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의 백제왕기에 나온 다루왕조와 삼국사기 다루왕조는 거의 같다. 이는 그가 삼국사기를 필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백제왕기는 군데군데 주석을 적어 넣고 있다. 무엇을 보고 주석을 적어 넣었을까? 단지 자신의 상상력으로 적어 넣은 것인가?

가. 다루왕조

박창화의 다루왕조를 보면 거의 같은데 다음 정도가 미세하게 다르다.

1) 삼국사기는 다루왕조 서문에 왕이 온조 28년에 태자가 되었다고 하였으나 백제왕기 다루왕조 서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 일부러 뺐는가?

2) 삼국사기에 없는 다루왕 5년(AD 32, 대무신 15년)조를 만들어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사건을 적고 있다. 이 기록이 백제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하여 여기에 첨가하였을까? 그리고 주석을 달았는데 백제 동쪽의 낙랑은 최리의 낙랑과 다르며(不同) 만주의 송화강유역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 박창화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주석을 달았을까?

3) 삼국사기는 다루 21년에 수상격인 좌보 흘우가 죽어서 왕이 슬피 울었다고 하였으나, 백제왕기는 흘우가 죽었다는 말만 있고 왕이 슬피 울었다는 말은 없다. 박창화가 일부러 뺐는가?
*이후 백제의 수상은 백제본기 최초의 眞씨인 북부출신 진회가 맡는다. 그런데 북부의 眞씨는 말갈출신이다.

4) 삼국사기에는 다루왕 34년(AD 61, 탈해 5년)조가 없는데 백제왕기는 마한장군 맹소가 신라에 항복한 사건을 이곳에 기록하고 주석까지 달아두었다. 단지 자세히 쓴다는 입장에서 그랬을까?

5) 삼국사기는 다루 49년조에서 신라에게 와산성을 뺏겼다고만 하고 있는데, 백제왕기는 백제군이 2백명 전사했다고 하고 있다. 무슨 근거로 2백명이란 숫자가 나왔는가? 단시 다루 39년조에 2백명을 두어 와산성을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성을 뺏겼으니 응당 그 2백년이 다 죽었을 것이다 하는 추정으로 적은 것인가?

사서를 필사할 때는 자신이 첨가한 부분과 필사한 부분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박창화의 역사책은 백제왕기는 물론이고 다른 것들도 그것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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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루왕조

박창화의 백제왕기 기루왕조 역시 삼국사기를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미세한 부분이 다르다.

(1) 삼국사기는 기루왕조 서문에 다루왕이 재위 50년 만에 돌아가셔서 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백제왕기에는 그런 말이 없다.

(2) 백제본기에는 기루왕 31년조(겨울에 물이 얼지 않았다)가 있으나 백제왕기에는 없다.

(3) 기루왕 49년(AD 125, 지마이사금 14년)조는 자치통감에도 이에 해당하는 기록이 나오는 유명한 기사로, 고구려 태조왕 69년조의 요서 마한 출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요서에서 마한과 고구려가 협력하며 후한과 전쟁하자 말갈이 백제에 대한 공격을 멈춘다. 뿐만 아니라 말갈이 신라를 공격하다 백제가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백제의 의사를 확인한 말갈은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다(賊聞而退).

결국 당시 한반도 북부의 군사력을 고구려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이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는 낙랑이 아니라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와 신라본기가 모두 당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백제 기루왕 49년조의 다섯 장군=고구려 태조왕조의 마한=자치통감>의 3가지가 동시에 떠올라야 한다.
*자치통감: 孝安皇帝 建光 元年 十二月,高句驪王宮率 馬韓ㆍ濊貊 數千騎  圍玄菟,夫餘王 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 與州郡並力討破之. 是歲 宮死 子遂成立.

그런데 그 중요한 기루왕 49년조의 표현방식이 다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루왕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 救之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여 글로서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박창화의 백제왕기*
기루왕 四十九年 乙丑, 七月 <靺鞨>襲<新羅>大嶺柵 過泥河, <新羅>請救 王遣五將軍 救之 (말갈이 신라의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너자,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여 왕이 다섯 장군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백제의 관심사항은 말갈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지 말갈이 구체적으로 신라의 어디를 공격하였는가가 아니다. 따라서 백제사에 <靺鞨>襲<新羅>大嶺柵 過泥河는 나올 필요가 없다. 삼국사기가 옳다. 하지만 박창화는 백제왕기 기루왕조의 내용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을 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을 고쳐 적었다. 자신은 이것이 더 상세하다고 판단했겠지만 사료로서는 옳지 않은 일이다. 삼국본기는 각국의 기록이므로 함부로 옮겨 적어서는 안 된다. 그는 사서집필의 자세에 있어서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만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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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개루왕조

3루왕의 마지막인 백제본기 개루왕조에 대해서는 하나가 다르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것이 38년(AD 165)조에 실린 신라 아찬 길선이 한성백제로 망명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일부 판본은 38년이 아니라 28년으로 되었다. 二十八은 三十八의 오각인인데 실수로 三자가 二자기 되었다는 것은 다음처럼 알 수 있다.

가.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12년 10월조에 이에 해당하는 전후맥락이 상세히 나오는데 이것이 개루왕 38년에 해당한다.

나. 백제본기는 그해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개루왕 38년에 일식이 있었다. 그런데 박창화의 백제왕기 개루왕조는  일식기록은 적지 않았고 연도만 28년이 아니라 38년으로 정확히 적었다. 38년으로 맞게 적은 그의 판단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내 판단에 그는 이 천체기록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탈락시킨 것이라고 보는데 사학도로서 아주 잘못된 것이다.

다. 신라본기를 보지 않아도, 고천문학적으로 대조해보지 않아도, 담로제만 알면 바로 알 수 있다. 당시 백제를 통치하던 후개루왕은 신라 아찬 길선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려고 하였으나, 길선의 신분이 너무 낮아 자립위왕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길선은 한성백제의 지원하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고 하였다가 실패하고 만다. 그것으로 한성백제를 통치하던 후개루왕은 끝이었다. 한성백제가 더 이상 백제왕을 칭하지 못하고 이제 삼한백제의 마한의 1국이 된다. 따라서 길선의 망명은 개루왕조 말년에 나타나야 하며, 그러므로 신라인 길선의 망명사건은 28년이 아니라 38년이어야 한다.


이상으로 살펴볼 때 백제왕기라는 사료는 없었다. 이것은 박창화가 여러 사료를 짜집기하여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역사학에 대한 기본적인 능력은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에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수준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료를 보고 필사하는 능력 뿐이다. 따라서 박창화 문집 중에 그가 자신의 생각을 적어 넣은 것은 전혀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본다. 그러면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그가 남긴 유고는 자신이 창작한 것은 없으며 모두 어떤 책을 보고 필사한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