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학교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구석에 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우산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와, 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전설 가운데 몇 가지를 추려내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여서 내놓는다. 부디 이 글이 우산국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빈다 : 조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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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산 장군과 평리 장군의 싸움

옛날에는 울릉도에서도 싸움이 심하였다. 이 마을과 저 마을이 서로 싸우기도 하였다. 추산에는 추산 장군이 살았고, 평리에는 평리 장군이 살았다.

추산 장군과 평리 장군이 싸움을 하게 되었다.

추산 장군이 평리로 가려면 높은 산을 넘어가야 했다. 산을 넘어서 평리까지 가면 군사들의 기운이 빠져서 이길 수 없어 군사들에게 좋은 의견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한 군사가 나섰다.

“장군님, 좋은 수가 있습니다.”

“어떤 수가 있느냐?”

“산에 굴을 파면 됩니다.”

“누구의 힘으로?”

“예, 제게 맡기십시오.”

“그래!”

한 군사가 창을 비스듬히 들더니 산을 향하여 창을 던졌다. 산에는 커다란 구멍이 훤하게 났다. 그 구멍으로 군사들이 들락거릴 수가 있게 되었다.

평리에서는 아직 추산 장군이 도착하려면 멀었다고 생각해서 푹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야아!”

“활 받아라.”

“창 받아라.”

하며 군사를 거느리고 추산 장군이 쳐들어왔다.

평리 장군과 그 부하들도 용감했기 때문에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지마는, 추산의 기습을 받은 평리 장군은 기가 꺾이고 부하들도 사기가 죽었기 때문에 결국 추산 군사가 이겼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로 이 근처를 ‘삐쭉산’ 또는 ‘송곳산’ 또는 ‘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코끼리 바위와 송곳산 일대를 일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서기 1971년 울릉도 추산에서 김병철 씨가 구술(口述)한 전설

*조약돌의 생각 : 이 전설은 울릉도에 우산국(우중국)이 들어서기 전, 부족끼리의 전쟁이 있었다는 아주 중요한 증언이다. 각 지역의 지도자들이 서로 장군을 칭하고 상대방을 공격했다는 점은 영락없는 초기국가시대의 모습이다.

단, 전설에서는 한 사람이 던진 창으로 굴이 뚫렸다고 적혀 있으나, 한 사람이 그 정도의 힘을 발휘했을 리는 없고, 실제로는 추산 장군이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의 생각을 받아들여 여러 사람을 동원해 굴을 판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추산 장군이 평리 장군을 이겼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추산 장군은 이후 울릉도의 지배자가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우산국 왕실은 추산 장군의 후손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부족끼리의 항쟁에서 이긴 최종 승자가 왕이 되었을 테니까).

굳이 이 전설에서 다루는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따지자면 서기 244년 이전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삼국지』에 나오는 우산국 관련 기록에 각 부족끼리 다투었다는 기록이 없어 그 이전에 이미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삼국지]에 나오는 우산국」참고).

2. 장군이 나올 터

성인봉에는 장군의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한쪽 발자국만이다. 그것은 왼쪽 발자국이며, 한 발자국인 오른쪽 발자국은 본토(한/조선반도 : 조약돌)의 어느 곳에 있다고 하니, 그 장군의 한 발자국의 크기라는 것은 상상하기에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하루는 본토에서 사자(심부름꾼)가 왔다. 성인봉에서는 큰 장군이 날 듯하며 그 장군이 나게 되면 본토가 위협을 받을 것이니, 미리 그 장군이 태어날 만한 땅의 혈맥을 끊는다는 것이었다.

사자들은 성인봉에 올라갔다. 풍수지리설을 잘 아는 사람이,

“여기다.”

하고 가리키자, 사자들은 거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 길쯤 파니까 무엇이 불끈 솟았다.

핏줄기였다.

장군이 태어날 혈맥을 끊은 것이다. 피는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까지 흘러 내렸다.

이 때부터 울릉도에는 큰 장군이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한다. 이 혈맥을 끊은 자는 일본인들이었다고도 전한다.

