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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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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
2007.03
고구려유민 고질 묘지명 소개와 조선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111 2007.03.21 18:49:24 (*.232.248.181) 고구려사0 Comments 785 Views 61 Voted / 0 Devoted
고구려 유민인 고질의 묘비명이 중국에서 발견되어 소장되어 있는 것을 연합뉴스의 김태식 기자가 신문에 소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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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삼 교수 소개, 고자(高慈)의 아버지,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백석대 중국어학부 민경삼 교수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 신안셴(新安縣) 톄먼전(鐵門鎭)에 소재한 고대 묘지명 컬렉션인 천당지재(千唐誌齋)에 고구려 유민 고질(高質. 626-697)의 묘지명이 수장돼 있음을 최근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묘지명의 주인공 고질은 종래 한국학계에서도 뤄양 출토 묘지명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 665-697)의 아버지다.
민 교수는 고질의 묘지명이 2006년 6월 중국 삼진출판사(三秦出版社)에서 발간한 '전당문보유(全唐文補遺)ㆍ천당지재장지특집(千唐志齋藏志特輯)'이라는 책자에 전문이 수록됨으로써 공개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묘지명 탁본과 출토지, 그리고 크기 등에 관한 서지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천당지재라는 컬렉션은 고자(高慈)ㆍ고진(高震)ㆍ고현(高玄)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 묘지명을 수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고질(高質) 묘지명은 1990년대 이후에 출토돼 천당지재에 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민 교수는 말했다.
고자(高慈)의 부친은 그동안 '고문(高文)'이라고 알려졌있었으나 이번 묘지명을 통해 본명이 고질(高質)이며 자(字)를 '성문(性文)'이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 교수는 고질의 묘지명이 그의 아들 고자(高慈)의 묘지명보다 500여 글자나 많은 1천700여 글자에 달하는 데다 고질(高質) 집안 내력과 두 부자(父子)의 활약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묘지명에 의하면 고질(高質)은 72세에 아들 고자(高慈)와 함께 만세(萬歲)ㆍ통천(通天) 2년(697) 5월23일에 마미성(磨米城) 전투에서 전사하고, 성력(聖曆) 3년(700) 12월17일에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이라는 곳의 언덕에 묻혔다. 이는 고자(高慈) 묘지명의 기술과 일치한다.
하지만 고질의 묘지명은 찬자(撰者)로 당대(唐代) 저명한 문장가인 위승경(韋承慶), 서자(書者)를 당서(唐書)에 열전이 수록된 유종일(劉從一)로 기록했다. 고자 묘지명에는 비문 찬자와 서자가 보이지 않는다.
민 교수는 고질-고자 부자 묘지명이 내용과 문체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으로 미뤄 찬(撰)하고 서(書)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고자(高慈) 묘지명 또한 동일한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고질 묘지명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이름이 질(質)이오, 자(字)는 성문(性文)이니 요동(遼東) 조선(朝鮮) 사람이다. 19대조는 고밀(高密)이니 후한(後漢) 말에 연군(燕軍. 모용외 군대)을 격파해 본국(고구려)을 보존하는 데 공로가 있어 왕(王)에 봉해졌으나 세 번이나 거듭 사양하면서 받지 않고 고씨(高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증조(曾祖)인 고전(高前)은 본번(本蕃. 고구려)의 삼품(三品)으로서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등용되었으며, 조부인 고식(고式)은 본번의 이품(二品)인 막리지(莫離支)로 혼자서 국정과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았다.
