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신라본기」와『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박씨족은 경기도 동북부(이에 대해서는『삼한사의 재조명』에 실린「신라의 건국」이라는 글을 참조할 것)에 나라(서나벌)를 세운 뒤 계속해서 승승장구한다. 진(진한)의 “유민”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의 백성이나 위만조선의 유민, 변한인, 낙랑국 사람들, 예(濊)족도 항복하고 서나벌에 들어오는 것이다.

위만조선의 유민 : 위만조선이 무너지기 전에 “동쪽의 진국”으로 달아나 살고 있던 “조선의 유민들(『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 원년 조)”

고구려의 백성 : 서기 18년(천봉天鳳 5년/남해차차웅 15년)에 “고구려의 속국(屬國)인 일곱 나라(七國)가 와서 항복했다(『삼국유사』「기이」<남해왕>조).” → 항복한 사람들은 아마 (비류국처럼) 고구려에게 정복당한 고조선의 옛 제후국에 살던 사람들이거나 고구려의 일곱 성읍(城邑. 국읍國邑과 같은 말이다. 고대에는 성을 ‘국國’이라고 불렀다)에 살던 고구려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까닭은 서나벌이 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 만한 힘이 있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변한인 : “봄 정월에 변한卞韓(弁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 19년 - 서기전 39년 - 조).”

진(진한)의 유민 : 서기전 40년 삼랑진 전투에서 진이 서나벌에게 패한 뒤 많은 진(辰)나라 사람들이 서나벌에 붙잡혔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기전 37년 혁거세거서간이 진의 마지막 임금인 태기왕을 태기산 전투에서 죽인 뒤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서나벌에 투항했다. 일부는 동남쪽(경상도)으로 내려가서 다시 소국(小國)들을 세웠다(이 누리집의 글인「▩「신라본기」가 입증하는 태기왕 이야기의 정확성」과 「▩진(辰)의 멸망과 진한의 멸망」참고).

낙랑국(國) 사람들 : 혁거세거서간의 아버지인 거수(渠帥)가 흉노군과 한군(漢軍)을 피해 동남쪽으로 달아날 때 낙랑국을 뚫고 지나갔고, 그 때 많은 낙랑인이 포로로 잡힘(내 생각이 옳다면, 혁거세거서간 조부터 유리이사금 조까지 낙랑국과 싸운 기록이 많이 나오는 까닭도 이 때 낙랑국이 오환족에게 피해를 입어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전 28년에는 낙랑국 군사가 서나벌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고(『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 30년 조), 서기 4년에는 낙랑국 군사가 서나벌의 수도 금성을 포위공격했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으며(『삼국사기』「신라본기」남해차차웅 원년 조), 비록 서기 36년에는 낙랑 군사에게 타산성(朶山城)을 빼앗겼으나(『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 13년 조) 그것이 나라 전체의 안전을 흔들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았고, 서나벌과 낙랑국은 낙랑국이 멸망할 때까지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고『국사(國史)』의 기록에 따르면 “혁거세 30년(서기전 27년)에 낙랑 사람들이 와서 항복했다(『삼국유사』「기이」<낙랑국> 조).” 이후 서기 37년 낙랑국이 고구려 대무신왕(무휼)에게 망하자, 유민 “5천명(『삼국사기』)”이 서나벌로 달아난다. 이들은 6부에 나뉘어 살면서 서나벌의 백성이 된다.  

예족 :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濊)왕의 도장을 얻어 이를 바쳤다(『삼국사기』「신라본기」남해차차웅 16년[서기 19년] 조).” → 예족의 지배권이 예족 자신에게서 서나벌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기사다. 만약 예국(濊國)이 강원도 안에서 건재했다면 왕권을 상징하는 예왕의 도장이 서나벌 사람의 밭에서 나올 리가 없다. 이는 맥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예국이(「▩태기왕은 어느 나라의 임금인가?」/「▩고구려와 백제에서 활약한 예(濊)족」참고) 진(辰)이나 서나벌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족이 서나벌에게 점령당한 사실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나오는 까닭은 예족이 나중에는 삼한백제의 일원으로 가담했기 때문일 것이다(「▩서라벌 탈해왕 - 5. 예족의 반발과 양국(兩國)의 침입」/「▩고구려와 백제에서 활약한 예(濊)족」/「Re : 예(濊)의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참고).

