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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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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2007.08
3. 개루왕의 자립위왕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209 2007.08.30 08:59:23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542 Views 2 Voted / 0 Devoted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2세기 중반 개루왕조는 모든 왕력 중에서 가장 기록 공백이 큰 부분이다. 39년 재위기간 중에 단 2년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모두 기록의 공백이다.
*개루왕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다.
*개루왕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마지막 기록>
...
(공백)
...
*개루왕 38년; 겨울, 10월 신라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우리에게 도망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돌려보내라고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신라왕이 화가 나서 군사를 동원하여 쳤으나 모든 성이 나가지 않고 성벽을 굳게 하고 지키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개루왕 39년; 왕이 죽었다.
개루왕조는 개루왕 5년이 실질적으로 마지막 기록으로 그 해에 왕이 죽었다. 그리고 공백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후반 34년을 통치한 왕은 자립위왕 하지 못하여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하고, 앞에 5년 재위한 왕의 재위기간에 합해져버린 것이다.
5년을 재위한 개루왕은 자립위왕 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삼국사기로부터 그가 세운 왕후가 신라출신이냐 아니냐만 알 수있다. 신라와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부터 그의 왕후는 신라 출신이 아니라 백제의 다른 소국 출신 구체적으로 마한의 강력한 소국출신이었다고 판단한다.
반면에 후반부 34년을 통치하였으나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은 자립위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넫 이와 관련하여 퇴의 전년도에 아주 중요한 기사가 있다. 신라 아찬 길선이 망명해온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개루왕 후반기를 다스린 왕이 길선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려고 하였으나 길선의 신분이 너무 낮아 자립위왕이 안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만일 길선이 반란에 성공하여 신라의 정권을 장악하였으면 백제본기는 개루왕조 다음에 또 한 명의 왕력을 설정하였을 것이다.
길선이 백제로 달아나자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한강유역 공격에 나선다. 삼국사기에 군사규모가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 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이전에 백제는 단 수천명으로 신라를 공격한다. 반면에 신라는 수만명 규모로 백제를 공격한다. 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당시 백제란 나라가 수십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그 중에 한강유역의 단 한나라 기록만 남긴 것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가 쉽다.
신라는 한성백제 뿐만 아니라 여러 마한소국들을 깨야 하므로 공격에는 수만대군이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한성백제는 자신들이 수천명을 동원했을 때 백제의 다른 마한 소국들도 동시에 동원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신라가 방어해야 했던 한 백제의 군사규모는 수만명이 되는 것이다. 3세기 이전 신라본기 초기기록을 보면 백제와 다르게 전국적인 비상상황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는 아주 합당한 기록이다.
1-2세기 3루왕 시대를 통하여 한성백제는 백제왕을 칭하고 진왕제를 하려 하였으나, 적어도 2명의 왕이 자립위왕에 실패했다. 더구나 개루왕 후반을 통치한 왕은 무려 34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하자 아예 진왕제가 사라지고 초고왕 이후에는 마한의 1개 소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왕이란 금강유역의 진왕을 뜻한다. 5세기 중국 사서가 백제가 과거 韓 중에서도 마한의 1국이었다고 한 것은 2세기 초고왕 이후를 말한 것이다.
백제에 대하여 대륙의 요서와 양자강 유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동아시에 전역에 담로를 둔 강대한 해양국가였다는 주장과, 4세기까지는 단지 한강변 일부만을 통치하였던 마한의 1개 소국에 불과하였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둘 다 맞는 것이다.
신라 아찬 길선의 망명은 개루왕 후반기를 통치하였던 왕이 더 이상 자립위왕 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 백성들로부터도 더 이상 자립위왕의 희망이 없는 왕이란 평가를 받게 되어 그 충격으로 퇴위하였을 것이다.
한성백제가 초고왕 이후에는 새로운 시대를 맞는데 금강유역의 백제왕이 명령하면 비록 싫어도 신라 공격에 군사를 동원해야 하는 국가가 된다. 말갈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무리한 신라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곤 하는데 이는 백제왕의 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다. 아마 백제의 다른 소국들도 이와 비슷하엿을 것이다.