아버지 고량(高量)은 삼품으로 책성도독(柵城都督)이자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상(大相)에 등용되었다.…공(고질)은 본번의 삼품으로 위두대형과 대장군에 등용되었다.…공은 난리에 살고자 하지 않았으나 기미를 살펴 일어나…여러 형제를 거느리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성문(性文. 고질)은 (중국에 들어와) 고구려 부녀 세 사람과 성과 해자를 굳게 지키면서 적과 힘겹게 싸웠다.…적의 흉악함은 날로 더해졌으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다.…성은 고립되고 땅은 끊어졌으며, 병사는 다하고 화살은 소진되었다. 밤낮으로 적이 포위공격을 하니 병졸들이 따라서 함락되어 죽게 되었다. 포로가 되었으나 말과 형색은 늠름했다. 적의 흉악함과 위엄에 굴하지 않아 마침내 도륙을 당하게 되어 만세 통천 2년(697) 5월23일 마미성(磨米城)에서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성력 3년(700) 12월17일에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 언덕에 묻었다.…(묘지명은) 조의대부(朝議大夫)이자 행봉각사인(行鳳閣舍人)인 위승경(韋承慶)이 찬(撰)하고, 전우감문위장상(前右監門衛長上) 홍농(弘農) 유종일(劉從一)이 글씨를 썼다. 의주(宜州) 미원현(美原縣) 사람인 요처괴(姚處괴><壞에서 土 대신 王>)와 상지종(常智琮)과 유랑인(劉郞仁) 세 사람이 함께 글씨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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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보지 않아 불확실한데 흥미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구려사람을 조선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당나라 시기인 당시의 조선이란 고조선을 뜻한다. 고조선 -> (부여) ->고구려로 가는 중간에 부여가 있다. 따라서 부여는 고조선의 계승일 것이다.
한무제가 우거왕의 조선을 공격할 때 만주에는 부여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 부여가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우거왕의 위씨조선 이전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위만이 마한 땅으로 밀어내버렸다는, 그리고 무려 40대를 유지해온 기씨조선이 있었다. 40대를 이어오면 약 천년이다. 하지만 더 큰 관심은 이 위씨조선의 전신인 기씨조선이 아니라 부여의 전신이 뭐냐이다. 부여의 전신이 단군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조선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왜 조선이란 명칭을 부여가 아니라 위씨조선이 사용하였을까? 부여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조선은 한자어로서, 중원국가가 만주의 동이족을 부르던 대표명칭이었는데 부여보다 위씨조선이 중원국가와 더 많은 접촉을 하였기에 부여 대신 위씨조선이 당시에 조선으로 불렸던 것으로 본다. 더 많은 접촉을 하려면 위씨조선이 부여보다 한나라로부터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때 항상 나오는 것이 한나라와 위씨조선의 경계를 지었다는 당시 패수의 위치다.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한 때 패수라 불렸던 강이 난하, 능하, 요하, 압록강, 대동강 등 여럿이라는 것이다. 내 기억에 청천강은 살수로는 불렸어도 패수로 불린 적은 없다.
조선과 한의 전면전 이전에 이미 둘은 패수를 경계로 공방전을 벌인다. 패수를 넘어 급습하고 다시 돌아가면 상대는 다시 패수를 넘어 보복하고 하는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사기를 읽고 있으면 마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라와 왜 관계 같다. 서로 이웃하고 있는 나라다.
전쟁능력이라는 것은 생산능력과 수송능력이다. 유목민족은 생산능력은 떨어져도 수송능력이 뛰어났고, 농경민족은 수송능력은 떨어져도 생산능력이 뛰어났다. 이 둘 사이의 경쟁은 생산능력과 수송능령의 경쟁이기도 하였는데, 농경민족이 기계를 이용하여 말을 넘어서는 수송능력을 갖추자 경쟁이 끝나버렸다.
BC 2세기에 흉노와의 전투를 살펴보면 한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할 수 있는(전투를 하고 돌아올 수 있는) 최대수송능력이 약 보름이었다고 한다. 약 천년 후 고구려를 침공하던 수나라와 당나라가 한과 크게 다른 점의 하나가 수송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씨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은 한에서 왕복 보름 이내의 거리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패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은 대동강이다. 그 이유는 평안남도에서 발굴되는 낙랑유적의 대부분이 대동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기도 하다. 위씨조선이 대동강 북쪽에 있었고, 대동강을 경계로 한나라와 접했다면 한나라는 황해도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수정설이 "패수=청천강"설이다. 이는 한나라가 평안북도나 압록강변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평북이나 압록강유역에서 한나라의 유적이 나온 적이 없다. 한나라의 유적은 압록강에서 수천리 떨어진 서안(장안)에서 나온다.
