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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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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
2007.04
4세기 진서의 백제왕 출현기록 3개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129 2007.04.03 08:43:21 (*.68.174.111) 백제사0 Comments 763 Views 53 Voted / 0 Devoted
3, 4세기 서진과 동진(서진 265〜316, 동진 317〜418)의 역사를 기록한 晋書(7세기 당나라 때 편찬)는 동이전에 한반도 남부를 기록하고 있는데 한전만 있고 백제전은 없다. 중국사서 동이전에 백제전이 나오는 것은 5세기 이후다. 3세기에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이 있고 그의 통치자로서 마한왕과 진한왕이 등장하는데 비하여, 4세기에는 삼한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는 백제왕으로 바뀐다. 또 마한왕이나 진한왕은 책봉을 요구하지 않는데 비하여 백제왕은 책봉을 요구한다. 백제왕은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백제왕의 출현시기는 4세기 후반 한반도에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되어 대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북부를 대표하던 존재는 고구려왕으로 뚜렸하고 책봉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니, 진서에 아예 고구려전이 없다. 서진이나 동진은 나약한 왕조로 고구려는 이들을 무시했을 것이다. 중국왕조가 외역전을 두고 그들의 사신방문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이유는 왕조의 자긍심을 높여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에 역행하던 나라였을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 남부에서는 북부와의 전쟁 중에 남부의 대표권을 두고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4세기에는 백제왕만 나타나 경쟁하는데, 5세기가 되면 왜왕이 나타나 백제왕과 외교적으로 경쟁한다. 그러다 6세기가 되면 왜왕은 사라지고 백제왕만 남아 한반도 남부를 대표한다. 한반도 남부를 대표하던 세력의 하나로 신라가 등장하는 것은 6세기 梁書부터이다.
晋書 帝紀에는 다음처럼 4세기 후반에 백제왕이 세 번 나온다. 백제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두 번이고 안 나오는 것이 한 번인데, 이 중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번만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쓸 때 중국사서를 모두 확인하였으므로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름이 안 나오는 한개의 기록보다는 이름이 나오는 두개의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김부식이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개의 기록만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은 그가 가진 구 삼국사에 이것만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본기 태조 69년조의 마한기록은 구 삼국사에 없었다는데 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썼느냐고 물을 수 있다. 구 삼국사에 마한만 안 나왔지 고구려가 예맥 등과 연합하여 후한과 전쟁한 태조 69년 기록 자체는 있었던 것이다. 김부식은 중국사서에 해당하는 기록이 있는데 단지 마한이 빠져 있길래 더 정확하게 쓴다고 해서 마한을 첨가한 것이리라.
[1]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시기
첫 번째 백제왕: 함안 2년(372, 근초고27) 春 正月 辛丑,百濟 林邑 王 各遣使貢方物。
봄 정월에 백제왕과 임읍왕(동남아 국가)이 각기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말이다. 그런데 백제왕의 이름이 없다. 세 번의 백제왕 기록 중에 이 기록만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 이름 없는 백제왕은 삼국사기의 근초고왕이 틀림없다. 1월에 사신을 보냈는데 역시 1월에 백제 사신이 동진의 수도에 도착함으로부터 당시 해운력을 이용한 통교거리가 한 달 이내임을 알 수 있다.
372년은 그 전해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죽는 등 이 시기는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한 직후다. 그리고 근초고왕 21년(366)은 신라에 친선사신을 보내면서 18년의 기록 공백을 깨고 출현하여 근초고왕이 실권을 행사하는 시점이다. 나는 근초고왕이 조정좌평 진정이 죽자 366년에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의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격파하자 백제왕의 자격으로 동진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3세기에는 마한왕과 진한왕이 서진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이들이 백제왕을 칭하지는 않았다. 372년의 이 시점에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백제왕: 함안 2년(372, 근초고27) 六月,遣使拜 百濟王 余句 為 鎮東將軍 領 樂浪太守。
근초고왕이 사신을 파견한지 5개월 후에 동진은 사신을 백제에 파견하여 백제왕 여구에게 진동장군을 내리고 낙랑태수의 직을 주었다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근초고왕이 1월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직을 요구하여 동진이 5개월 후에 사신을 보내 답례를 한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동진의 사신이 백제에 오는데 한 달이면 충분하며, 삼국사기에는 동진의 사신도착 기록이나 책봉기록이 없다.
