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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03
2007.04
2007.04
▩박씨족이 농업을 권장한 까닭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131 2007.04.03 19:48:09 (*.149.186.40) 신라사0 Comments 638 Views 35 Voted / 0 Devoted
나는 예전에 서나벌을 세운 박씨족이 서기전 78년에 흉노족에게 쫓겨난 오환족이며, 그것은 그들이 나라를 세운 시기와 그 나라의 위치, 그들의 풍습에서도 드러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금척리 이야기가 입증하는 서나벌 왕실의 기원」(상)~(하)/「▩[고침]서나벌 왕족의 뿌리」1~3편 참조).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박씨족이 서나벌을 세운 뒤 빠른 속도로 농경문화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에게 목축업 대신 농업을 권장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삼국유사』와『삼국사기』에는 서나벌의 지배층이 농업을 권장하는 기사는 많아도, 목축업을 권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이 6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했는데 왕비 알영도 따라갔다. <농사짓기>와 <뽕나무 기르기>를 권장하고 독려하여 토지에서 얻는 이익을 다 이용하게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서기전 41년) 조
(기록대로라면 이 때 혁거세 거서간은 29세이고 알영 왕비는 25세였다. 자기 나라를 충분히 순회할 수 있는 나이이며,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알영 왕비의 나이는『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으나『삼국유사』에는 13세 - 만으로는 12세 - 에 왕비가 되었다고 하며,『삼국사기』에는 서기전 53년 - 혁거세왕 5년 - 에 왕비가 되었다고 나오므로 그녀가 서기전 65년(서기전 53 + 12년)에 태어났다고 추산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 거서간은 서기전 69년생이다). 이를 바탕으로 나이를 계산해 보면 65 - 41 = 24 이므로, 그녀는 만으로는 24세, 실제 나이로는 25세라는 것이 밝혀진다 : 조약돌)
“봄 정월에 영을 내렸다. ‘이제 창고는 비고 병기는 무디어 못쓰게 되어 있다. … 마땅히 담당자를 시켜서 <농사와 누에 치기를 권장하고>, 무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할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파사이사금 3년(서기 82년) 조
“가을 7월에 사자(使者 : 벼슬 이름 - 이재호의 주석) 열 명을 나누어 보내어 주주(州主)/군주(郡主)로서 공무를 게을리 하여 <논밭과 들을 많이 황폐케 한 자를 조사하여 강등 또는 파면토록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파사이사금 11년(서기 90년) 조
“봄 2월에 영을 내렸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식량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州郡)은 <제방을 수리하여 완전하게 하고, 논밭과 들을 널리 개간하라>.’ 또 영을 내렸다. ‘민간에서는 금은과 주옥의 사용을 금하라.’”
- 『삼국사기』「신라본기」일성이사금 11년(서기 144년) 조
“또 비로소 <보습(농기구. 쟁기나 따비의 술바닥에 박아 사용하는 쇳조각으로 된 삽 모양의 연장. 땅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데 사용한다 - 옮긴이)과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藏氷庫. 장빙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삼국유사』「기이」노례왕(유리이사금 : 조약돌) 조
(이상 < >는 조약돌)
기록대로라면 이들은 농경민족이지 유목민족이 아니며, 이는 오환족이 “기사(騎射-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물과 풀을 따라 방목(放牧)하니 일정한 거처가 없고 궁려(穹廬-이동식 천막. 게르)를 집으로 삼으며 (입구는) 모두 동쪽을 향한다. 낮에 금수(禽獸-날짐승과 길짐승)를 사냥해 고기를 먹고 락(酪-우유나 양유를 끓여만든 음료. 타락)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삼국지』「오환전」의 기록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여 내 가설이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박씨족은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 흰 말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거서간을 시조로 섬겼으며, 동옥저 군(君)에게 말을 선물로 받을 만큼 말을 좋아했고, 흰 색과 말은 몽골/시베리아의 유목민이 섬긴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조선반도로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큰 변함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기록(『삼국사기』의 기록과『삼국지』의 기록)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나는『삼국지』「오환전」의 기록과 다른 유목민을 연구한 학자의 말에 그 답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오환전」의 기록을 보자. 거기에는 ‘유목만 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던 오환족이 간단한 농사를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풍속은 새와 짐승이 자식을 배고 기르는 것을 식별하여 <사계절에 때맞추고 밭갈고 씨 뿌릴 때는 항상 포곡(布穀-뻐꾸기)의 울음소리를 살핀다.> 토지는 푸른 기장과 동장(東牆-?)에 적합한데, 동장은 쑥과 비슷하고 과실은 아욱(무궁화목 무궁화과의 여러해살이 풀 - 옮긴이)의 그것과 같으며 10월에 열매가 익는다. 흰 술을 빚으나 누룩은 알지 못한다. 쌀은 항상 중국에 의존한다.”
