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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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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빈(九賓) 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 고개라고 한다.”  

: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의 전설(이하 구빈마을 전설)

이 전설은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1. 고조선 사람들은 ‘박달’족으로도 불리웠다. 이는 러시아의 우리 동포들이 ‘고려인’으로 불리거나, 중국의 우리 동포들이 ‘조선족’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환웅족(환웅천왕이 이끌고 온 3000명)이 세운 나라의 이름은 배달(‘박달’과 발음이 같으며 원시 알타이 말인 ‘바타르’ - ‘영웅’이라는 뜻 - 와도 발음이 비슷하다)이었고 그 중심지가 신시(神市)였다는 주장도 진지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신시’는 원래 ‘신불神巿’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중에 다른 글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2. 고조선 사람들은 한/조선반도 밖에서 들어왔다. 그것도 서북쪽에서 쳐들어왔다. 당시의 고고학 유물을 훑어보면 평안도 남쪽에 있는 세력은 평안도와 비슷한 신석기 부족문화라 평안도를 굴복시킬 수가 없다. 평안도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평안도를 굴복시킬 수 있을만한 무력과 생산력을 갖춘 세력은 평안도 서북쪽에 있는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의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옥을 다듬고 신전을 세우고 신상을 만들고 청동기를 만들 정도로 발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선학의 설명을 들어보자.        

“(중국의 - 옮긴이) 북동부(만주 - 옮긴이)에서 우연히 발견된 옥기(玉器)는 고고학자들이 독창적인 문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단서가 되었다. 이 문화의 존재는 B.C. 3800년에서 2700년 사이에 내몽골(남南 몽골 - 옮긴이) 지방과 랴오닝성(요령성 - 옮긴이)에서 증명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홍산(紅山) 문화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1938년에 일본인이 발견한 유적지이다. … 이 지역의 묘지에서는 B.C.5000년경에 제작되기 시작한 옥기들이 출토되었다.”

“옥기의 정확한 기능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품 이상으로,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고고학자들은 1981년에 실시된 랴오닝성의 둥산쭈이(東山嘴. 동산취 - 옮긴이)와 뉴허량(牛河梁. 우하량 - 옮긴이)의 유적지 발굴작업에서도 이렇게 추론할 수 있었다. 이 두 곳에서는 매우 독특한 유적, 곧 사당이라고 생각되는 복잡한 건축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건축물은 테라코타의 원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석조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원기둥들과 함께 흙으로 빚은 여신의 대형 머리상이 한 점 발견되었다.”

- 이상 ‘코린 드벤 - 프랑포르’의『고대 중국의 재발견』에서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은 길림성 서부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 윤내현, 고조선 연구, 106쪽

(고고학 유물과 유적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결과를 토대로 한 윤내현의 가설에 따르면, 요서지방의 가장 오래된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의 시작 연대는 서기전 2500년경이라고 한다.『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즉위 연대인 서기전 2333년보다 더 앞선다. 이 사실은 고조선이 세워진 곳이 한/조선반도가 아닌 요서나 남몽골 지역일 것이라는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 조약돌)  

따라서, 구빈마을 전설은 고고학 발굴결과(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를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학계는 이 전설을 고조선의 정복과 영토 확장을 증언하는 제 1 사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이 전설은 마고족(원原 한국인)의 전승이 아닌 박달족(고조선 사람들)의 전승이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우선 새 지배자인 박달족이 자신들과 싸운 세력인 마고족을 잘 대해줬다고 주장하고 있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고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왕림(枉臨)은 남이 자기 있는 곳으로 찾아옴을 높여 이르는 말인데 만약 항복한 마고족이 이 전승을 남겼다면 마고가 성으로 ‘귀환’했다고 하지 ‘왕림’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남(마고할미)’이 ‘자신들(박달족)’이 있는 쪽으로 찾아오는 걸 본 고조선 사람들이 전승을 남겼기 때문에 쓰여진 말이다.