이는 백제사 최초의 책봉기록으로서 백제본기에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지만 없고, 김부식도 이를 확인하였을 것이다. 백제본기 최초의 책봉기록은 진왕의 백제가 왜국으로 떠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리적인데, 삼국사기를 보면 역시 전지왕이어서 당시 시대상황과 일치한다.
나는 근초고왕의 사신파견에 위협을 느낀 백제 진왕 여구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직위를 요구하자, 동진은 어쩔 수 없이 진왕 여구를 진동장군에 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진왕은 여러 소국을 거느리고 스스로 소천자 행세를 하고 있어서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근초고왕이 책봉을 받지 못하자 그 아들인 근구수왕이 재위 5년째 되던 379년(태원 4년)에 다시 동진에 사신을 보내려 했지만 폭풍우로 사신이 가지 못한다. 근구수왕이 사신을 동진에 보내려고 하였던 것으로부터 그 역시 자립위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사신을 보내면서 백제왕을 칭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침류왕과 진사왕의 시기
384년(태원 9년)에 근구수왕이 죽고 침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또 동진에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동진에서 마라난타라는 승이 온다. 하지만 이 기록은 동진의 사서에 없다. 남쪽으로 쫓겨가 어렵게 명백을 유지하던 중원왕조가 조금이라도 대단하게 보이고자 자잘한 외국사신의 기록도 다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의 권위를 충분히 높여줄 수 있는, 고구려를 격파하고 동아시아 최대 세력가가 된 백제왕의 사신 기록을 사서에 기록할 수 없었던 데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침류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내며 백제왕을 칭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 역시 자립위왕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드물게도 침류왕에 대하여 왕모기록을 남기고 있다.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근초고왕은 소국출신의 왕후를 세우는 정통적인 방식으로 자립위왕 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근구수왕 이후에는 전통적 방식으로 자립위왕하였는지, 아니면 그런 것 없이 백제왕을 칭하는 방식의 자립위왕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침류왕조는 어머니를 왕후가 아니라 '부인'으로 칭하고 있다. 5세기 일본서기를 보면 왕후를 세워도 그가 낳은 아들이 반드시 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지만 신라출신으로 세운 왕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부인"이 낳은 아들로 생각된다. 침류왕 역시 근구수왕의 왕후가 아니라 "부인"이 낳은 아들일 것이다. 물론 일본서기를 보면 왕비에는 후, 비, 부인의 3단계가 있으나 모두 자립위왕을 할 수는 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385년 11월 침류왕이 재위 1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5개월만인 바로 다음 해 4월, 3번째 백제왕이 나타난다.
세 번째 백제왕: 태원 11년 (386,진사2) 여름 4월, 以 百濟王世子 餘暉 為 使持節都督 鎮東將軍 百濟王。
여기도 언뜻 생각하면 침류왕이 1월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직을 요구하여 동진이 5개월 후에 사신을 보내 침류왕 여휘에게 답례를 한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동진의 사신이 도착하였을 때 침류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한성백제는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즉위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 진사왕과 무관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왜 급히 진왕 여휘가 사신을 보내야 했는가는 14년 전 진왕 여구가 급히 사신을 보낸 이유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바로 위에 있다. 여휘가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직 자립위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판국에 한성백제 왕(침류왕)이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하며 동진에 사신을 보냈으니 그로서는 당황할만하다.
392년에 진사왕 역시 실각한다. 진왕의 계보도 390년에 여휘에서 응신으로 바뀌었다. 390년에 진사왕이 실각한 직접적인 이유를 관미성 함락 등 고구려 방어의 실패에서 찾기도 하나, 진왕기록인 일본서기 응신조는 이에 대하여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 3년(392), 이 해에 백제 진사왕이 서서(立之)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녜, 우전실대숙녜, 석천숙녜, 목토숙녜를 보내 그 무례함을 나무랐다.