-『삼국지』「오환전」
유목민족인 오환족이 농사를 지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유목제국’이란 유목민만이 만든 나라가 결코 아니다. 그런 유목제국은 존재한 적이 없고, 목농(牧農. 목축과 농업 - 옮긴이)복합국가(반농반목半農半牧국가 - 옮긴이)로서의 유목제국만이 역사상에 실재했다(주채혁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하 존칭 생략).” 다시말해서 유목민이 세운 나라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농사를 지으며 식량생산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외의 대다수는 유목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보호/감시했다는 얘기다. 우리가 유목민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흉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이전 흉노의 장형고분(長形古墳)에서는 돌절구가, 기원전 2~1세기의 노인 울라 고분군 제 23호분에서는 농작물의 종자가 발견되었으며, 그 밖의 여러 흉노 고분에서도 여러 가지 낱알과 농구 및 농업 관련 대형 도기(陶器, 낟알 저장 용기)가 출토되었다.
문헌에도 그들의 농경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한서』「흉노전」에는 무제 후원(后元) 원년(元年, BC 88) 가을 흉노 지역에 몇 달 동안 비와 눈이 내려서 ”곡식이 영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같은 책「서역전」에도 소제(昭帝) 때 오손 공주가 상서에서 흉노가 차사(車師, 현 신강 투르판 일대)에 기병을 파견해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 기사를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흉노의 창고에 식량의 여분이 비축될 정도로 농경이 진전되었다. 이러한 진전은 흉노가 철기를 사용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쓰기 시작한 것과 한으로부터 농경 기술과 농기구를 수입한 데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흉노 사회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유목민이라고 하여 일괄적으로 농경을 무시함으로써 농산품의 결핍으로 인해 결국 농경민과의 약탈전이 불가피하다는 교조적인 인식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농경의 경영에 따라 흉노 사회에서는 도시가 건설되어 정주 생활을 영위한 흔적도 남아 있다. 1960년까지 구소련과 몽골 고고학자들은 바이칼 호와 예니세이 강, 그리고 북몽골 일대에서 5개소(1개소는 구소련, 4개소는 몽골 내)의 도시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도시에는 성곽도 축조되고 농사를 지은 흔적도 있으며, 집 안에 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는 등 정착 생활의 일단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283~284쪽
흉노의 대 선배인 스키타이 족도 유목민과 정착민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전자는 후자를 다스리면서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곳으로만 돌아다녔다(물론 “유목민은 언제나 그들이 얻기 어려운 곡물과 다른 음식을 얻기 위해 정착민 이웃과의 무역이나 약탈에 의지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유목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늘 이동만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 지역의 목초지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들은 농부들이 윤작[輪作. 돌려짓기. 경작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땅은 놀리고, 다른 땅은 적극적으로 경작하고, 나머지 부분은 소극적으로 경작하는 방식으로 경영하는 농법農法이다. 이 농법에 따르면 놀리던 땅을 다시 경작할 수 있고, 경작한 땅을 놀릴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경작하던 땅을 소극적으로 경작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유럽 농부들은 땅 힘을 아끼고 수확량을 조절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다 - 조약돌]을 하듯 가까이 있는 주변 목초지를 번갈아 사용하며 살아갔다.” - 리처드 루드글리).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 옮긴이) 금으로 만든 네 가지의 물건 - <쟁기>, <멍에>, 도끼, 컵 - 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때까지 나라를 분할 통치하고 있던 세 형제는 서로 그 물건을 주우려고 했다. 그러나 금이 매우 뜨거울 때 손을 댄 두 형은 손가락을 데고 말았다. 그래서 막내 동생이 왕이 되었다.
