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14세기에 일본에서 그려진 민화 한 점이 미국의 박물관에서 전시중인데 이를 두고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본서기 중애 말년 조를 보면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신라왕 파사매금의 아들인 미사흔 왕자를 인질로 잡아온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이다. 내가 그림을 보니 그림이 틀렸다. 특히 병사들 복장이 신공황후조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던 14세기 갑옷에 가깝다. 최소한 인덕능에서 나온 5세기 갑옷과 비교해도 전혀 아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기록은 5세기 초의 응신의 황후 기록과 2-3세기 왜 여왕 비미호의 기록을 합한 것이다. 특히 칠지도가 나오는 신공 후반부는 모두 비미호의 기록으로 칠지도를 준 사람은 227년 3월과 230년 9월 사이에 새로 진왕이 되었으나 아직 자립위왕 하지 못하여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하고 있던 백제 진왕이고, 칠지도를 받은 사람은 가야정벌에 군사를 동원하는 공을 세워 권력을 인정받은 왜 여왕 비미호이다.

중애 9년조에 실린 이 신라정벌 기록은 본래 응신 16년(401)에 있던 기록의 일부를 떼어다 설화적 형태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미 자세한 이야기를 오래전에 하였지만 잠시 다시 요약해보자.

342년 겨울에 벌어진 일이다.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장악한 전연은 남쪽을 통일하기 전에 우선 배후인 고구려를 친다. 이때 서몽골을 포함한 북쪽의 유목민족을 대규모로 동원하는데, 북쪽으로 보낸 구 흉노계 선비족 군단과 그 가족이 전쟁이후 퇴로가 차단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신라 땅에 내려와 신라를 가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 이가 내물이사금이다. 내물이사금은 당시 <서역에서 온 신라왕>이란 뜻으로 ‘파사매금’으로 불렸다.

신라왕들에게 준 시호명은 전반기는 법흥왕 때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경주지역을 정복하고 이 지역에 최초로 도읍한 정복자에게 파사이사금이란 시호를 준 것이나,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구하던 왕에게 불교식인 지마이사금을 준 것, 또 대군을 이끌고 가서 한강유역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왕에게 로마를 위협하던 훈족왕의 이름을 따 아달라이사금을 준 것 들이 대부분 6세기에 국사를 편찬하며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백제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두고 충돌하여 전쟁이 계속된다. 세 왕조가 들어선 지 얼마 안되는 신라는 아직 국력이 약하여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게 된다. 전쟁이 초반에는 백제의 우세 속에 진행되다 광개토왕이 즉위하며 상황이 역전된다. 특히 백제 내부에서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과 실질적으로 군사력을 가지고 고구려를 방어하던 한강유역의 한성백제왕이 백제의 주도권을 놓고 충돌하게 된다. 특히 한성백제의 진사왕은 과거 근초고왕이 백제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방어하며 백제왕을 칭했듯이 고구려를 방어하던 자신도 백제왕을 칭하고 싶었다. 그런데 진사왕이 고구려방어는 등한시한채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하자 한성백제에 정변이 일어나 진사왕이 퇴위하고 아신왕이 즉위한다.

이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396년에 백제를 대규모로 공격하고 그 결과 금강유역의 진왕백제를 토벌한다. 진왕백제는 3세기에 가야를 정벌하고 왜국에 칠지도를 보낸 나라다. 백제가 전란에 휩싸이자 수십만명을 넘는 대규모의 백제 피난민이 낙동강유역으로 몰려들고 그 결과 신라가 혼란에 빠진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399년에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고,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다음해에 보기 5만 대군을 낙동강유역에 파견한다.

왜국으로 달아난 백제 진왕은 396년 9월에 구주에 도착하여 동쪽으로 왜국을 정복한 후, 397년 1월에 기내지역에 새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5세기 중국 남조사서에 나오는 왜 5왕의 왜국이다. 일본서기는 이 백제 진왕에게 응신천황이라는 시호를 주었는데, 396년 10월에서 397년 1월까지의 4개월간의 동정기록만 떼어서 신무천황조로 분리하였다.

낙동강유역에 갇힌 백제 피난민들이 바다를 건너와야 하나, 신라가 협조하지 않자 피난민들의 도해가 어렵게 되었다. 401년에 신라 지역에 갇혀있는 피난민들의 무사도해를 위하여 신라왕(내물왕)을 윽박지르고 그 보장으로 왕자를 인질로 데려가니 이것이 미사흔이다. 당시 낙동강유역에 몰려있던 피난민들의 지도자가 훗날 왜왕이 되니 5세기 송서에 나오는 왜왕 찬(인덕천황)과 왜왕 진(반정천황)이다. 결국 일본은 칠지도의 왜의 후예가 아니라 칠지도의 백제의 후예다.

이 민화를 제대로 그리려면 당시 신라왕과 신라군은 로마/페르아식군의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왜군은 백제/가야군의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당시는 일본사가 아직 한국사에서 분리되기 전으로, 그림에 꿇어 앉아 있는 신라왕이나 이를 위협하는 왜군이나 모두 우리 조상들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이 아니라 둘 다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