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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03
2007.08
2007.08
백제 3루왕 시대의 기본문제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199 2007.08.03 15:59:03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610 Views 15 Voted / 0 Devoted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전체적으로 왕의 재위기간이 정상이나 1-2세기 3루왕 시대만 다음처럼 평균 46년으로 비정상적으로 길다.
다루왕: 28-77, 50년 재위
기루왕: 77-128, 52년 재위
개루왕: 128-166, 39년 재위
생물학적으로 판단하면 재위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부자관계라 할지라도 138년 동안을 연속적으로 재위하려면 5-6명 내외의 통치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단 3명으로 138년을 채우고 있어서 과학적인 사고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현대인에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백제사 이해의 마지막 관문이기도 하다.
나는 삼한사의 재조명에서 이 시기에 전기루왕과 후개루왕을 더하여 최소한 2명의 통치자가 더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3명만 백제왕으로 기록되었느냐는 설명하지 못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조한 원사료에도 백제왕은 3명뿐이었을 것이다.
3루왕 시대 신빙성의 1차적인 증명은 대외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 3루왕 시대의 외치는 주로 말갈과 접촉하는 시대다. 그런데 그에 해당하는 기록이 자치통감에도 나온다. 그 유명한 다섯장군의 기록이다. 3루왕 시대의 말갈기록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다루왕 3년(대무신 13);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말갈과 더불어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다루왕 4년(대무신 14);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루왕 7년(대무신 17);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말갈이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대무신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다루왕 28년(태조 3);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노하였다.
다루왕 29년(태조 4);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비하게 하였다.
기루왕 32년(태조 56);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여 가지고 돌아갔다.<말갈의 마지막 공격>
===============================================================
*태조 62년; 가을 8월에 왕이 남해로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태조 69년; 왕이 馬韓과 예맥의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에워쌌더니 부여왕이 자기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漢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항거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태조 70년; 왕이 馬韓,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였더니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와 漢나라를 구원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
기루왕 49년(태조 73); 신라가 말갈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다섯 장수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지마이사금 14년); 가을 7월 ...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준다고 하니 말갈이 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
이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압력은 대무신왕때 가장 치열하였다. 대무신왕때 낙랑을 멸망시키며 동시에 한반도 중부에 대한 압력이 가해진 것이다. 반면에 민중왕과 모본왕 시기에는 이전과 같은 백제에 대한 압력은 없었다.
태조왕이 즉위한 후 말갈을 시켜 백제를 공격하다 후한과 대립이 격해지자 백제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킨다. 그리고 왕이 수도를 3개월이나 비우고 남해를 순행한다. 이후 마한 군대가 요서에 출현하여 고구려와 합세한다. 태조왕은 이전에 비류와 온조를 고구려에세 쫓아낸 그룹이 아니다. 즉, 백제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
말갈이 백제에 대한 공격은 멈추었으나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지마이사금은 말갈을 막으려 하지 않고 대신 백제에 구원을 요청한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신라를 돕는다는 소문이 돌자 백제의 의사를 확인한 말갈은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는 (3세기 초 이전까지는) 백제나 신라를 공격하지 않는다. 지마이사금은 당시 요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섯장군에 해당하는 기록이 다음처럼 자치통감에 독립적으로 나옴으로써 양 사서가 일치하는 것이다.
*자치통감: 孝安皇帝 建光 元年 十二月,高句驪王宮 率 馬韓ㆍ濊貊 數千騎 圍玄菟,夫餘王 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 與州郡並力討破之. 是歲 宮死 子遂成立.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이 자치통감의 기록이 당시 한반도 북부를 누가 통치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요서의 마한군 출현 기록은 당시 한반도 북부를 낙랑이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낙랑을 넘어 말갈군을 자유롭게 움직이던 고구려가 통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문제로 돌아간다. 왜 3루왕 시대에 3명만 왕으로 기록되었는가? 그 해답은 백제왕에 있다. 신라본기는 다루왕을 백제왕이라 부르고 있다. 3루왕 시대 이후 삼국사기 백제왕 중에 백제왕이라 불리는 것은 4세기 후반의 근초고왕이다.