진사왕이 서서, 즉 자립위왕하여(백제왕을 칭하여) 이에 항의하였다는 뜻이다. 백제 진왕의 입장으로 자신이 백제왕인데 아무리 고구려를 방어하는 주체라고 하나, 다른 사람이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의 貴國天皇의 천황은 일본서기 쓸 때 편자들이 만든 것이고, 귀국은 마땅히 바꿀 단어가 없어 곤란할 때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 貴國天皇에 대한 일본서기 원사료 표현은 아마 百濟王이었을 것이다.
396년에 고구려에게 패하여 왜국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응신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 백제왕을 칭했을 것이다. 그는 재위 2년째에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기 때문에 백제왕세자가 아니고 백제왕을 칭했을 것이다. 응신의 성씨도 여구나 여휘와 마찬가지로 여(부여)씨일 것이다.
만일 여휘조가 남아있다면 거기에는 응신조와 마찬가지로 침류왕의 실각원인이 다음처럼 써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성의 침류왕이 서서 백제의 왕에게 무례하였다. xx숙녜, oo숙녜 등을 보내 그 무례함을 나무랐다.”
침류왕의 실각원인에 대하여 요서에서 전투하다 전사했다는 등, 왜국에 가 있었다는 등, 별별 가설들을 다 보았는데 당시 상황설명은 물론이고, 그 내용이 왜 삼국사기에 안 오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삼한백제 영역이던 영산강유역과 요서지역이 한성백제의 통치하에 들어온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 말 동성왕 때이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숙녜라는 명칭이 발굴될 것으로 예측하는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 금강유역이고 다음이 영산강유역이다. 일본서기가 백제왕력을 근초고왕부터 기록한 이유는 1-2세기 3루왕 시대 이후 그때부터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15년 동진에 의한 전지왕의 책봉기록이 백제본기 최초의 책봉기록으로 宋書등 중국사서와 일치하는데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중국사서는 그 백제왕의 이름을 餘映이라 하여 성과 이름을 적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이를 생략하고 지위만 적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梁書名映이라고 하여 김부식이 양서와 대조해본 것이 확실하지만 그는 구 삼국사를 더 존중해 이를 따랐다고 보인다. 즉 본래 구 삼국사에는 전지왕의 책봉기록만 있고 성이 없었던 것이다.
여신을 앞세운 부여씨가 한성백제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 한반도 남해안에서 철갑으로 무장한 수만의 보기군단을 동원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패한 407년(영락 17년 1월에 전투 발생)이다. 또한 이들은 과거 여구-여휘로 이어지는 삼한백제 세력으로 동진에 사신을 보내 백제왕의 지위를 받아낸 경험이 있다. 이들이 한성백제를 장악하고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백제의 대표권을 얻어낸 것이다.
이 백제왕의 출현시기는 4세기 후반 한반도에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되어 대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북부를 대표하던 존재는 고구려왕으로 뚜렸하고 책봉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니, 진서에 아예 고구려전이 없다. 서진이나 동진은 나약한 왕조로 고구려는 이들을 무시했을 것이다. 중국왕조가 외역전을 두고 그들의 사신방문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이유는 왕조의 자긍심을 높여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에 역행하던 나라였을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 남부에서는 북부와의 전쟁 중에 남부의 대표권을 두고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4세기에는 백제왕만 나타나 경쟁하는데, 5세기가 되면 왜왕이 나타나 백제왕과 외교적으로 경쟁한다. 그러다 6세기가 되면 왜왕은 사라지고 백제왕만 남아 한반도 남부를 대표한다. 한반도 남부를 대표하던 세력의 하나로 신라가 등장하는 것은 6세기 梁書부터이다.
晋書 帝紀에는 다음처럼 4세기 후반에 백제왕이 세 번 나온다. 백제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두 번이고 안 나오는 것이 한 번인데, 이 중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번만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쓸 때 중국사서를 모두 확인하였으므로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름이 안 나오는 한개의 기록보다는 이름이 나오는 두개의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김부식이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한 개의 기록만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은 그가 가진 구 삼국사에 이것만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본기 태조 69년조의 마한기록은 구 삼국사에 없었다는데 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썼느냐고 물을 수 있다. 구 삼국사에 마한만 안 나왔지 고구려가 예맥 등과 연합하여 후한과 전쟁한 태조 69년 기록 자체는 있었던 것이다. 김부식은 중국사서에 해당하는 기록이 있는데 단지 마한이 빠져 있길래 더 정확하게 쓴다고 해서 마한을 첨가한 것이리라.