- 서기 1971년 울릉도 평리에서 수집한 전설

*조약돌의 생각 : 이 이야기는 어쩌면 신라인의 우산국 탄압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장군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본토(한/조선반도) 사람이며, 사자를 보내 혈맥을 끊은 것도 한/조선반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장군이 태어난다는 것은 우산국에서 신라를 위협할 만한 뛰어난 인물이 태어난다는 것을 뜻하며, 사자들이 혈맥을 끊었다는 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신라에 해를 끼칠 만한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게 어떤 조치를 취하고 돌아갔다는 것을 뜻한다(마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 땅 곳곳에 지맥을 끊은 뒤 돌아갔듯이 말이다). 신라는 우산국이 해상 강국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무릎 꿇린 뒤에도 여전히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게 아닐지.

(이야기의 내용으로 볼 때,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서기 512년 이후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산국이 건재했다면 자신들의 영웅이 태어날 자리를 훼손하는 것을 내버려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단, 도선 선사가 중국식 풍수지리설을 퍼뜨리기 전에 있었던 우리 고유의 풍수지리설을 따라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인지, 아니면 도선 선사가 살았던 시기의 중국식 풍수지리설을 따라 그랬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부분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는다)

(일본인이 그랬다는 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당시 일본인은 울릉도 개척민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장군 발자국

성인봉의 상봉 가까이에 있는 바위에 장군 발자국이 있다. 마치 사람이 맨발로 디딘 자국 같다.

옛날에는 성인이나 장군이나 위인 등은 하늘의 구름을 잡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성인봉에 살던 장군이 하늘의 구름을 잡으려고 한 발은 이 성인봉의 바위를 디디고 다른 한 발은 본토의 어느 산에 디뎌서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바위가 이렇게 파일 정도로 장군은 힘이 세었다고 하니, 그 몸집이 얼마나 컸는가 짐작할 수 있다 한다.

- 서기 1971년 울릉도 천부에서 남진복 씨가 구술한 전설

*조약돌의 생각 : 내 생각이 옳다면, 이는 원래 우산국의 신화였을 가능성이 큰 전설이다. 장군이 성인봉에 살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 되어 있으며, 바위에 발을 디디고 힘을 주니 바위가 파일 정도로 힘이 세었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장군은(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용왕(해신)이나 산신령과 더불어 우산국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성인봉은 우산국의 성소(聖所)였을 것이다. 우산국이 망하면서 신화가 제대로 내려오지 못하고 파편이 되어 전해오다가 전설로 바뀐 듯 하다. 장군이 한 발은 울릉도에 디디고 다른 한 발은 한/조선반도에 디뎠다고 말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자신이 이주자임을 알고 있었고, 그를 신화에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4. 우해(于海)왕과 풍미녀

지금의 울릉도를 옛날 신라 시대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고 불렀다.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때는 우해왕(于海王)이 다스릴 때라고 한다.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요, 신체도 건장했으며,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작은 나라이지마는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도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이 때 우산국에 와서 가끔 노략질을 해 가는 왜구가 있었다. 그 왜구의 본거지는 주로 대마도였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왜구의 본거지를 찾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갔다. 대마도의 왕을 만나서 담판을 하였다.

“앞으로는 우산국을 침범 안 하리다.”

라는 항서(降書. 항복 문서 - 옮긴이)를 받았다.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고맙소. 서로 사이 좋게 지냅시다. 푸짐한 대접을 받아서 고맙기 한이 없소. 내일이면 떠나려 하오.”

하고 우해왕이 대마도를 작별하려고 하는데, 대마도의 왕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저주저하였다.

“아마 할 말씀이 있으신 모양인데 해 보시오.”

하였더니,

“사실은 저에게 딸이 셋 있사온데 그 가운데서도 셋째딸이 인물도 마음씨도 뛰어납니다. 풍미녀라고 부르지요. 이 풍미녀가 대왕을 따라가고파 하는데 어떠하실런지요?”

우해왕은 뜻밖의 일에 놀랐다.

“생각해 봅시다.”

“풍미녀가 대왕을 뵈옵고부터는 왕을 모시며 충성을 다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만약 왕이 데려가시지 않는다면 굶어 죽겠다고까지 합니다. 부디 데려가 주소서.”