산동반도 동단은 황해를 통제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요충지로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수군기지가 있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수군은 여기에서 출발하였고, 훗날 장보고도 여기에 수군기지를 두었다. 그런데 산동반도에서 수군을 황해로 출발시킨다고 하면 발해만도 황해에 속하는 등 황해가 아주 넓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는 다행히 조선을 침공할 때 수군을 산동반도에서 발해로 출발시켰다고 하여 방향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만일 수군의 목표지점이 대동강유역이라면 발해로 출발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패수 문제는 다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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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삼 교수 소개, 고자(高慈)의 아버지,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백석대 중국어학부 민경삼 교수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 신안셴(新安縣) 톄먼전(鐵門鎭)에 소재한 고대 묘지명 컬렉션인 천당지재(千唐誌齋)에 고구려 유민 고질(高質. 626-697)의 묘지명이 수장돼 있음을 최근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묘지명의 주인공 고질은 종래 한국학계에서도 뤄양 출토 묘지명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 665-697)의 아버지다.
민 교수는 고질의 묘지명이 2006년 6월 중국 삼진출판사(三秦出版社)에서 발간한 '전당문보유(全唐文補遺)ㆍ천당지재장지특집(千唐志齋藏志特輯)'이라는 책자에 전문이 수록됨으로써 공개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묘지명 탁본과 출토지, 그리고 크기 등에 관한 서지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천당지재라는 컬렉션은 고자(高慈)ㆍ고진(高震)ㆍ고현(高玄)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 묘지명을 수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고질(高質) 묘지명은 1990년대 이후에 출토돼 천당지재에 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민 교수는 말했다.
고자(高慈)의 부친은 그동안 '고문(高文)'이라고 알려졌있었으나 이번 묘지명을 통해 본명이 고질(高質)이며 자(字)를 '성문(性文)'이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 교수는 고질의 묘지명이 그의 아들 고자(高慈)의 묘지명보다 500여 글자나 많은 1천700여 글자에 달하는 데다 고질(高質) 집안 내력과 두 부자(父子)의 활약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묘지명에 의하면 고질(高質)은 72세에 아들 고자(高慈)와 함께 만세(萬歲)ㆍ통천(通天) 2년(697) 5월23일에 마미성(磨米城) 전투에서 전사하고, 성력(聖曆) 3년(700) 12월17일에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이라는 곳의 언덕에 묻혔다. 이는 고자(高慈) 묘지명의 기술과 일치한다.
하지만 고질의 묘지명은 찬자(撰者)로 당대(唐代) 저명한 문장가인 위승경(韋承慶), 서자(書者)를 당서(唐書)에 열전이 수록된 유종일(劉從一)로 기록했다. 고자 묘지명에는 비문 찬자와 서자가 보이지 않는다.
민 교수는 고질-고자 부자 묘지명이 내용과 문체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으로 미뤄 찬(撰)하고 서(書)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는 고자(高慈) 묘지명 또한 동일한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고질 묘지명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이름이 질(質)이오, 자(字)는 성문(性文)이니 요동(遼東) 조선(朝鮮) 사람이다. 19대조는 고밀(高密)이니 후한(後漢) 말에 연군(燕軍. 모용외 군대)을 격파해 본국(고구려)을 보존하는 데 공로가 있어 왕(王)에 봉해졌으나 세 번이나 거듭 사양하면서 받지 않고 고씨(高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증조(曾祖)인 고전(高前)은 본번(本蕃. 고구려)의 삼품(三品)으로서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등용되었으며, 조부인 고식(고式)은 본번의 이품(二品)인 막리지(莫離支)로 혼자서 국정과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았다.