[1]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시기
첫 번째 백제왕: 함안 2년(372, 근초고27) 春 正月 辛丑,百濟 林邑 王 各遣使貢方物。
봄 정월에 백제왕과 임읍왕(동남아 국가)이 각기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말이다. 그런데 백제왕의 이름이 없다. 세 번의 백제왕 기록 중에 이 기록만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 이름 없는 백제왕은 삼국사기의 근초고왕이 틀림없다. 1월에 사신을 보냈는데 역시 1월에 백제 사신이 동진의 수도에 도착함으로부터 당시 해운력을 이용한 통교거리가 한 달 이내임을 알 수 있다.
372년은 그 전해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죽는 등 이 시기는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한 직후다. 그리고 근초고왕 21년(366)은 신라에 친선사신을 보내면서 18년의 기록 공백을 깨고 출현하여 근초고왕이 실권을 행사하는 시점이다. 나는 근초고왕이 조정좌평 진정이 죽자 366년에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의 연합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격파하자 백제왕의 자격으로 동진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3세기에는 마한왕과 진한왕이 서진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이들이 백제왕을 칭하지는 않았다. 372년의 이 시점에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백제왕: 함안 2년(372, 근초고27) 六月,遣使拜 百濟王 余句 為 鎮東將軍 領 樂浪太守。
근초고왕이 사신을 파견한지 5개월 후에 동진은 사신을 백제에 파견하여 백제왕 여구에게 진동장군을 내리고 낙랑태수의 직을 주었다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근초고왕이 1월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직을 요구하여 동진이 5개월 후에 사신을 보내 답례를 한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동진의 사신이 백제에 오는데 한 달이면 충분하며, 삼국사기에는 동진의 사신도착 기록이나 책봉기록이 없다.
이는 백제사 최초의 책봉기록으로서 백제본기에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지만 없고, 김부식도 이를 확인하였을 것이다. 백제본기 최초의 책봉기록은 진왕의 백제가 왜국으로 떠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리적인데, 삼국사기를 보면 역시 전지왕이어서 당시 시대상황과 일치한다.
나는 근초고왕의 사신파견에 위협을 느낀 백제 진왕 여구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직위를 요구하자, 동진은 어쩔 수 없이 진왕 여구를 진동장군에 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 진왕은 여러 소국을 거느리고 스스로 소천자 행세를 하고 있어서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근초고왕이 책봉을 받지 못하자 그 아들인 근구수왕이 재위 5년째 되던 379년(태원 4년)에 다시 동진에 사신을 보내려 했지만 폭풍우로 사신이 가지 못한다. 근구수왕이 사신을 동진에 보내려고 하였던 것으로부터 그 역시 자립위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사신을 보내면서 백제왕을 칭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침류왕과 진사왕의 시기
384년(태원 9년)에 근구수왕이 죽고 침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또 동진에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동진에서 마라난타라는 승이 온다. 하지만 이 기록은 동진의 사서에 없다. 남쪽으로 쫓겨가 어렵게 명백을 유지하던 중원왕조가 조금이라도 대단하게 보이고자 자잘한 외국사신의 기록도 다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의 권위를 충분히 높여줄 수 있는, 고구려를 격파하고 동아시아 최대 세력가가 된 백제왕의 사신 기록을 사서에 기록할 수 없었던 데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침류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내며 백제왕을 칭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 역시 자립위왕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드물게도 침류왕에 대하여 왕모기록을 남기고 있다.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근초고왕은 소국출신의 왕후를 세우는 정통적인 방식으로 자립위왕 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근구수왕 이후에는 전통적 방식으로 자립위왕하였는지, 아니면 그런 것 없이 백제왕을 칭하는 방식의 자립위왕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침류왕조는 어머니를 왕후가 아니라 '부인'으로 칭하고 있다. 5세기 일본서기를 보면 왕후를 세워도 그가 낳은 아들이 반드시 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지만 신라출신으로 세운 왕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부인"이 낳은 아들로 생각된다. 침류왕 역시 근구수왕의 왕후가 아니라 "부인"이 낳은 아들일 것이다. 물론 일본서기를 보면 왕비에는 후, 비, 부인의 3단계가 있으나 모두 자립위왕을 할 수는 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385년 11월 침류왕이 재위 1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5개월만인 바로 다음 해 4월, 3번째 백제왕이 나타난다.