또 그들은 서기 42년에 전라북도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무너뜨렸고(「▩서기 42년 이전에, 영역을 충청북도까지 확장한 서나벌」참고), 같은 해에 쳐들어온 고구려군을 물리쳤다(『삼국유사』「기이」<노례왕>조에 “건무(建武) 18년”에 “고구려 군사들이 쳐들어 왔다.”는 구절이 나옴. 만약 고구려군이 이겼다면『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에 이겼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후로도 신라는 오랫동안 강원도 땅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서라벌 탈해왕」시리즈 참고 - 서나벌군이 고구려군에게 이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서기 63년부터 서기 85년까지 백제(삼한백제 포함)와 싸우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삼국사기』「신라본기」의 탈해이사금 조/파사이사금 조 참고). 또 그들은 서기 77년(탈해이사금 21년)부터 서기 96년(파사이사금 17년)까지 가야 연방과 싸우면서 동남쪽으로 내려갔고, 서기 102년(파사이사금 23년)부터 읍즙벌국/실직국/압독국/비지국/다벌국/초팔국 등 경상도에 퍼져 있던 진한 소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기 125년(지마이사금 14년) 2월과 8월, 서기 137년(일성이사금 4년) 3월, 서기 139년(일성이사금 6년) 9월과 11월에 고구려군(“말갈”)에게 약탈당했으나(『삼국사기』「신라본기」제 1), 아달라이사금이 다스리던 때인 서기 165년(아달라이사금 12년)과 서기 167년(아달라이사금 14년)에는 군사를 내어 백제(한성백제)를 칠 정도로 강해졌다(「신라본기」아달라이사금 14년 조에 따르면, 서나벌이 동원한 군사는 2만 명이었고, 이 때 “왕이 또한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한강]로부터 싸움터에 이르니, 백제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간 남녀를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오환족 기병의 강함’과 ‘재빠른 상황 판단’, 그리고 ‘진한인 흡수’가 그 해답이라고 말하겠다. 박씨족이 원래는 오환족이라 강한 기병을 갖고 있었고, 반도로 들어온 뒤에는 재빨리 농경을 받아들여 나라의 부(富)를 늘렸으며(「▩박씨족이 농업을 권장한 까닭」참고), 오환족과 마찬가지로 “소와 말을 타고 다니는(『삼국지』)” - 쉽게 말해 반半 유목민족인 - 변한인/진한인(변진인)을 흡수해 전력을 보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말하면 “오환족은 흉노족에게 깨져서 도망쳐 내려왔다며? 그런데 그런 자들의 힘을 과대평가하는거 아냐?”라고 물으시리라. 그래서 여기에 오환족도 흉노 못지않게 강했고, 한 때는 중국을 위협하기까지 했다는 증거를 인용하고자 한다. 한번 읽어보시라 :

“오환(烏丸), 선비(鮮卑)가 점차 강성해지고 또한 한나라 말의 혼란으로 인해 중국에 일이 많아 밖을 토벌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오환, 선비가) 사막 남쪽 땅에서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성읍(城邑)을 침략하고 인민들을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하여 북쪽 변경은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 한나라의 북쪽 국경지대가 오환족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많은 성읍이 침략당하고 한인(漢人)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약탈당하고 있다. 한(漢)의 군사를 꺾을 만한 실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한 때 한나라 군사에게 공격당해 기세가 꺾인 적은 있으나 그 근본이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소의 아들인)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에게로 달아났다. 답돈은 또한 효무(驍武-사납고 용맹함)하여 변경의 장로들은 모두 그를 (흉노의) 묵돌(冒頓)에 비교했는데, (답돈은) 땅이 험조하고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을 믿고 망명을 받아들이고 백만(百蠻. 모든 오랑캐라는 뜻. 여기서는 ‘모든 유목민’. - 옮긴이)들 위에 웅거했다.”

→ 오환족의 선우인 답돈이 몽골초원의 모든 유목민들을 제압하고 흉노의 묵돌 선우(묵특 선우)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오환족은 강할 때는 흉노 못지않은 강함을 과시했고, 그 때문에 동한(후한)의 가장 유력한 군벌 가운데 하나였던 원소 집안의 아들들이 오환족에게로 달아난 것이다.  

