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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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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
2007.04
반정천황의 자립위왕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147 2007.04.18 17:40:45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529 Views 19 Voted / 0 Devoted
인덕이 죽자 거래수별황자 세력과 주길중황자 세력이 각자 군대를 동원하여 왕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지는데 서치별이란 인물이 나타나 주길중 세력을 제압하고 사태를 장악한 후 거래수별을 왕위에 옹립한다. 이 서치별은 백제 궁월군(훗날의 인덕천황)과 함께 고구려군의 공격을 피해 백제 17현민을 이끌고 응신 20년(402년)에 바다를 건너와, 응신과 인덕 시기에 왜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등 왜국의 제2인자였던 백제 아지사주일 수밖에 없다(삼한사의 재조명, 제5부 참조).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주길중황자 세력의 도전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할 때 아예 태자이던 거래수별마저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자립위왕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는 거래수별을 이중천황으로 세웠지만 실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왕(珍)은 자신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겠지만 반정천황조를 읽어보면 자신이 인덕 사후 바로 자립위왕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반정의 왕비
1) 진야원 : 大宅臣의 선조 木事의 딸, <황부인>으로 세움,
- 향화희황녀, 원황녀를 낳다.
2) 제원 - 진야원의 동생
- 재황녀와 고부황자를 낳다.
왕비의 신분이 너무 낮아 황후나 황비가 못되고 황부인이다. 일본서기 전체에 황부인이란 기록은 여기가 유일하다. 그가 자립위왕하려면 그에 걸맞는 왕비가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즉, 그는 본래 왕이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인덕이나 마찬가지로 5세기 초의 대 혼란기에 백제에서 건너온 이민집단의 지도자였다. 이민 전에는 백제 어느 소국의 통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주라는 직책도 왜국의 외교를 담당하며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덕 사후 자신이 직접 자립위왕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거래수별태자를 명목상의 왕으로 세워놓고 뒤에서 통치한 것이다. 그런데 이중이 황후를 세우고 실세이던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자 이중을 제거하고 자립위왕하였다. 일본서기는 5세기 통치자 중에 인덕과 반정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은 성군형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반정천황 원년(434년, 백제 비유왕 8년); 겨울 10월, 비바람이 때를 맞추어 오곡이 잘 여물었다. 백성이 풍요하고 천하가 태평하였다.
인덕과 반정은 배경에 비슷한 점이 있는데, 하나는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당해 위기에 빠졌을 때 백성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선왕(응신과 인덕)의 정통성있는 태자(토도치랑자와 거래수별)를 힘으로 몰아내고 집권하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반정은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5세기 초 왜국에서 응신과 인덕 다음 가는 큰 세력가였던 것이다.
반정천황 5년(438년, 백제 비유왕 13년); 봄 정월, 천황이 대전에서 죽었다(崩).
반정은 나이가 많아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자연사로 보인다. 그 외에 반정천황조의 기록이 특이한 것의 하나는 일체의 외국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부여씨가 등장하여 왕권을 장악하고 백제왕을 칭하고 있었다. 이것도 그가 5국 도독을 내세우며 외교무대에 나와야 했던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왕은 근초고왕 이후의 일본서기에 등장하지 않은 유일한 백제왕이다. 비유왕 당시에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이 관계의 복원은 개로왕 때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왜국에 새 진왕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을 때 그의 죽음은 중국에서 천자의 죽음을 뜻하는 崩이었다. 이는 삼한의 소천자였던 진왕의 죽음에 따른 것으로서, 진왕제를 고수하고자 하였던 5세기 왜왕들 역시 崩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만일 무령왕릉과 같은 지석이 일본에서 발굴된다면 '왜왕 아무개 崩'이 아니라, '백제왕 아무개 崩'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주길중황자 세력의 도전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할 때 아예 태자이던 거래수별마저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자립위왕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는 거래수별을 이중천황으로 세웠지만 실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왕(珍)은 자신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겠지만 반정천황조를 읽어보면 자신이 인덕 사후 바로 자립위왕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반정의 왕비
1) 진야원 : 大宅臣의 선조 木事의 딸, <황부인>으로 세움,
- 향화희황녀, 원황녀를 낳다.
2) 제원 - 진야원의 동생
- 재황녀와 고부황자를 낳다.
왕비의 신분이 너무 낮아 황후나 황비가 못되고 황부인이다. 일본서기 전체에 황부인이란 기록은 여기가 유일하다. 그가 자립위왕하려면 그에 걸맞는 왕비가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즉, 그는 본래 왕이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인덕이나 마찬가지로 5세기 초의 대 혼란기에 백제에서 건너온 이민집단의 지도자였다. 이민 전에는 백제 어느 소국의 통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주라는 직책도 왜국의 외교를 담당하며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덕 사후 자신이 직접 자립위왕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거래수별태자를 명목상의 왕으로 세워놓고 뒤에서 통치한 것이다. 그런데 이중이 황후를 세우고 실세이던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자 이중을 제거하고 자립위왕하였다. 일본서기는 5세기 통치자 중에 인덕과 반정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은 성군형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반정천황 원년(434년, 백제 비유왕 8년); 겨울 10월, 비바람이 때를 맞추어 오곡이 잘 여물었다. 백성이 풍요하고 천하가 태평하였다.
인덕과 반정은 배경에 비슷한 점이 있는데, 하나는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당해 위기에 빠졌을 때 백성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선왕(응신과 인덕)의 정통성있는 태자(토도치랑자와 거래수별)를 힘으로 몰아내고 집권하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반정은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5세기 초 왜국에서 응신과 인덕 다음 가는 큰 세력가였던 것이다.
반정천황 5년(438년, 백제 비유왕 13년); 봄 정월, 천황이 대전에서 죽었다(崩).
반정은 나이가 많아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자연사로 보인다. 그 외에 반정천황조의 기록이 특이한 것의 하나는 일체의 외국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부여씨가 등장하여 왕권을 장악하고 백제왕을 칭하고 있었다. 이것도 그가 5국 도독을 내세우며 외교무대에 나와야 했던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왕은 근초고왕 이후의 일본서기에 등장하지 않은 유일한 백제왕이다. 비유왕 당시에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이 관계의 복원은 개로왕 때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왜국에 새 진왕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을 때 그의 죽음은 중국에서 천자의 죽음을 뜻하는 崩이었다. 이는 삼한의 소천자였던 진왕의 죽음에 따른 것으로서, 진왕제를 고수하고자 하였던 5세기 왜왕들 역시 崩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만일 무령왕릉과 같은 지석이 일본에서 발굴된다면 '왜왕 아무개 崩'이 아니라, '백제왕 아무개 崩'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