세 번째 백제왕: 태원 11년 (386,진사2) 여름 4월, 以 百濟王世子 餘暉 為 使持節都督 鎮東將軍 百濟王。
여기도 언뜻 생각하면 침류왕이 1월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직을 요구하여 동진이 5개월 후에 사신을 보내 침류왕 여휘에게 답례를 한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동진의 사신이 도착하였을 때 침류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한성백제는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이 즉위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 진사왕과 무관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왜 급히 진왕 여휘가 사신을 보내야 했는가는 14년 전 진왕 여구가 급히 사신을 보낸 이유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바로 위에 있다. 여휘가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아직 자립위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판국에 한성백제 왕(침류왕)이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하며 동진에 사신을 보냈으니 그로서는 당황할만하다.
392년에 진사왕 역시 실각한다. 진왕의 계보도 390년에 여휘에서 응신으로 바뀌었다. 390년에 진사왕이 실각한 직접적인 이유를 관미성 함락 등 고구려 방어의 실패에서 찾기도 하나, 진왕기록인 일본서기 응신조는 이에 대하여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 3년(392), 이 해에 백제 진사왕이 서서(立之) 귀국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녜, 우전실대숙녜, 석천숙녜, 목토숙녜를 보내 그 무례함을 나무랐다.
진사왕이 서서, 즉 자립위왕하여(백제왕을 칭하여) 이에 항의하였다는 뜻이다. 백제 진왕의 입장으로 자신이 백제왕인데 아무리 고구려를 방어하는 주체라고 하나, 다른 사람이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의 貴國天皇의 천황은 일본서기 쓸 때 편자들이 만든 것이고, 귀국은 마땅히 바꿀 단어가 없어 곤란할 때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 貴國天皇에 대한 일본서기 원사료 표현은 아마 百濟王이었을 것이다.
396년에 고구려에게 패하여 왜국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응신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진동장군 백제왕을 칭했을 것이다. 그는 재위 2년째에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기 때문에 백제왕세자가 아니고 백제왕을 칭했을 것이다. 응신의 성씨도 여구나 여휘와 마찬가지로 여(부여)씨일 것이다.
만일 여휘조가 남아있다면 거기에는 응신조와 마찬가지로 침류왕의 실각원인이 다음처럼 써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성의 침류왕이 서서 백제의 왕에게 무례하였다. xx숙녜, oo숙녜 등을 보내 그 무례함을 나무랐다.”
침류왕의 실각원인에 대하여 요서에서 전투하다 전사했다는 등, 왜국에 가 있었다는 등, 별별 가설들을 다 보았는데 당시 상황설명은 물론이고, 그 내용이 왜 삼국사기에 안 오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삼한백제 영역이던 영산강유역과 요서지역이 한성백제의 통치하에 들어온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 말 동성왕 때이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숙녜라는 명칭이 발굴될 것으로 예측하는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 금강유역이고 다음이 영산강유역이다. 일본서기가 백제왕력을 근초고왕부터 기록한 이유는 1-2세기 3루왕 시대 이후 그때부터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15년 동진에 의한 전지왕의 책봉기록이 백제본기 최초의 책봉기록으로 宋書등 중국사서와 일치하는데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중국사서는 그 백제왕의 이름을 餘映이라 하여 성과 이름을 적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이를 생략하고 지위만 적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梁書名映이라고 하여 김부식이 양서와 대조해본 것이 확실하지만 그는 구 삼국사를 더 존중해 이를 따랐다고 보인다. 즉 본래 구 삼국사에는 전지왕의 책봉기록만 있고 성이 없었던 것이다.
여신을 앞세운 부여씨가 한성백제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 한반도 남해안에서 철갑으로 무장한 수만의 보기군단을 동원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패한 407년(영락 17년 1월에 전투 발생)이다. 또한 이들은 과거 여구-여휘로 이어지는 삼한백제 세력으로 동진에 사신을 보내 백제왕의 지위를 받아낸 경험이 있다. 이들이 한성백제를 장악하고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백제의 대표권을 얻어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