“태조(太祖-조조)는 은밀히 군사를 내어 북벌하고 출기불의(出其不意)하여 한번 싸움으로 평정하니, 이적(夷狄)들이 섭복(懾服-두려워하며 복종함)하고 그 위엄을 삭토(朔土-북토)에 떨쳤다. 그리고는 오환의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정토(征討-정벌전)에 따르게 하니 이에 변경의 백성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 여기서 우리는 조조가 오환족을 이긴 사실에만 주목하기 쉽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조조는 오환족을 이긴 뒤 그들을 중국을 통일하는 전쟁(군벌들끼리의 싸움)에 용병으로 동원하고 있다. 조조도 그들의 무력이 강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 풍속은 기사(騎射-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 항상 용맹, 장건하며 다툼이나 쟁송, 서로 침범한 문제를 잘 처리해서 결정하는 자를 뽑아 대인으로 삼으며, 읍락(邑落)에는 각각 소수(小帥)가 있고 세습되지는 않는다.”

→ 오환족이 강한 이유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들은 흉노 못지않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고, 늘 용맹하기 때문에(그리고 핏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지도자를 뽑기 때문에) 강했던 것이다. 박씨족도 몽골초원에서 막 반도(한/조선반도)로 내려왔을 때에는 이런 풍습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농경민족이 된 마한을 위협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보다 강한 고구려나 백제/가야 연방과도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왕망(王莽: 서기 9-23년) 말에 이르러, 흉노와 함께 (중국을) 침략했다. 광무제가 천하를 평정한 후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에게 3천 기를 이끌게 해 오원관(五原關)으로부터 새(塞)를 나가 정벌하게 했다. 싸움이 이롭지 못했으나 말 천여 필을 죽였다. 마침내 오환이 번성하게 되어 흉노를 노략질하고 공격하니 흉노가 천 리 밖으로 옮겨가 사막 남쪽 땅이 비게 되었다.”

→ 흉노에게 당했던 오환이 이번에는 흉노를 공격하고 있다. 그 때 미친 파장이 얼마나 엄청났냐 하면 “흉노가 (본거지인 몽골초원에서) 천 리 밖으로 옮겨가 사막 남쪽 땅이 비게 되었”을 정도다. 후한군도 이들을 당해내지 못했다(마원이 이끄는 3천 기가 벌인 싸움이 “이롭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 그 증거다). 오환과 선비는 이 정도로 강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한나라 말, 요서 오환대인 구력거(丘力居)는 5천여 락(落), 상곡 오환대인 난루(難樓)는 9천여 락(落)을 이끌며 각각 왕이라 칭하고, 요동속국 오환대인 소복연(蘇僕延)은 천여 락(落)을 이끌고 초왕(峭王)을 자칭하고, 우북평 오환대인 오연(烏延)은 8백여 락(落)을 이끌고 한로왕(汗魯王)을 자칭했는데, 이들 모두는 계책(計策)과 용건(勇健-용맹 건장)을 갖추고 있었다. 중산태수 장순(張純)이 모반하여 구력거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미천 안정왕(彌天安定王)을 자칭하며 3군 오환(三郡烏丸)의 원수(元帥)가 되어 청주, 서주, 유주, 기주의 네 주를 침략하고 관원과 백성들을 살략(殺略)했다.

영제(靈帝: 168-189) 말, 유우(劉虞)가 주목이 되어 호(胡-흉노)를 모으고 장순을 참수하니 이에 북주(北州)가 안정되었다. 그 뒤 구력거가 죽자 아들 루반(樓班)은 어리고 종자(從子-조카) 답돈(蹋頓)이 무략(武略)이 있어 그가 즉위해 3왕부(三王部)를 총괄하니 그 무리들이 모두 그의 교령(敎令)에 따랐다. 원소는 공손찬과 연달아 싸웠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답돈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구하고는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해 깨뜨렸다. 원소는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답돈, 초왕, 한로왕에게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들 모두를 선우로 삼았다.”

