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한문실력이 스스로 해석할 정도가 못 되어 한문을 잘 아시는 분의 도움으로 해석을 했음니다. 문학을 전공하시는 이 분에게 물어보니 20세기 초.중반을 산 한문학자가 이런 소설을 한.중사서만 가지고 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구지왕조 기록은 2세기 중반 개루왕 39년 재위기간 중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는 35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백제본기에서 왕에 대한 소개가 없는 아주 드문 예인 2세기 중반 초고왕(소고왕)의 출현에 대한 배경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개루왕조 35년이 공백인 것과 초고왕의 소개가 없는 것이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라는 정도의 추측만 가능한데 박창화는 구지왕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초고왕 즉위 직전에 백제에 등장하는 길선입니다. 어떻게 왕실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상세히 알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의심도 들지만 일단은 재미있습니다. 화랑세기 뺨칩니다.

삼국사기에서 3세기 고이왕 초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좌평제와, 5세기 전지왕 때 신설되었다는 상좌평제도가 2세기 중반에 나오는 등 기존상식을 벗어난 내용도 많습니다. 백제왕기에는 고이왕조가 2개있는데, 하나는 23년을 재위한 박창화의 고이왕이고, 다른 하나는 53년을 재위한 삼국사기의 고이왕입니다. 박창화의 고이왕은 삼국사기 고이왕의 재위 53년 중 후반 23년을 기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51년에 백제에 시집온 신라인 길선의 딸이 고이왕 5년인 268년에 죽는데 72세였다고 합니다. 1갑자(60년)가 어디로 숨어버렸습니다.

원문에서 시대가 맞지 않는 공손씨 기록을 비롯한 2말3초의 기록은 모두 빼 버렸습니다. 구지왕 다음의 초고왕 4년조에는 169년을 사는 길선의 딸(전씨)과 229년을 사는 공손강의 누이(보고)가 60년을 건너 뛰어 서로 만나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박창화에 의하면 삼국사기 책계왕조에 나오는 대방국 왕의 딸 '보과'는 요동에 있었던 공손씨의 딸입니다. 요동의 공손씨가 대방군을 만들고 대방왕을 칭하고 있다가, 위-고구려 협공으로 멸망당하자 갈곳 없던 그 유민들을 황해도에 안치한 것이 황해도 대방국의 시작이고, '보과'는 그 왕의 딸입니다. '보과'공주 이전에도 공손씨의 딸 둘이 백제에 왔는데, 하나는 '보루'이고 다른 하나는 '보고'입니다. 특히 '보고' 왕후는 공손도의 둘째 딸로서, 구지왕-초고왕 두 왕을 모셨고, 경국지색의 미인이자 문무의 덕을 겸비한 훌륭한 여인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이를 요약하면, 박창화는 요동의 공손씨 국가는 3세기 초에 요동에 대방군으로 시작하여, 3세기 중반에 한반도로 피신해 와서 대방국이란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3세기 후반에 황해도가 고구려에게 평정됨에 따라, 서기 300년에 신라에 귀복하고 끝을 맺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서를 편찬하려고 보니 삼국사기의 원사료와 백제왕기가 있는데 1-2세기 특정부분이 서로 다릅니다. 만일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한다면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백이면 백 모두 삼국사기의 원사료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냥 부담없이 읽으시다가 해석이 이상한 곳이 나오거든 지적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개루왕-고이왕에 이르는 2-3세기 백제왕의 재위기간 차이 >
삼국사기의 재위기간
개루왕: 128-166(39년), 초고왕: 166-214(49년), 구수왕: 214-234(21년), 고이왕: 234-286(53년)

백제왕기의 재위기간
구지왕: 128-166 또는 188-226(39년), 초고왕: 166-194 또는 226-254(29년), 구수왕: 254-264(11년), 고이왕: 264-286(23년)
*길선의 모반사건은 개루왕 38년과 구지왕 38년에 동시에 나오는데, 개루왕조는 삼국사기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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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왕

위는 伯古이고 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경모하여 仇臺王(건국자-일도안사)이 다시 온 것 같다고 하였다. 이때 개루왕의 동모 아우들이 모두 왕의 은총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자 개루왕이 심히 걱정하였다.

개루왕이 죽음에 임박하여 왕후 沙씨(사씨)에게 이르기를, “내 아우들이 비록 많으나 오로지 백고만이 가장 지혜롭다. 내가 죽고 나면 아들이 모두 어리니, 만약 여러 아우들이 뜻을 얻게 되면 필시 너의 아들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니 백고를 맞이하여 너의 남편으로 삼음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왕후 사씨가 깊은 밤에 몰래 백고를 궁중으로 맞아드렸다. 이날 밤 눈이 내려 10여자나 되니 왕의 아우들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원년(128 무진) 12월, (형의 왕후였던) 사씨를 왕후로 삼고 어머니 屹씨(흘씨)를 태후로 삼다. 왕이 잠저할때(?) 舍人賈杞(사인고기)의 처 苩씨(백씨)를 맞아들였는데, 백씨가 아들 苩仁과 딸 苩花를 낳자 총애가 깊어졌다. 杞(사인고기-일도안사)의 아들을 자녀로 삼았다.

2년(129 기사) 2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5년(132 임신) 8월, 신라왕 일성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7년(134 갑술) 2월 왕후 사씨가 죽자 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 7월 신라왕이 근종의 딸 勿씨를 시집보내면서, “우리 물씨의 어머니는 선왕인 지마의 딸 밀화부인으로 그 아름다움이 나라에서 빼어났으며, 그 딸 역시 아름다움이 더하다”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사신인 小光을 후대하여 보냈다.