하지만 3세기 이후 백제진왕은 명목상의 지위를 가진 통치자가 되고, 진왕의 왕후를 집어넣은 마한왕과 진한왕이 백제의 실세가 되어 국가를 통치한다. 외교권도 진왕이 아니고 이들이 행사한다. 마치 오늘날 일본에 외국 사신이 가면 천황이 아니라 아베총리가 접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루왕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다.
*개루왕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마지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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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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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루왕 38년; 겨울, 10월 신라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우리에게 도망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돌려보내라고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신라왕이 화가 나서 군사를 동원하여 쳤으나 모든 성이 나가지 않고 성벽을 굳게 하고 지키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개루왕 39년; 왕이 죽었다.
개루왕조는 개루왕 5년이 실질적으로 마지막 기록으로 그 해에 왕이 죽었다. 그리고 공백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후반 34년을 통치한 왕은 자립위왕 하지 못하여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하고, 앞에 5년 재위한 왕의 재위기간에 합해져버린 것이다.
5년을 재위한 개루왕은 자립위왕 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삼국사기로부터 그가 세운 왕후가 신라출신이냐 아니냐만 알 수있다. 신라와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부터 그의 왕후는 신라 출신이 아니라 백제의 다른 소국 출신 구체적으로 마한의 강력한 소국출신이었다고 판단한다.
반면에 후반부 34년을 통치하였으나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은 자립위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넫 이와 관련하여 퇴의 전년도에 아주 중요한 기사가 있다. 신라 아찬 길선이 망명해온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개루왕 후반기를 다스린 왕이 길선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려고 하였으나 길선의 신분이 너무 낮아 자립위왕이 안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만일 길선이 반란에 성공하여 신라의 정권을 장악하였으면 백제본기는 개루왕조 다음에 또 한 명의 왕력을 설정하였을 것이다.
길선이 백제로 달아나자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한강유역 공격에 나선다. 삼국사기에 군사규모가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 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이전에 백제는 단 수천명으로 신라를 공격한다. 반면에 신라는 수만명 규모로 백제를 공격한다. 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당시 백제란 나라가 수십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그 중에 한강유역의 단 한나라 기록만 남긴 것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가 쉽다.
신라는 한성백제 뿐만 아니라 여러 마한소국들을 깨야 하므로 공격에는 수만대군이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한성백제는 자신들이 수천명을 동원했을 때 백제의 다른 마한 소국들도 동시에 동원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신라가 방어해야 했던 한 백제의 군사규모는 수만명이 되는 것이다. 3세기 이전 신라본기 초기기록을 보면 백제와 다르게 전국적인 비상상황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는 아주 합당한 기록이다.
1-2세기 3루왕 시대를 통하여 한성백제는 백제왕을 칭하고 진왕제를 하려 하였으나, 적어도 2명의 왕이 자립위왕에 실패했다. 더구나 개루왕 후반을 통치한 왕은 무려 34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하자 아예 진왕제가 사라지고 초고왕 이후에는 마한의 1개 소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왕이란 금강유역의 진왕을 뜻한다. 5세기 중국 사서가 백제가 과거 韓 중에서도 마한의 1국이었다고 한 것은 2세기 초고왕 이후를 말한 것이다.
백제에 대하여 대륙의 요서와 양자강 유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동아시에 전역에 담로를 둔 강대한 해양국가였다는 주장과, 4세기까지는 단지 한강변 일부만을 통치하였던 마한의 1개 소국에 불과하였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둘 다 맞는 것이다.
신라 아찬 길선의 망명은 개루왕 후반기를 통치하였던 왕이 더 이상 자립위왕 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 백성들로부터도 더 이상 자립위왕의 희망이 없는 왕이란 평가를 받게 되어 그 충격으로 퇴위하였을 것이다.
한성백제가 초고왕 이후에는 새로운 시대를 맞는데 금강유역의 백제왕이 명령하면 비록 싫어도 신라 공격에 군사를 동원해야 하는 국가가 된다. 말갈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무리한 신라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곤 하는데 이는 백제왕의 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다. 아마 백제의 다른 소국들도 이와 비슷하엿을 것이다.
하지만 3세기 이후 백제진왕은 명목상의 지위를 가진 통치자가 되고, 진왕의 왕후를 집어넣은 마한왕과 진한왕이 백제의 실세가 되어 국가를 통치한다. 외교권도 진왕이 아니고 이들이 행사한다. 마치 오늘날 일본에 외국 사신이 가면 천황이 아니라 아베총리가 접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