4. 이 전설을 들어보면 고조선이 타 종족을 정복했을 때, 그 종족을 다 죽이거나 지도층을 제거하지 않고, 대신 그들을 존중함으로써 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고할미(마고할미는 마고족의 모신(母神)이다. ‘할미’라는 말은 원래 우리 옛말로 ‘큰 어미’라는 뜻이고, 한국과 조선(이북以北)에는 마고할미(제주도에서는 설문대 할망)가 하늘과 땅을 만들고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신령이 직접 항복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그 신을 모시는 무녀(또는 신녀神女)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한 사실을 이렇게 나타낸 게 아닌가 한다)와 그녀를 따르는 마고족의 “아홉 장수”가 항복한 뒤 처형당했다는 말이 없고, 마고할미를 받드는 믿음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구빈九賓이라는 말이 ‘임금이 우대하는 아홉  손님’이라는 뜻이고, 거기에는 지배층인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고(孤)/경(卿)/대부(大夫)/사(士)가 포함된다는 사실도 고조선이 항복한 마고족의 지배층을 ‘임금이 우대하고 대접할 만한 손님’으로 여겼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고조선의 壇君은 각 지역의 渠帥國(제후국 - 옮긴이)을 渠帥(제후 - 옮긴이)에게 위임하여 간접으로 통치하는 지방분권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윤내현 교수(이하 존칭 생략)의 설명은 합리적이라고 본다. 윤내현의 가설과 내 가설이 다른 점은 윤내현은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의 넓은 강역을 차지한 국가”였다고 주장하나 나는 그와는 반대로 고조선은 요령성과 남몽골 초원, 길림성 서부만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고 보는 점이고(물론 구빈마을의 전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중에 평안도로 영토를 확장하기는 한다), 윤내현은 “고조선이 이러한 지방분권의 통치체제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렀던 첫 번째 국가로서 넓은 영역을 통치해 본 경험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통치체제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나 나는 고조선 이전에 세워진 나라(환웅천왕의 신시. 고고학 유적으로는 홍산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국가를 세워 다스린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지방분권제(정복당한 상대방의 종교나 문화, 지배체제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체제)를 선택한 까닭은 고조선의 땅이 너무 넓고 지배층(단군족)의 수는 적어서 이들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단군족이 관용을 베푸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란[: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도 자신이 정복한 나라들 -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뤼디아, 미스르[:영어 이름 이집트], 인더스 지역의 작은 나라들 - 의 종교와 풍습, 행정 제도, 상업을 그대로 보호하고 그 관습에 따름으로써 피정복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들이 이랬던 까닭은 이것이 “이민족 지배자로서 정복한 땅을 가장 원만하게 다스리는 방법(마티아스 운터부르크)”이었기 때문이었다)      

5. 단군이 다스리는 고조선(박달족의 나라)은 남신(男神)이 다스리는 부권(父權) 사회였다. 단군은 -『삼국유사』에서도 증언하듯이 - 환웅천왕과 웅녀(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천손(천제天帝 환인의 손자니까)’으로 받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고조선에게 마고족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여신(女神)을 섬기던 원(原) 한국인의 모권(母權) 사회(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회는 농사짓고 고기잡던 사회였던 듯하다)가 고조선인(한국/조선인)의 부권 사회(요령성과 길림성에서 나온 수많은 짐승 뼈와 마구馬具/마차 부품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회는 농사를 지었지만, 목축도 중요시했던 반농반목半農半牧 사회였던 듯하다)에게 굴복하고 고조선의 일부가 된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국가가 출현하기 전 각 지역에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씨족들은 그들 나름의 수호신을 정점으로 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각 지역의 정치세력을 집합하여 출현한 고대국가는 이러한 씨족들이 공동체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각 지역 씨족의 신들을 통합하는 종교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의 계보가 형성되었는데, 그 나라에서 가장 강한 지배씨족의 수호신이 최고신이 되고 다른 신들은 그 아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甲骨文의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잘 전해 주고 있다.”는 윤내현의 연구결과를 인정한다면, 이후 마고족은 고조선의 백성이 되었으되 마고할미(이하 마고)를 받드는 믿음 자체는 계속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며, 마고는 고조선의 하위(下位) 신이 되었을 것이다.  

6. 이 전설에서 묘사하는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서기전 2333년 ‘이후’지, 그 ‘이전’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은 박달족을 이끌고 쳐들어 온 군주가 ‘환웅’이 아닌 ‘단군’이기 때문이며, 요서에 하가점 하층문화가 생긴 것이 서기전 2500년 이후이지 그 이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더 따뜻하고 기름진 땅’을 찾아 정복전쟁을 펼치던 중 동남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며, 그곳에서 마고족(원한국인)과 부딪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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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 원(原) 한국인에 대하여

“BC 3세기는 중국대륙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어서 북중국에서 만주로의 수많은 이주민이 발생한 시점이다. 위만에 의한 기씨조선(한씨조선)의 정권 장악은 그 결말이다. 秦(진나라 - 옮긴이)이 멸망하고 漢(한나라 - 옮긴이)이 성립할 때 역시 만주 쪽으로의 더 많은 이주민이 생기게 된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만주에 수많은 이주민이 들어오자 그 연쇄반응으로 만주인(고조선인 : 현 한국인의 주류)이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만주인이 한반도로 대규모로 이주하자 다시 연쇄반응이 일어나 한반도인(원原 한국인 - 옮긴이)이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내가 보는 일본에 야요이문화가 시작되는 배경이다. 즉, 일본 야요이문화를 개시한 주인공은 한반도 원주민이다. 반면에 한국인의 주류는 한반도 원주민이 아니고 원주민을 정복하고 들어온 고조선인(마한, 변한, 진한, 신라, 백제, 가야 등)이다.”

- 김상, [삼한사의 재조명],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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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삼한사의 재조명』(김상, 북스힐, 서기 2004년)

-『한겨레』

- 『고조선 연구』(윤내현, 일지사, 서기 1994년)

-『임페리움 : 제국 - 권력의 오만과 몰락』(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 박종대 옮김, 말글빛냄, 서기 2005년)

-『고대 중국의 재발견』(코린 드벤 - 프랑포르 지음, 김주경 옮김, 시공사, 서기 2000년)

댓글 '1'

흥무대왕

2021.10.08 15:30:03
*.80.248.239

잘 읽었습니다.
고조선인이 원한국인을 축출했을까요, 융합했을까요?
고고학은 우리에게 무얼 알려주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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