10년(137 정축) 10월, 勿씨가 왕자 餘勿을 낳으니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경사를 알렸다. 신라는 여물의 동복 오라비 길선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 왕이 私女 백화로서 길선의 처를 삼게 하였으나 백화의 나이가 11세라 아직 잠자리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그 어머니인 백씨로 대신하게 하였다. 길선이 그 모녀를 데리고 돌아가자 백씨의 지아비였던 賈杞가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사람들이 불쌍하다 하였다.

24년(151 신묘) 7월, 길선이 그 누이 勿씨의 나이가 30이 넘고 자녀를 많이 낳아 아름다움이 점점 퇴색해지므로, 그의 (배다른) 딸 田씨로서 첩을 삼도록 청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들이게 되었다. 田씨의 어미 彭田(팽전)이 데리고 와 龜宮에 묵으니, 왕이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귀궁에 몰래 들어와 전씨와 밀통했다.

田씨가 勿씨에 비해 더욱 아름다우니 왕이 매우 혹하여 길선에게는 좌평을 내리고 팽전은 국부인으로 삼아 장원과 노비를 내려 왕족의 예우를 했다. (전씨의 어미) 팽전도 역시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왕이 또한 밀통했다. 그때 사람들이 매우 애석히 여겨 이르기를, 우리 왕이 색을 밝혀 ‘알을 바꾸고 어미를 바꿨다’(易卵而換母) 하였는데, 이는 백화모녀를 전씨모녀로 바꾼 까닭이다. 田씨의 나이가 비록 15세이나 政事를 알아 나라 일에 자못 관여하였다.

25년(152 임진) 2월, 신라왕 일성이 죽었다. 왕이 苑古尸(원고시)를 보내 조문하고 부의하였다.(삼국사기는 154년 2월에 죽었다고 하여 달은 같으나 해가 2년의 차이가 있다-일도안사)
27년(154 갑오) 4월, 田씨가 왕자 素古(소고)를 낳았다. 왕이 그를 매우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고자 귀궁의 전속들을 중용하였다.

36년(163 계묘) 2월, 길선으로 하여금 상좌평을 삼고 군사일을 맡기었다. (신라인에게 군사일을 맡긴 사연은 다음과 같다-일도안사) 길선이 그 누이와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양국에 큰 집을 짓고 처첩을 두며 오고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임금이 그를 의심하여 중용하지 않자, 길선은 스스로 지마왕의 자손이라 하며 왕에게 자못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 왕이 그를 훈계하여 이르기를, “왕이란 것은 천명이지 인력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망동하지 말고 자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田씨에게 강력하게 권고함을 받아 길선에게 군사정무를 위임하자 길선이 크게 기뻐하며 신라로 돌아갔다.

38년(165 을사) 10월, 길선이 패하고 도망하여오자 신라왕이 그를 잡아 보내라하니 왕이 답하기를, “신하로서 불충함은 진실로 죄 줄만하다. 그러나 그의 딸이 이 나라에서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그 한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 하였다. 신라왕이 노하여 장군 大解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이롭지 못하여 돌아갔다.

39년(166 병오) 5월, 상좌평 길선이 죽으니 55세였다. 왕이 아주 슬퍼하여 태공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길선의 아들 彭宣(팽선)은 田씨의 다섯 번째 오라비이다. 왕이 팽선에게 백화로 처를 삼으라 하니 팽선이 말하기를, “그의 오라비 苩仁과 밀통하고 臣에게 박하게 대했습니다.” 하였다. 왕이 백인에게 명하여 북한산의 군대에게 소금을 내라 하였다. 백인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전씨에게 빠져 신에게 박하게 하십니다” 하였다.

왕의 세 번째 동생인 고시가 이를 듣고 田씨에게 밀고하여 말하기를, “여러 왕자들이 백인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한다” 하였다. 田씨가 말하기를 “장차 어찌하려느냐” 하자, 고시가 이르기를 “(왕의) 소칙을 거짓으로 꾸며 군사를 내어 먼저 제압함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田씨가 밀부를 내어 고시에게 주며 내외군사들을 내도록 하였다. 고시가 이에 왕을 핍박하여 깊은 궁에 가두고 소고를 세워 새로운 왕을 삼은 후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였다.

고시란 자는 본시 왕의 庶弟로, 그 어미는 일찍이 왕과 잠통하여 궁중의 비밀스런 일들은 몰래 고하니 왕에게 자못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왕 또한 고시를 자신의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고시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워 田씨와 서로 밀통하여 아들 素大(소고의 동생-일도안사)를 낳았으나 왕이 알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르러 백인 등이 이를 밝히려고 하자 고시가 먼저 그들을 친 것이다. 백인은 그 계교를 알고 말갈로 도망갔다. 고시가 이에 田씨와 더불어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니 왕이 괴로워하다 죽었는데 나이가 72세였다.

왕은 성군으로 治平의 이름을 얻었으나, 다만 내사를 좋아하여 부녀자일을 단속하지 않아 사랑하는 아우와 처에게 제압당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멀리 연다격섬 등을 시켜 고시를 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신라로 도망가 거사를 도모했으므로, 고시가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고 대신 소고를 세운 것인데, 소고의 나이 겨우 1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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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한성백제 초고왕(소고왕)이 즉위하였다는 것인데, 2세기 중반이면 한강유역에 백제 중 마한의 여러 소국들이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박창화의 기록에는 이런 소국들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구지왕과 백제왕, 즉 진왕과의 관계도 나올법 한데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