이 전설의 의미는 스키타이족이 네 개의 부류 - 노동자, 농부, 유목민, 왕족 - 로 나누어진 데서 발견된다. 왕족 역시 유목민이었지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폭압적 통치를 받았다. … 헤로도투스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스키타이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한 종류는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았던 <농부 스키타이인>들로서, 이들은 그들의 후손들처럼 많은 곡식을 생산해서 유럽에 팔았다. 또 다른 종류는 유목 스키타이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농부가 그들의 신하였기 때문에 왕족으로 알려졌다. 유목민들은 수레를 타고 다니며 살았으며, 가축떼를 몰고 돈강, 볼가강, 우랄 아래쪽의 대평원 또는 더 멀리까지 나갔다. … (그들은 - 옮긴이) 가축을 먹일 꼴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 곳에 머물렀으며, 꼴이 바닥나면 다른 곳으로 옮겼다.”
- 에이메이 미셸
따라서, 오환족이 - 유목을 하면서도 - 때에 따라 농사를 짓기도 했다는 ‘모순된 기록’은 오환족 사회가 농민들의 사회와 유목민들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었고, 전자가 후자의 지배를 받으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오환족에게는 농경(이 경우에는 간단한 밭농사)이 ‘낯선 일’이 아니었고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만약 오환족이 초원에서 살다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예컨대 한/조선반도)으로 옮겨왔다면, 그들은 가축을 기르는 대신 농사를 지음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박씨족이 서나벌을 세운 뒤 목축업 대신 농업을 권장하게 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박씨족(오환족)은 그 때문에 자신들의 고향인 몽골초원을 떠나 망명지인 마한 땅(한/조선반도)에 오자 말과 개를 뺀 다른 짐승들을 기르지 않게 되었고(말은 자신들의 전력戰力을 뒷받침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계속 키워야 했을 것이다), 대신 선주민(마한인, 원 한국인, 위만조선의 유민)들에게서 벼농사의 이점을 배워 서서히 농경민족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삼국지』「오환전」에 나오는 ‘오환족이 유목을 주로 하지만 농사도 짓는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초기 기사를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바이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주채혁, 혜안, 서기 2007년)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동아출판사, 서기 1989년)
-『고대문명교류사』(정수일, 사계절, 서기 2001년)
-『바바리안』(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우혜령 옮김, 뜨인돌, 서기 2004년)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박씨족이 서나벌을 세운 뒤 빠른 속도로 농경문화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에게 목축업 대신 농업을 권장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삼국유사』와『삼국사기』에는 서나벌의 지배층이 농업을 권장하는 기사는 많아도, 목축업을 권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이 6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했는데 왕비 알영도 따라갔다. <농사짓기>와 <뽕나무 기르기>를 권장하고 독려하여 토지에서 얻는 이익을 다 이용하게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서기전 41년) 조
(기록대로라면 이 때 혁거세 거서간은 29세이고 알영 왕비는 25세였다. 자기 나라를 충분히 순회할 수 있는 나이이며,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알영 왕비의 나이는『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으나『삼국유사』에는 13세 - 만으로는 12세 - 에 왕비가 되었다고 하며,『삼국사기』에는 서기전 53년 - 혁거세왕 5년 - 에 왕비가 되었다고 나오므로 그녀가 서기전 65년(서기전 53 + 12년)에 태어났다고 추산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 거서간은 서기전 69년생이다). 이를 바탕으로 나이를 계산해 보면 65 - 41 = 24 이므로, 그녀는 만으로는 24세, 실제 나이로는 25세라는 것이 밝혀진다 : 조약돌)
“봄 정월에 영을 내렸다. ‘이제 창고는 비고 병기는 무디어 못쓰게 되어 있다. … 마땅히 담당자를 시켜서 <농사와 누에 치기를 권장하고>, 무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할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파사이사금 3년(서기 82년) 조
“가을 7월에 사자(使者 : 벼슬 이름 - 이재호의 주석) 열 명을 나누어 보내어 주주(州主)/군주(郡主)로서 공무를 게을리 하여 <논밭과 들을 많이 황폐케 한 자를 조사하여 강등 또는 파면토록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파사이사금 11년(서기 90년) 조
“봄 2월에 영을 내렸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식량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州郡)은 <제방을 수리하여 완전하게 하고, 논밭과 들을 널리 개간하라>.’ 또 영을 내렸다. ‘민간에서는 금은과 주옥의 사용을 금하라.’”