“그렇게 마음이 굳어졌다면야.”

우해왕은 풍미녀를 데리고 우산국으로 돌아왔다.

풍미녀의 용모와 마음가짐이 단정하여 왕후로 삼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우해왕은 풍미녀를 왕후로 삼기로 했다.

우산국 백성들은 우해왕과 풍미녀를 받드느라고 온 힘을 다하였다. 우산국은 풍미녀가 왕후로 들어앉고부터는 우해왕의 마음이 전과 달라짐에 놀랐다.

전 같으면 왕은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기를 제 일같이 하였지마는 풍미녀를 왕후로 앉히고부터는 사치를 좋아했다. 풍미녀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고 들어 주려고 했다.

우산국에서 구하지 못할 보물을 풍미녀가 가지고 싶어하면, 우해왕은 신라에까지 신하를 보내어 노략질을 해 오도록 하였다.

신하 가운데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거나 바다에 처넣었으므로, 백성들은 우해왕을 매우 겁내게 되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힘썼다.

“망하겠구나.”

“풍미 왕후는 마녀야.”

“임금님이 달라졌어.”

이런 소문이 온 우산국에 퍼졌다.

신하가 신라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있다고 아뢰었더니, 우해왕은 도리어 그 신하를 바다에 처넣었다.

“왕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자는 죽인다.”

이 꼴을 본 신하는 되도록 왕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풍미녀가 왕후가 된 몇 해 뒤에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

- 서기 1971년 울릉도 통구미에서 최태식 씨가 구술한 전설.

*조약돌의 생각 : 우해왕의 왕후인 풍미녀의 출신지와 그 가족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전설이다. 그리고 우해왕이 신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거나 목을 베었다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우산국의 형법(刑法)은 참수형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형 두 가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산국이 대마도를 친 것은 다른 전설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고(「▩사자바위 전설이 증언하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참고),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려온 것도 다른 전설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 사실 자체는 크게 문제삼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대마도가 약탈을 했기 때문에 우산국이 대마도를 ‘응징’했다는 부분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김성호 박사는 주산군도의 해민海民이라고 주장함)에게 약탈당한 뒤 ‘왜인’에게 반감을 품게 된 고려/조선사람들이 전승을 왜곡시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무렵(서기 6세기)의 대마도는 백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의사를 거스르면서까지 우산국을 약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오히려 백제 본국과 일본열도의 백제 식민지를 잇는 ‘다리’로서(그리고 무역 중개지로서) 우산국의 욕심을 자극할 만한 땅이었다.

따라서 나는 전설의 내용과는 달리 우산국이 대마도에 있는 백제의 보물을 탐냈고, 그 때문에 대마도를 먼저 쳤으리라고 본다.

(대마도에 왕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가 이때까지 담로제를 유지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는 견해를 덧붙인다)

우산국은 뛰어난 수군을 동원하여 대마도의 백제 군사를 무릎꿇리고 전쟁보상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듯하며, 항복 문서까지 받아낸 것으로 볼 때 이는 우산국의 기습공격이 거둔 승리라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여기서 또다시 ‘트집’을 잡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풍미녀가 우해왕을 따라 나서기를 바랬고 풍미녀의 아버지도 우해왕에게 딸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는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은 크게 왜곡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풍미녀를 보고 반한 우해왕이 대마도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대마도에 있던 백제의 보물들과 풍미녀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풍미녀를 데려가는 대신 더 이상은 대마도를 약탈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강화하였을 것이다. 사실이 왜곡된 까닭은 이 전설이 우산국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사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산국이 망한 책임을 풍미녀에게만 돌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우산국의 왕들은 우해왕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계림국(신라)을 자주 공격했기 때문이다. 우해왕의 노략질은 선왕들이 했던 일을 한층 더 큰 규모로 벌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해왕은 우산국 수군의 힘을 믿었고, 계림국이 물에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신하가 신라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있다고 아뢰었다 하더라도 그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우해왕이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알린 신하를 바다에 처넣었다는 부분은 후대의 조작일 것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하를 처형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마 지나친 사치나 약탈행위를 따지는 신하는 잔인하게 죽였을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끌고 왔을 때 이미 첩을 여럿 거느린 몸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우해왕이 풍미녀를 ‘(여자들 가운데) 왕후로 삼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홀몸이었으면 그런 표현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산국의 왕은 아내를 여러 명이나 두었고 그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여성이 왕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 우산국은 풍미녀가 왕후가 된 지 몇 년 만에 망했고 우산국이 망한 해는 서기 512년이므로 - 못해도 서기 503년이나 서기 504년에 일어났을 것이다.

