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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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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
2007.08
2. 기루왕의 자립위왕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203 2007.08.28 14:13:32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535 Views 2 Voted / 0 Devoted
백제 기루왕조는 그 유명한 다섯 장군의 기록이 나오는 부분으로 자치통감에 이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 왜 신라는 백제에 구원을 요청했을까? 신라는 틀림없이 백제가 도울 것이고 그러면 말갈이 물러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무려 52년에 이르는 기루왕조는 그 중간의 21년 조를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뉜다.
*기루왕 21년; 여름 4월, 二龍見漢江 (두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이 기록을 기준으로 백제가 크게 바뀌는 것이 대 신라 기록이다. 앞은 전쟁이고 뒤는 친선이다. 두 용의 출현은 왕자들 사이의 싸움을 뜻한다.
앞의 백제 다루왕은 강력한 마한소국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다. 그리고 기루왕이 즉위하였으나 그는 무려 21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마한지역이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에게 다 넘어감에 따라 왕실간 혼인을 맺을만한 강력한 소국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면 대외적으로는 왕이 아니고 왕세자가 된다.
장기간 기루왕이 자립위왕 하지 못하자 어느 왕자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립위왕에 성공하여 백제왕의 칭호와 함께 다루왕 다음의 왕으로서 대수를 받았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자립위왕 하지 못한 기루왕은 21년의 재위기간이 뒤의 자립위왕 한 백제왕의 재위기간에 흡수되어 버리고 대수도 받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2명의 왕이 한성백제를 통치하였으나 뒤의 자립위왕 한 1명만 백제본기에 기루왕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이 진왕제 하의 왕력 기본 서술방식이다.
그러면 뒤의 자립위왕 한 백제왕은 어느 나라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을까? 삼한사가 삭제된 삼국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성백제와 혼인한 소국이 신라냐 아니냐 뿐이다.
용이 출현한 8년 후인 기루왕 29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기록이 백제와 신라의 최초의 친선 기록이다.
*기루왕 29년(105, 파사 26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시 8년이 지난 기루왕 37년에 신라에 친선사신을 보낸다.
*기루왕 37년(113, 지마 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기루왕 29년은 경기/강원 지역에서 충청지역으로 남하하던 신라가 경주에 도읍하여 한성백제와 더 이상 국경을 맞대지 않게 된 이후이다. 따라서 이는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신라는 당시 가야라는 적과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기루왕 37년의 친선은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신라 왕들 중에 최초로 백제와 혼인을 맺은 사람은 2세기 초 지마이사금이다.
*기루왕 49년(125, 지마 14년); 신라가 말갈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구원을 요청하므로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결국 말갈이 공격해오자 신라 지마이사금이 백제에 구원을 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백제 진왕 휘하의 마한군이 현재 요서에서 고구려군과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는 말갈이 백제와 충돌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고, 신라는 이런 모든 상황을 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루왕 21년; 여름 4월, 二龍見漢江 (두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이 기록을 기준으로 백제가 크게 바뀌는 것이 대 신라 기록이다. 앞은 전쟁이고 뒤는 친선이다. 두 용의 출현은 왕자들 사이의 싸움을 뜻한다.
앞의 백제 다루왕은 강력한 마한소국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다. 그리고 기루왕이 즉위하였으나 그는 무려 21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마한지역이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에게 다 넘어감에 따라 왕실간 혼인을 맺을만한 강력한 소국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면 대외적으로는 왕이 아니고 왕세자가 된다.
장기간 기루왕이 자립위왕 하지 못하자 어느 왕자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립위왕에 성공하여 백제왕의 칭호와 함께 다루왕 다음의 왕으로서 대수를 받았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자립위왕 하지 못한 기루왕은 21년의 재위기간이 뒤의 자립위왕 한 백제왕의 재위기간에 흡수되어 버리고 대수도 받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2명의 왕이 한성백제를 통치하였으나 뒤의 자립위왕 한 1명만 백제본기에 기루왕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이 진왕제 하의 왕력 기본 서술방식이다.
그러면 뒤의 자립위왕 한 백제왕은 어느 나라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을까? 삼한사가 삭제된 삼국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성백제와 혼인한 소국이 신라냐 아니냐 뿐이다.
용이 출현한 8년 후인 기루왕 29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기록이 백제와 신라의 최초의 친선 기록이다.
*기루왕 29년(105, 파사 26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시 8년이 지난 기루왕 37년에 신라에 친선사신을 보낸다.
*기루왕 37년(113, 지마 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기루왕 29년은 경기/강원 지역에서 충청지역으로 남하하던 신라가 경주에 도읍하여 한성백제와 더 이상 국경을 맞대지 않게 된 이후이다. 따라서 이는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신라는 당시 가야라는 적과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기루왕 37년의 친선은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신라 왕들 중에 최초로 백제와 혼인을 맺은 사람은 2세기 초 지마이사금이다.
*기루왕 49년(125, 지마 14년); 신라가 말갈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구원을 요청하므로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결국 말갈이 공격해오자 신라 지마이사금이 백제에 구원을 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백제 진왕 휘하의 마한군이 현재 요서에서 고구려군과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는 말갈이 백제와 충돌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고, 신라는 이런 모든 상황을 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