- 『삼국사기』「신라본기」일성이사금 11년(서기 144년) 조
“또 비로소 <보습(농기구. 쟁기나 따비의 술바닥에 박아 사용하는 쇳조각으로 된 삽 모양의 연장. 땅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데 사용한다 - 옮긴이)과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藏氷庫. 장빙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삼국유사』「기이」노례왕(유리이사금 : 조약돌) 조
(이상 < >는 조약돌)
기록대로라면 이들은 농경민족이지 유목민족이 아니며, 이는 오환족이 “기사(騎射-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물과 풀을 따라 방목(放牧)하니 일정한 거처가 없고 궁려(穹廬-이동식 천막. 게르)를 집으로 삼으며 (입구는) 모두 동쪽을 향한다. 낮에 금수(禽獸-날짐승과 길짐승)를 사냥해 고기를 먹고 락(酪-우유나 양유를 끓여만든 음료. 타락)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삼국지』「오환전」의 기록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여 내 가설이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박씨족은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 흰 말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거서간을 시조로 섬겼으며, 동옥저 군(君)에게 말을 선물로 받을 만큼 말을 좋아했고, 흰 색과 말은 몽골/시베리아의 유목민이 섬긴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조선반도로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큰 변함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기록(『삼국사기』의 기록과『삼국지』의 기록)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나는『삼국지』「오환전」의 기록과 다른 유목민을 연구한 학자의 말에 그 답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오환전」의 기록을 보자. 거기에는 ‘유목만 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던 오환족이 간단한 농사를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풍속은 새와 짐승이 자식을 배고 기르는 것을 식별하여 <사계절에 때맞추고 밭갈고 씨 뿌릴 때는 항상 포곡(布穀-뻐꾸기)의 울음소리를 살핀다.> 토지는 푸른 기장과 동장(東牆-?)에 적합한데, 동장은 쑥과 비슷하고 과실은 아욱(무궁화목 무궁화과의 여러해살이 풀 - 옮긴이)의 그것과 같으며 10월에 열매가 익는다. 흰 술을 빚으나 누룩은 알지 못한다. 쌀은 항상 중국에 의존한다.”
-『삼국지』「오환전」
유목민족인 오환족이 농사를 지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유목제국’이란 유목민만이 만든 나라가 결코 아니다. 그런 유목제국은 존재한 적이 없고, 목농(牧農. 목축과 농업 - 옮긴이)복합국가(반농반목半農半牧국가 - 옮긴이)로서의 유목제국만이 역사상에 실재했다(주채혁 강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하 존칭 생략).” 다시말해서 유목민이 세운 나라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농사를 지으며 식량생산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외의 대다수는 유목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보호/감시했다는 얘기다. 우리가 유목민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 흉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이전 흉노의 장형고분(長形古墳)에서는 돌절구가, 기원전 2~1세기의 노인 울라 고분군 제 23호분에서는 농작물의 종자가 발견되었으며, 그 밖의 여러 흉노 고분에서도 여러 가지 낱알과 농구 및 농업 관련 대형 도기(陶器, 낟알 저장 용기)가 출토되었다.
