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의 백제왕기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仇知王이라는 삼국사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지왕의 재위기간은 39년으로 역시 128년에서 166년까지 39년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백제 개루왕과 딱 겹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다른 사료와 비교 가능한 몇 개의 기사만 살펴보자.

구지왕 2년 기사 2월; 요동태수 공손도왕이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하고 선물을 보냈다.
-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 것이 189년(기사년)이다. 그러면 구지왕 2년은 2세기 후반인 189년인가? 공손씨와 혼인한 백제왕은 담로제를 운영하던 삼한백제의 진왕으로서 한성백제왕이 될 수 없다. 그러면 구지왕은 2세기 후반의 진왕인가?

구지왕 4년 신미 4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 삼국사기는 개루왕 4년 신미(131) 4월조에 王獵漢山이라 하였고 박창화는 구지왕 4년 신미 4월조에 역시 獵于漢山이라 하였는데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이 해가 131년이다. 그러면 구지왕은 한성백제의 개루왕인가? 60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가?

구지왕 5년 임신 2월, 築北漢山 以備高句麗(북한산을 쌓고 고구려에 대비하였다.)
- 삼국사기는 개루왕 5년(132)조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만 하였지 누구를 대비하였다는 말은 없다. 삼국사기만 보면 132년에 성을 쌓은 이유는 고구려보다 말갈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박창화는 고구려를 집어넣었다. 이는 원문에 이런 구절이 있어서가 아니라, 박창화가 스스로 판단하여 以備高句麗라는 구절을 임의로 집어넣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는 자신의 역사공부를 위한 연습장이지 더 이상 사료가 아니다.

구지왕 17년 갑신 9월; 공손도왕이 죽고 태자 공손강이 왕이 되었다.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 공손도가 죽은 것은 204년(갑신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 해가 구지왕 17년인데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는 것이다. 2세기 초중반의 기록이 나오다가 갑자기 한 갑자를 뛰어넘어 3세기 초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한성백제는 요동의 곤손씨 정권을 만난 적이 없다. 만일 만났으면 반드시 삼국사기에 나와야 한다. 당시 요서에 군사기지를 가지고 있어서 공손씨와 이해관계가 걸리는 나라는 삼한백제다.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초는 삼한백제가 마한과 진한만 통합하였고 아직 변한은 통합하기 전이다(삼한사의 재조명, 제10장).

구지왕 38년 을사 10월; 길선이 일을 그르치고 도망을 오자, 신라왕이 죄를 짓고 도망간 불충한 자이니 돌려보내라고 하였지만 거절하였다.
- 이 사건은 개루왕 38년인 166년(을사년)에 벌어진 일이다. 시간이 다시 과거로 가고 있다. 구지왕 17년이 204년인데 어떻게 구지왕 38년은 166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인가? 미래로 가서 공손도가 죽어 조문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신라 길선의 망명을 받은 인물이 동일인이 될 수 없다. 뒤죽박죽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혼인에 관한 복잡한 내용은 어떻게 썼을까? 나는 개루왕 39년 중 중후반기 35년을 통치한 후개루왕이 담로제에 의하여 길선의 딸과 혼인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길선의 신분이 너무 낮아 자립위왕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길선은 후개루왕의 도움을 받아 모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후개루왕이 자립위왕 하지 못하고 죽자 그에게 왕의 시호와 대수가 주어지지 않고 이전의 자립위왕한 개루왕에게 통합되어 버렸다.

초고왕 이후 한성백제는 마한의 1국이 되어 말갈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삼한백제의 신라 공격에 동원된다. 당연히 더 이상 진왕급 지도자의 호칭인 백제왕을 칭하지 못한다. 한성백제가 다시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4세기 후반 자립위왕한 근초고왕부터이다. 하지만 이는 담로제를 이해해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인데 박창화가 어떻게 그런 내용들을 썼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가장 큰 공백이 2세기 개루왕조이다. 39년 재위 중 천체관측을 제외한 사건 기록이 단 4년뿐이고 35년이 기록의 공백이다. 또 백제본기는 신라나 고구려와 다르게 왕비의 기록이 거의 없다. 박창화의 구지왕조는 그 시간 공백을 매움과 동시에 왕비기록의 공백도 메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심하게 모순이다. 만일 의도적으로 조작하고자 했다면 너무나 뻔한 오류를 보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4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하여 기록의 공백이 아주 크다. 박창화의 백제왕기는 그 중 3세기 이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왕력을 거의 그대로 필사한 것과 동시에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왕력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백제왕기에만 나오는 왕력은 왕실의 여인이 복잡하게 나온다는 것 외에 논리적으로 철저하지 못하여 모순이 많다. 따라서 이는 거의 완벽한 화랑세기와 비교된다. 왜 박창화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필사한 것 외에, 뻔히 모순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또 하나의 왕력을 기록했을까?

삼국사기를 쓸 때 김부식은 기존의 사료를 이용하여 기록한 것과 자신이 임의로 기록한 것은 분명히 구분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합리주의에 비추어 비합리적이어서 정사에 들어갈만한 기록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빼버렸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2차사료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성은 1차사료에 못지 않다. 기록을 조사해보면 4세기 이전 초기기록의 90% 이상이 단 한달도 안 틀린다. 그는 역사학자인 것이다.

반면에 박창화는 사료를 보고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며 적는 방식이라서, 어디까지가 사료를 필사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이 적어넣은 것인지 알 수 없게 하고 있다. 이는 마치 환단고기에서 보이는 집필방법과도 유사하다. 만일 박창화가 훗날을 생각하였다면 이를 구분하여야 했을 것이나 당시의 그에게 그런 역사적 소명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