삼한의 진왕은 227년에 가야 7국을 평정하고 230년에 왜국에 칠지도를 보내 비미호를 왜왕으로 책봉한다. 그런데 진왕이 보낸 칼에 백제왕세자를 칭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227년에 가야7국을 평정할 때는 백제왕도 있었다. 이 말은 227년과 230년 사이에 백제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이 되었으나 아들이 아직 자립위왕을 하지 못한 상태라는 뜻이다. 백제왕은 본래 진왕급 지도자의 호칭이었고 백제는 삼한의 국명이었다. 3루왕 시대에 한성백제는 진왕제를 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최소한 5명의 통치자가 있었으나 3명만이 자립위왕을 하여 그들만 왕의 대수와 시호를 받고 삼국사기에 왕으로 기록된 것이다.
3루왕의 마지막인 개루왕 뒷부분을 통치하였던 후개루왕은 무려 35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한 채 퇴위하였다. 따라서 한성백제는 진왕제가 붕괴해버리고, 이후 진왕의 삼한 중 마한에 들어가 마한소국의 하나로 위치가 바뀌었다. 결론적으로 초고왕 이후에는 진왕제를 실시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진왕제를 실시하는 것이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다. 그런데 4말5초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금강유역의 진왕국가가 왜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진왕제가 백제에서 사라진 것이다.
진왕제는 담로제가 진화하여 왕실의 왕위계승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진왕은 강력한 소국출신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는데, 삼한사를 삭제하며 삼국사기에서 모두 사라져, 백제본기에서는 신라 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 일부 기록만 남게 되었다.
고대국가에서 왕족과 왕비족은 왕권을 받치는 2대 기둥이다. 따라서 왕비기록이 빠질 수 없다. 신라는 대부분의 기간이 삼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비기록이 거의 살아남았다. 신라본기에서 왕비기록이 나올 수 없는 곳은 신라가 진한에 들어가 한의 다른 소국과 혼인한 경우이다. 이러면 삼한사 삭제할 때 왕비기록이 함께 빠지게 된다.
신라가 망하고 진한에 들어간 것이 3-4세기 기림이사금과 흘해이사금의 시대이므로, 이 두 명은 원칙적으로 왕비기록이 없어야 한다. 신라본기를 열어보면 유례-기림-흘해 3왕이 왕비기록이 없어서 우리의 예측과 일치한다. 유례까지 왕비기록이 없는 것으로부터 미추이사금 사후 신라는 절반정도 진한에 들어가 있었고, 유례이사금의 왕비는 신라인이 아니라 다른 삼한 소국의 여인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본기에서 삼한사가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나오는 것은 왜가 나오는 4말5초 약 30년이다. 즉 응신과 인덕의 시기다. 따라서 백제본기는 이 시기에 한해서는 왕비 기록이 나와야 한다. 당시는 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의 시대인데, 아신왕은 이미 결혼을 하였고, 구이신왕은 너무 어려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전지왕의 왕비기록만 백제본기에 나올 수 있다. 백제본기를 열어보면 전지왕의 왕비가 ‘팔수부인’이라고 해서 역시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침류왕의 어머니가 ‘아이부인’이라는 구절은 왕비가 아니라 어머니여서 다행히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고, 책계왕의 부인이 대방공주 보과라는 구절은 대방과의 접촉 때문에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경우다. 그리고 근초고왕 2년조에 나오는 왕후는 백제본기 유일의 왕후인데, 신라본기에 이하면 근초고왕의 부인이 아니라 당시 ‘여구’로 추정되는 백제 진왕의 부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담로제가 어디에 나오느냐를 따지면 전체에 나온다. 우선 온조왕조에 왕비의 기록이 없으므로 나오는 것이다. 다루왕조에도 왕비의 기록이 없으므로 역시 담로제가 나오는 것이다. 기루왕조에도, 다루왕조에도, 초고왕조에도, 구수왕조에도,... 왕비기록이 없는 백제본기 기록은 모두 담로제의 흔적이다.