문헌에도 그들의 농경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한서』「흉노전」에는 무제 후원(后元) 원년(元年, BC 88) 가을 흉노 지역에 몇 달 동안 비와 눈이 내려서 ”곡식이 영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같은 책「서역전」에도 소제(昭帝) 때 오손 공주가 상서에서 흉노가 차사(車師, 현 신강 투르판 일대)에 기병을 파견해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 기사를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흉노의 창고에 식량의 여분이 비축될 정도로 농경이 진전되었다. 이러한 진전은 흉노가 철기를 사용하면서 철제 농기구를 쓰기 시작한 것과 한으로부터 농경 기술과 농기구를 수입한 데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흉노 사회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유목민이라고 하여 일괄적으로 농경을 무시함으로써 농산품의 결핍으로 인해 결국 농경민과의 약탈전이 불가피하다는 교조적인 인식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농경의 경영에 따라 흉노 사회에서는 도시가 건설되어 정주 생활을 영위한 흔적도 남아 있다. 1960년까지 구소련과 몽골 고고학자들은 바이칼 호와 예니세이 강, 그리고 북몽골 일대에서 5개소(1개소는 구소련, 4개소는 몽골 내)의 도시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도시에는 성곽도 축조되고 농사를 지은 흔적도 있으며, 집 안에 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는 등 정착 생활의 일단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283~284쪽
흉노의 대 선배인 스키타이 족도 유목민과 정착민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전자는 후자를 다스리면서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곳으로만 돌아다녔다(물론 “유목민은 언제나 그들이 얻기 어려운 곡물과 다른 음식을 얻기 위해 정착민 이웃과의 무역이나 약탈에 의지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유목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늘 이동만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 지역의 목초지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들은 농부들이 윤작[輪作. 돌려짓기. 경작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땅은 놀리고, 다른 땅은 적극적으로 경작하고, 나머지 부분은 소극적으로 경작하는 방식으로 경영하는 농법農法이다. 이 농법에 따르면 놀리던 땅을 다시 경작할 수 있고, 경작한 땅을 놀릴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경작하던 땅을 소극적으로 경작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유럽 농부들은 땅 힘을 아끼고 수확량을 조절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다 - 조약돌]을 하듯 가까이 있는 주변 목초지를 번갈아 사용하며 살아갔다.” - 리처드 루드글리).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 옮긴이) 금으로 만든 네 가지의 물건 - <쟁기>, <멍에>, 도끼, 컵 - 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때까지 나라를 분할 통치하고 있던 세 형제는 서로 그 물건을 주우려고 했다. 그러나 금이 매우 뜨거울 때 손을 댄 두 형은 손가락을 데고 말았다. 그래서 막내 동생이 왕이 되었다.
이 전설의 의미는 스키타이족이 네 개의 부류 - 노동자, 농부, 유목민, 왕족 - 로 나누어진 데서 발견된다. 왕족 역시 유목민이었지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폭압적 통치를 받았다. … 헤로도투스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스키타이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한 종류는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았던 <농부 스키타이인>들로서, 이들은 그들의 후손들처럼 많은 곡식을 생산해서 유럽에 팔았다. 또 다른 종류는 유목 스키타이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농부가 그들의 신하였기 때문에 왕족으로 알려졌다. 유목민들은 수레를 타고 다니며 살았으며, 가축떼를 몰고 돈강, 볼가강, 우랄 아래쪽의 대평원 또는 더 멀리까지 나갔다. … (그들은 - 옮긴이) 가축을 먹일 꼴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 곳에 머물렀으며, 꼴이 바닥나면 다른 곳으로 옮겼다.”
- 에이메이 미셸
따라서, 오환족이 - 유목을 하면서도 - 때에 따라 농사를 짓기도 했다는 ‘모순된 기록’은 오환족 사회가 농민들의 사회와 유목민들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었고, 전자가 후자의 지배를 받으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오환족에게는 농경(이 경우에는 간단한 밭농사)이 ‘낯선 일’이 아니었고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만약 오환족이 초원에서 살다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예컨대 한/조선반도)으로 옮겨왔다면, 그들은 가축을 기르는 대신 농사를 지음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박씨족이 서나벌을 세운 뒤 목축업 대신 농업을 권장하게 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박씨족(오환족)은 그 때문에 자신들의 고향인 몽골초원을 떠나 망명지인 마한 땅(한/조선반도)에 오자 말과 개를 뺀 다른 짐승들을 기르지 않게 되었고(말은 자신들의 전력戰力을 뒷받침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계속 키워야 했을 것이다), 대신 선주민(마한인, 원 한국인, 위만조선의 유민)들에게서 벼농사의 이점을 배워 서서히 농경민족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삼국지』「오환전」에 나오는 ‘오환족이 유목을 주로 하지만 농사도 짓는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초기 기사를 뒷받침 해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바이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주채혁, 혜안, 서기 2007년)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동아출판사, 서기 1989년)
-『고대문명교류사』(정수일, 사계절, 서기 2001년)
-『바바리안』(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우혜령 옮김, 뜨인돌, 서기 2004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