(또다른 사족 : ‘우해’는 ‘큰 바다’라는 뜻인 듯하다. ‘우(于)’라는 한자에는 ‘크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해상왕국의 왕에게 걸맞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5. (또다른) 사자바위 전설

골개(南陽) 포구에 사자바위라는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사자굴이 있으며, 사자바위를 굽어보는 투구같이 보이는 투구바위가 있다. 또 국수를 널어 놓은 것같이 보이는 국수바위가 있고 국수바위에서 태하로 가는 도중에 나팔봉이 있다.

여기 있는 사자바위/투구바위/나팔봉은 모두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 주는 지명이고 바위들이라고 한다.

우산국왕 우해는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리고 와서 왕후의 자리에 앉히고부터는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마음에 맞게 사치하는 데만 정신을 팔았다. 딸을 낳았는데 별님이라고 이름지어서는 왕후와 딸의 사치를 위해서 사는 왕이 되어버렸다. 왕후와 딸의 사치를 위해서는 신라에까지 가서 노략질을 해 오도록 했다.

그래서 노략질을 당한 신라의 백성들은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신라왕에게 호소했다. 여러 번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의 벼슬아치 이사부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우산국을 쳐서 노략질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사부는 모든 준비를 하고 우산국으로 왔다.

하루는 어디선가 나팔 소리가 났는데 우해왕의 귀에 들렸다.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에는 갈매기 떼 모양으로(갈매기처럼 많은 - 옮긴이) 돛단 배가 우산국을 향하여 왔다.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 군사였다. 우해왕은 옛날의 용맹을 되살렸다. 우산국의 배란 배는 모두 모았다.

“죽느냐, 사느냐? 힘껏 싸워라.”

우해왕의 배가 맨 앞에 섰다. 신라의 군사는 여러 날 동안 배에 탄 나머지 물살에 시달리다가 지쳐버렸다. 그러나 우산국의 군사는 바다에서는 물거미처럼 자유 자재로 다니면서 싸웠다. 신라의 군사는 우산국에 상륙도 못 하고 쫓겨났다.

신라에 돌아간 이사부는 신라왕을 뵐 낯이 없었다. 그러나,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군사를 다시 훈련시키면서 왕에게 토벌에 실패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꾀를 써야지, 힘만으로야 되나.”

“꾀라니요?”

“우산국은 사면이 바다라 해전(海戰)에는 귀신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힘보다도 꾀를 써야 해.”

“예, 알겠습니다.”

하고 이사부는 왕의 앞을 물러났다. 그러나, “예”하고 물러났지만, 그 꾀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소문을 내어서 우산국을 칠 묘한 꾀를 널리 모았다.

이사부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우산국으로 쳐들어 왔다.

한편 우산국에서도 신라 군사가 쫓겨갔으니 분풀이로 다시 한번 쳐들어 올 것으로 예측하고 군사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라 군사의 배에는 이상야릇하게 덮어 씌운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대장들밖에 없었다. 마침내 신라 군사는 우산국에 다다랐다.

몇 해 전에 신라 군사를 물리친 경험이 있는 우산국 군사는 의기양양하게 신라 군사를 맞았다. 화살이 오고 갔다. 우산국 군사는 만만하지 않았다. 또 신라 군사가 물러나야 할 만큼 우산국 군사는 해전을 잘하였다.

신라 군사들이 “우산국 우해는 듣거라. 항복을 하지 않으면 섬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하면, 우산국 군사들은 “신라의 이사부는 듣거라.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물귀신을 만들겠다.”고 맞받아 쳤다.

이사부와 우해는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으르렁거렸다. 이 때 이사부는,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풀어 놓겠다.” 하고 일제히 사자를 보였다. 이상한 물건으로 덮었던 것은 이 사자였다.