다루왕: 28-77, 50년 재위
기루왕: 77-128, 52년 재위
개루왕: 128-166, 39년 재위
생물학적으로 판단하면 재위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부자관계라 할지라도 138년 동안을 연속적으로 재위하려면 5-6명 내외의 통치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단 3명으로 138년을 채우고 있어서 과학적인 사고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현대인에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백제사 이해의 마지막 관문이기도 하다.
나는 삼한사의 재조명에서 이 시기에 전기루왕과 후개루왕을 더하여 최소한 2명의 통치자가 더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3명만 백제왕으로 기록되었느냐는 설명하지 못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조한 원사료에도 백제왕은 3명뿐이었을 것이다.
3루왕 시대 신빙성의 1차적인 증명은 대외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 3루왕 시대의 외치는 주로 말갈과 접촉하는 시대다. 그런데 그에 해당하는 기록이 자치통감에도 나온다. 그 유명한 다섯장군의 기록이다. 3루왕 시대의 말갈기록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다루왕 3년(대무신 13);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말갈과 더불어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다.
다루왕 4년(대무신 14);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루왕 7년(대무신 17);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말갈이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대무신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다루왕 28년(태조 3);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노하였다.
다루왕 29년(태조 4);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비하게 하였다.
기루왕 32년(태조 56);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여 가지고 돌아갔다.<말갈의 마지막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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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62년; 가을 8월에 왕이 남해로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태조 69년; 왕이 馬韓과 예맥의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에워쌌더니 부여왕이 자기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漢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항거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태조 70년; 왕이 馬韓,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였더니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와 漢나라를 구원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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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왕 49년(태조 73); 신라가 말갈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다섯 장수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지마이사금 14년); 가을 7월 ...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도와준다고 하니 말갈이 이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
이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압력은 대무신왕때 가장 치열하였다. 대무신왕때 낙랑을 멸망시키며 동시에 한반도 중부에 대한 압력이 가해진 것이다. 반면에 민중왕과 모본왕 시기에는 이전과 같은 백제에 대한 압력은 없었다.
태조왕이 즉위한 후 말갈을 시켜 백제를 공격하다 후한과 대립이 격해지자 백제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킨다. 그리고 왕이 수도를 3개월이나 비우고 남해를 순행한다. 이후 마한 군대가 요서에 출현하여 고구려와 합세한다. 태조왕은 이전에 비류와 온조를 고구려에세 쫓아낸 그룹이 아니다. 즉, 백제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
말갈이 백제에 대한 공격은 멈추었으나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지마이사금은 말갈을 막으려 하지 않고 대신 백제에 구원을 요청한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신라를 돕는다는 소문이 돌자 백제의 의사를 확인한 말갈은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는 (3세기 초 이전까지는) 백제나 신라를 공격하지 않는다. 지마이사금은 당시 요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섯장군에 해당하는 기록이 다음처럼 자치통감에 독립적으로 나옴으로써 양 사서가 일치하는 것이다.
*자치통감: 孝安皇帝 建光 元年 十二月,高句驪王宮 率 馬韓ㆍ濊貊 數千騎 圍玄菟,夫餘王 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 與州郡並力討破之. 是歲 宮死 子遂成立.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이 자치통감의 기록이 당시 한반도 북부를 누가 통치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요서의 마한군 출현 기록은 당시 한반도 북부를 낙랑이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낙랑을 넘어 말갈군을 자유롭게 움직이던 고구려가 통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문제로 돌아간다. 왜 3루왕 시대에 3명만 왕으로 기록되었는가? 그 해답은 백제왕에 있다. 신라본기는 다루왕을 백제왕이라 부르고 있다. 3루왕 시대 이후 삼국사기 백제왕 중에 백제왕이라 불리는 것은 4세기 후반의 근초고왕이다.
