한계를 들 정도로 고려의 건국정신은 골품제를 부정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사 이해의 기본이 골품제라면 백제사 이해의 기본은 진왕제이다. 나는 백제 진왕제는 삼한백제 정부가 왜국으로 이동하면서 5세기 이후 한반도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백년을 이어온 제도가 하루아침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신라의 골품제는 신라말의 혼란과 후삼국의 쟁패과정을 통하여 서서히 사라졌지만, 백제의 진왕제는 진왕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단숨에 몰락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5세기 왜5왕 시대의 왜국(진왕백제)은 한반도에서 가져온 진왕제를 아직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국과 지속적으로 교섭하던 한반도의 백제가 곧바로 진왕제를 버리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내가 5세기 이후 백제에서 진왕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부 왕에게는 적용되었을지 모른다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6세기의 22담로

진왕제란 담로제가 발전하여 왕실의 왕위계승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즉 담로제가 진왕제 실시의 바탕이다. 그런데 6세기 초에 백제에는 아직도 담로가 다 철폐되지 않고 22개나 남아있었다.

(2) 무령왕과 혜왕의 第二子

중국사서에 나오는 22담로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기록이 第二子이다. 제2자란 왕통이 담로관계에 의하여 계승된 경우를 말하기 때문이다(자세한 설명은 지난 글에서). 담로관계에 의하여 왕통이 계승될 때는 실제 관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第二子가 되는데 무령왕은 동성왕의 제2자로, 혜왕은 성왕의 제2자로 기록되고 있다.

백제본기 최초의 제2자는 고이왕이다. 삼국사기는 고이왕을 개루왕의 第二子라 하고 있는데 이는 두 왕이 어떤 여인을 매개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진사왕 역시 근구수왕의 두 번째 아들이나 삼국사기는 仲子라 하여 제2자와 구별하였다. 仲子에는 次子라는 의미가 있다.

(3) 서동요의 존재

서동요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는 무력한 백제왕자가 구 시대의 풍습인 진왕제에 의해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왕이 되어 보기 위한 몸부림이다. 즉, 7세기까지도 백제에서 진왕제가 유효하였다는 뜻이다.

(4) 동성왕의 신라여인과의 결혼

동성왕은 재위 15년째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하는데 이는 담로제의 유풍이다. 즉 본래 의미는 신라가 백제의 담로국이 된다는 뜻이다.
  
(5) 무령왕릉의 젊은 왕비

고려태조는 20여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자신이 무명시절에 맞이한 평민의 딸이지만 둘째부터는 대 호족의 딸들이다. 첫 번째 부인은 자식도 낳지 못하고 세력가들의 등쌀에 못 이겨 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오늘날 북한에 있는 고려 태조 능에서 태조 옆에 누워있는 여인은 그 첫 번째 부인이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고분 중 스스로의 증표에 의해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능이며 그는 생몰연대가 분명한 사람이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개로왕이나 어머니가 곤지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법적인 아버지는 곤지다. 즉 곤지가 웅략천황(왜왕 무)으로 왜국에 가던 해이므로 461년생이다. 당시 자립위왕 하지 못하고 있던 왜국의 시변압반황자(왜왕제자 흥)는 곤지에게 죽고 진왕(천황)의 시호와 대수도 받지 못한 채 그 재위기간도 웅략의 재위기간에 포함된다. 하지만 무령왕은 선왕인 동성왕과 담로관계로 맺어진 자신의 어머니로 연결되므로, 백제본기로는 동성왕의 제2자가 된다.

무령왕의 어머니 이름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초향번준희>다.  동성왕에게는, 비록 자신의 생모인 <한원>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초향번준희>가 황후이므로 큰어머니이자 법적 어머니가 된다. 동성왕은 생모가 갈성씨로 멀리 인덕천황과 친척이다.

근구수왕을 생각해보자. 근초고왕은 근구수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재위 21년 째에 신라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한 후에 백제왕을 칭했다. 근초고왕이 죽은 후 근구수왕 입장에서 왕비를 선왕능에 합장해야 한다면 누구를 합장해야 하나? 자신을 낳은 생모인가? 아니면 아버지를 자립위왕 하게 만든 왕후인가? 근구수왕의 법적인 어머니는 생모가 아니라 왕후다. 진왕제하에서는 왕후와 태자의 어머니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란 특징이 있다.

따라서 나는 성왕이 자신의 생물학적 어머니인 생모 대신에 법적 어머니(아버지를 자립위왕 하게 만든)인 왕후를 합장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만일 과거로 돌아가 무령왕릉에 묻힌 여인에게 당신이 누구이냐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나는 백제의 왕후요" 하고 답변할 것이다. 또 능을 쓴 성왕에게 이 당신과 동년배인 여인이 누구요 하고 물어본다면 그 역시 "나의 (법적인) 어머니요"하고 답변할 것이다. 왕릉의 지석도 그녀를 百濟國王大妃라 칭하고 있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

이는 왜국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되어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동생인 청령천황이 훗날 곤지의 능에 왕비를 합장해야 한다면, 자신의 생모인 <한원>이 아니라 법적 어머니인 즉, 곤지의 왕후이자 무령왕의 생모인 <초향번준희>를 합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왕제가 이리도 복잡하니 당시 왜국에서도 백성들이 그들 사이의 관계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고 머리를 흔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