“사자?”

“그렇다. 세상에서도 괴물인 사자다.”

“사자!”

우해도 사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사부가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곧 풀어 놓겠다.”고 하자, 애써 태연한 척하며 “사자는 바다에서 힘 못 쓸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사부는 “사자의 힘을 보여 주어라.”고 말했고, 신라 군사의 배에 탄 사자의 입에서 일제히 불이 두어 길씩 튀어나왔다. 우산국 군사는 사기가 죽었다.

“신라의 사자는 무섭다.”

“불을 뿜는 사자다.”

“우리 임금(우해왕 - 옮긴이)은 고집이 세.”

“이 때 항복하면 우리는 살 거야.”

“신라는 대국이 아니냐? 우산국은 소국이고.”

“그렇고말고.”

신라 군사의 사기는 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불줄기를 보자 더욱 높아졌다. 우산국 군사 중에는 활을 버리는 군사도 있었다. 성인봉으로 숨는 자도 있었다.

“할 수 없다.”

“항복합시다.”

“그러자.”

“신라 군사에게 알려라.”

이렇게 말이 오고 가다가 희고 큰 깃발을 투구바위에 올렸다. 나팔바위에서는 항복하는 나팔을 불었다.

“신라의 이사부는 들으시오. 항복을 할 터이니 제발 그 사자를 이 섬에 내리지 마시오.”

그러자 이사부는 “알았소. 그러면 모든 무기를 배에 싣고 신라 군사에게 보내시오.”라고 하였고, 우해왕은 “그렇게 하리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신라의 이사부는 우해왕의 항복을 받았다. 우해는 앞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 말 것이며, 우산국이라는 이름도 쓰지 않을 것이며, 울릉도는 앞으로 신라의 땅으로서 강릉 군수의 지배를 받을 것이며, 노략질을 하지 않을 것과 오징어를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했다.

이사부는 신라의 큰 공로자가 되었고, 위대한 장군이 되었다.

우산국은 망하고 우해는 가난한 어부가 되었다. 신라의 군사들은 제각기 울릉도의 향나무며, 돌들을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이사부는 “기념이다.” 하면서 사자 한 마리를 바닷가에 던졌다. 알고 보니 나무로 만든 사자였다. 그 사자 입에서 불이 튀어나오게 했던 것이다. 우산국 사람들은 꾀에 속아 항복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 두고 간 사자가 화석이 된 것이 지금의 골개 앞의 사자바위라는 전설이다. 투구봉/나팔봉 등의 이름도 이 때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우산국의 우해가 항복하고 나서 공주 별님을 이사부가 데려가 첩으로 삼도록 부탁을 하고는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 서기 1971년 울릉도 통구미에서 최태식 씨가 구술한 전설

*조약돌의 생각 :

우해왕이 항복하고 나서 가난한 어부가 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살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별님은 인질이 되어 신라 땅으로 끌려간 듯하다(그녀가 이사부의 첩이 된 것도 우해왕이 부탁해서라기보다는 이사부가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산국 사람들은 무기를 모조리 신라군에 바치고 나서야 이사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신라에 반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산국이 신라에 해산물을 조공으로 바치기로 약속했다는 부분은 지금도 울릉도에는 오징어가 많다는 사실로도 그 사실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19세기에는 울릉도에도 향나무가 많았다고 하니, 신라 군사들이 향나무를 베어갔다는 말도 사실인 듯하다).

물론 신라가 우산국을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불을 뿜는 나무사자(안에 기계 장치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가 우산국 군사들의 혼을 빼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수한 기병을 배에 실어와 울릉도에 풀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산국은 해상왕국이라 수군은 우수하였으나 기마(騎馬)에는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신라군은 먼저 나무사자에서 짐승 울음소리를 내고 불을 뿜게 하여 우산국 군사에게 겁을 준 다음, 궁수(弓手)들을 동원해 화살을 한꺼번에 퍼붓고, 그 다음 배에 싣고 온 기마병(騎馬兵)을 섬에 풀어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었을 우산국 도읍을 휘젖고 다니게 했을 것이다(내가 아는 한, 우산국에는 성책의 흔적이 없다. 이는 우산국이 바다를 방패로 삼고 성벽을 쌓는 대신 배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배를 거느리고 지중해를 호령하였던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문명도 궁전만 있을 뿐 성벽은 없었다).