삼한의 진왕은 227년에 가야 7국을 평정하고 230년에 왜국에 칠지도를 보내 비미호를 왜왕으로 책봉한다. 그런데 진왕이 보낸 칼에 백제왕세자를 칭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보면 227년에 가야7국을 평정할 때는 백제왕도 있었다. 이 말은 227년과 230년 사이에 백제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이 되었으나 아들이 아직 자립위왕을 하지 못한 상태라는 뜻이다. 백제왕은 본래 진왕급 지도자의 호칭이었고 백제는 삼한의 국명이었다. 3루왕 시대에 한성백제는 진왕제를 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최소한 5명의 통치자가 있었으나 3명만이 자립위왕을 하여 그들만 왕의 대수와 시호를 받고 삼국사기에 왕으로 기록된 것이다.
3루왕의 마지막인 개루왕 뒷부분을 통치하였던 후개루왕은 무려 35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한 채 퇴위하였다. 따라서 한성백제는 진왕제가 붕괴해버리고, 이후 진왕의 삼한 중 마한에 들어가 마한소국의 하나로 위치가 바뀌었다. 결론적으로 초고왕 이후에는 진왕제를 실시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진왕제를 실시하는 것이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다. 그런데 4말5초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금강유역의 진왕국가가 왜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진왕제가 백제에서 사라진 것이다.
진왕제는 담로제가 진화하여 왕실의 왕위계승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진왕은 강력한 소국출신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는데, 삼한사를 삭제하며 삼국사기에서 모두 사라져, 백제본기에서는 신라 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 일부 기록만 남게 되었다.
고대국가에서 왕족과 왕비족은 왕권을 받치는 2대 기둥이다. 따라서 왕비기록이 빠질 수 없다. 신라는 대부분의 기간이 삼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비기록이 거의 살아남았다. 신라본기에서 왕비기록이 나올 수 없는 곳은 신라가 진한에 들어가 한의 다른 소국과 혼인한 경우이다. 이러면 삼한사 삭제할 때 왕비기록이 함께 빠지게 된다.
신라가 망하고 진한에 들어간 것이 3-4세기 기림이사금과 흘해이사금의 시대이므로, 이 두 명은 원칙적으로 왕비기록이 없어야 한다. 신라본기를 열어보면 유례-기림-흘해 3왕이 왕비기록이 없어서 우리의 예측과 일치한다. 유례까지 왕비기록이 없는 것으로부터 미추이사금 사후 신라는 절반정도 진한에 들어가 있었고, 유례이사금의 왕비는 신라인이 아니라 다른 삼한 소국의 여인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본기에서 삼한사가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나오는 것은 왜가 나오는 4말5초 약 30년이다. 즉 응신과 인덕의 시기다. 따라서 백제본기는 이 시기에 한해서는 왕비 기록이 나와야 한다. 당시는 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의 시대인데, 아신왕은 이미 결혼을 하였고, 구이신왕은 너무 어려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전지왕의 왕비기록만 백제본기에 나올 수 있다. 백제본기를 열어보면 전지왕의 왕비가 ‘팔수부인’이라고 해서 역시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침류왕의 어머니가 ‘아이부인’이라는 구절은 왕비가 아니라 어머니여서 다행히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고, 책계왕의 부인이 대방공주 보과라는 구절은 대방과의 접촉 때문에 예외적으로 살아남은 경우다. 그리고 근초고왕 2년조에 나오는 왕후는 백제본기 유일의 왕후인데, 신라본기에 이하면 근초고왕의 부인이 아니라 당시 ‘여구’로 추정되는 백제 진왕의 부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담로제가 어디에 나오느냐를 따지면 전체에 나온다. 우선 온조왕조에 왕비의 기록이 없으므로 나오는 것이다. 다루왕조에도 왕비의 기록이 없으므로 역시 담로제가 나오는 것이다. 기루왕조에도, 다루왕조에도, 초고왕조에도, 구수왕조에도,... 왕비기록이 없는 백제본기 기록은 모두 담로제의 흔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