→ 오환족의 왕들이 후한을 공격해 후한 북부에 있는 주(州)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그리고 군벌 두목 가운데 하나인 원소를 돕고 있다. 원소는 이들의 도움을 얻어 막상막하로 싸우던 또다른 군벌 두목인 공손찬을 깨뜨리는 데 성공한다. 그들의 힘은 한 군벌의 세력을 망하게 하거나 흥하게 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건안 11년(206년), 태조가 친히 유성의 답돈을 정벌했다. 잠군(潛軍-은밀히 군을 움직임), 궤도(詭道)하여 백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발각되었다. 원상은 답돈과 함께 무리들을 이끌고 범성(凡城)에서 태조군을 맞아 싸웠는데 그 병사와 군마가 매우 많았다. 태조는 고지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며 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억누르다, 적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관찰한 후에 적을 공격해 깨뜨리고 적진에 임해 답돈을 참수하니 죽은 자가 들판을 뒤덮었다. 속부환(速附丸), 루반(樓班), 오연(烏延) 등은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요동에서 그들을 모두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염유가 통솔하던 유주, 병주의 오환 만여 락(落)을 모두 중국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고 그 후왕(侯王) 대인(大人)의 종중(種衆)을 정벌전에 뒤따르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삼군 오환(三郡烏丸)은 천하의 명기(名騎-이름난 기병)가 되었다.”

→ 동한(후한)의 중앙 귀족이자 군벌 가운데 하나인 조조가 답돈선우를 죽인 뒤 오환족을 동한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있다. 조조는 이들을 다른 군벌을 치는 데 동원하였고, 이후 조조의 아들 조비(위 문제)가 세운 위나라는 이들을 정식 군인으로 인정해 외국(예컨대 고구려)을 치는 데 썼다. 고구려를 공격해 동천왕이 도읍을 버리고 옥저로 달아나게 한 위나라군 출신 장군인 구루돈도 오환족의 선우다.

- 이상 모두『삼국지』「오환전」에서 인용

이와 같은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환족은 그 실력이 결코 흉노족에 못지 않았고, 흉노가 힘을 잃은 뒤에는 흉노를 대신해 한(漢)을 위협했다. 이들과 동족이었던 박씨족도 그와 같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유목제국인 흉노제국이나 농경민족의 대제국인 동한(후한)을 위협할 수 있었던 그들이 반도의 ‘중간국가’인 마한(농경민족)이나 소국가였던 백제(해양민족),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고구려를 위협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이들이 후에 경상북도로 밀려난 까닭은 그 수가 몽골초원에 남아있던 오환족에 비해 적고 또 그들이 싸운 무대가 (오환족에게 익숙한) 초원이 아닌 산악지대(강원도/충청도)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인다(그들이 농업 생산력이 부족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빼 놓을 수 없다).  

(물론 서나벌의 지배를 받았고 박씨족보다 수가 많았던 예족/진한인의 반발도 빼 놓을 수 없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이에 대해서는「▩서라벌 탈해왕 - 5. 예족의 반발과 양국(兩國)의 침입」을 참고)

그들은 진(辰)을 무너뜨리고 반도의 동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진한 소국들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그리고 변한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오환족만큼 기사(騎射. 맡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말은 잘 타는 진한/변한인들을 흡수했으며 경기도의 한성백제를 칠 때는 이들을 동원하게 된다. 나는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을 들라면 당연히 진한의 멸망을 말해주는「신라본기」혁거세거서간 조 21년(서기전 37년)의 기록과, 변한의 항복을 다룬「신라본기」혁거세거서간 19년 조(서기전 39년)의 기록을 든다. 이 두 기록은 서나벌이 나중에 경상북도의 패자가 되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참고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한글 동이전』(김재선/엄애경/이경 역편, 서문문화사, 서기 1999년)  


(*덧붙임 : 진한인이 유목민에 가까운 민족이라는 것은 중국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후한서』<한전> 진한 조에는 진한인이 "소와 말을 타고 다닌다"는 말이 나오고 『삼국지』<한전> 변진 조에는 변진(변한과 진한) 사람들이 "소와 말을 타고 다닌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도 말은 잘 탔으나 오환족만큼 활을 잘 쏘지는 못했고, 그 때문에 서나벌과의 경쟁에 패하고 그 밑으로 들어오게 된 듯하다. 이는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고트'족이 로마인보다 말을 잘 탔으나, 훈족만큼 활을 잘 쏘지는 못 했기 때문에 훈족에게 깨지고 그 신하가 된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