예전에는 본토를 공격당해 본 적이 없었던 우산국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을 테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신라에 항복한다.

전설에서 앞으로는 울릉도의 지배자가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신라에 항복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고려사』에 우릉(羽陵. 울릉도)을 다스리는 사람이 왕이 아닌 성주(城主)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실을 반영한 이야기인 듯하다. 우산국 왕은 이때부터 ‘왕’이 아닌 지방 성주(城主)로 굴러떨어졌다.

이후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屬國)이 되어 불교를 받아들인 듯한데, 이는『고려사』에 울릉도를 묘사한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섬 가운데 큰 산이 있고(성인봉 - 조약돌), 산정에서 동쪽을 향해 내려가면 바닷가까지 1만여 걸음이고, 서로 가면 1만 3천여 걸음, 남으로 가면 1만 5천여 걸음, 북으로 가면 8천여 걸음이고, 마을이 있던 터가 일곱 군데 있고, <돌부처>/<쇠종>/<돌탑>(모두 불교와 관련된 유물이다 - 조약돌)도 있다.”

-『고려사』「지리지」울진(蔚珍) 조

(사족 : 어떤 사람은 ‘고작 짐승의 울음소리 때문에 군인이 겁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실 텐데, 나는 그런 사람에게 동물원의 호랑이 우리나 곰 우리, 표범 우리 앞에 서 보실 것을 권한다. 사나운 짐승이 내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쇠창살 같은 ‘방어물’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사족 2 : 우중국[우산국] 사람들은 삼한백제가 건재하여 약탈을 할 수가 없었던 시절에는 무역을 했던 듯하다. 그들은 아마 바닷물에서 만든 소금과 울릉도에서 나는 나무, 전복, 오징어, 물고기, 물개 가죽[독도에는 20세기 초까지 물개가 많이 살았다]을 삼한 사람들에게 팔고, 그 댓가로 곡식이나 사치품을 가져갔을 것이다)

(사족 3 : 우산국 사람들이 계림국을 자주 노략질한 까닭은, 계림국 왕족과 귀족들이 금은 보화와 로마식 유리를 쓰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족 4 : 우산국 마지막 왕의 이름이 한자로 풀이할 수 있는 이름임을 미루어 볼 때, 우산국은 오랜 세월동안 - 삼한을 통해 - 서서히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 듯하다. 어쩌면 이들은 공문서에 한자를 썼을지도 모른다)

6. 비파산과 학포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부를 때 가장 훌륭한 왕으로 우해(于海)라는 임금이 있었다. 용맹이 뛰어나서 대마도에까지 가서 대마도 왕에게서 항복을 받고 그의 셋째딸을 왕비로 데리고 왔다.

왕비는 우산국으로 올 때 학을 한 마리 데리고 왔다. 시녀 12 사람도 같이 데리고 왔다. 왕비의 이름은 풍미녀였는데 왕비가 되고부터 사치가 너무 심해서 결국 우산국을 망치기까지 하였다.

풍미녀는 우산국의 국력을 거의 기울게 해 놓은 뒤 별님이라는 공주를 남기고 죽었다. 우해왕은 사랑하던 왕비가 죽자 슬퍼서 뒷산에 병풍을 치고 백 날동안 제사를 지냈다.

왕은 대마도에서 데리고 온 12시녀로 하여금 매일 비파를 치게 하였다. 왕비가 가까이하던 학도 같이 병풍 앞에 있게 했다.

백 날째가 되던 날 학은 날아갔다. 지금의 학포로 날아갔다. 그래서 ‘학포’라는 이름이 생겼고, 그 때 병풍을 둘러치고 비파를 울렸다 하여 ‘비파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서기 1971년 울릉도 통구미에서 최태식씨가 구술한 전설  

*참고 자료

-『울릉도의 전설/민요』(여영택 엮음, 정음사, 서기 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