아버지 고량(高量)은 삼품으로 책성도독(柵城都督)이자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상(大相)에 등용되었다.…공(고질)은 본번의 삼품으로 위두대형과 대장군에 등용되었다.…공은 난리에 살고자 하지 않았으나 기미를 살펴 일어나…여러 형제를 거느리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성문(性文. 고질)은 (중국에 들어와) 고구려 부녀 세 사람과 성과 해자를 굳게 지키면서 적과 힘겹게 싸웠다.…적의 흉악함은 날로 더해졌으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다.…성은 고립되고 땅은 끊어졌으며, 병사는 다하고 화살은 소진되었다. 밤낮으로 적이 포위공격을 하니 병졸들이 따라서 함락되어 죽게 되었다. 포로가 되었으나 말과 형색은 늠름했다. 적의 흉악함과 위엄에 굴하지 않아 마침내 도륙을 당하게 되어 만세 통천 2년(697) 5월23일 마미성(磨米城)에서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성력 3년(700) 12월17일에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 언덕에 묻었다.…(묘지명은) 조의대부(朝議大夫)이자 행봉각사인(行鳳閣舍人)인 위승경(韋承慶)이 찬(撰)하고, 전우감문위장상(前右監門衛長上) 홍농(弘農) 유종일(劉從一)이 글씨를 썼다. 의주(宜州) 미원현(美原縣) 사람인 요처괴(姚處괴><壞에서 土 대신 王>)와 상지종(常智琮)과 유랑인(劉郞仁) 세 사람이 함께 글씨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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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보지 않아 불확실한데 흥미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고구려사람을 조선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당나라 시기인 당시의 조선이란 고조선을 뜻한다. 고조선 -> (부여) ->고구려로 가는 중간에 부여가 있다. 따라서 부여는 고조선의 계승일 것이다.
한무제가 우거왕의 조선을 공격할 때 만주에는 부여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 부여가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우거왕의 위씨조선 이전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위만이 마한 땅으로 밀어내버렸다는, 그리고 무려 40대를 유지해온 기씨조선이 있었다. 40대를 이어오면 약 천년이다. 하지만 더 큰 관심은 이 위씨조선의 전신인 기씨조선이 아니라 부여의 전신이 뭐냐이다. 부여의 전신이 단군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조선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왜 조선이란 명칭을 부여가 아니라 위씨조선이 사용하였을까? 부여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조선은 한자어로서, 중원국가가 만주의 동이족을 부르던 대표명칭이었는데 부여보다 위씨조선이 중원국가와 더 많은 접촉을 하였기에 부여 대신 위씨조선이 당시에 조선으로 불렸던 것으로 본다. 더 많은 접촉을 하려면 위씨조선이 부여보다 한나라로부터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때 항상 나오는 것이 한나라와 위씨조선의 경계를 지었다는 당시 패수의 위치다.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한 때 패수라 불렸던 강이 난하, 능하, 요하, 압록강, 대동강 등 여럿이라는 것이다. 내 기억에 청천강은 살수로는 불렸어도 패수로 불린 적은 없다.
조선과 한의 전면전 이전에 이미 둘은 패수를 경계로 공방전을 벌인다. 패수를 넘어 급습하고 다시 돌아가면 상대는 다시 패수를 넘어 보복하고 하는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사기를 읽고 있으면 마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라와 왜 관계 같다. 서로 이웃하고 있는 나라다.
전쟁능력이라는 것은 생산능력과 수송능력이다. 유목민족은 생산능력은 떨어져도 수송능력이 뛰어났고, 농경민족은 수송능력은 떨어져도 생산능력이 뛰어났다. 이 둘 사이의 경쟁은 생산능력과 수송능령의 경쟁이기도 하였는데, 농경민족이 기계를 이용하여 말을 넘어서는 수송능력을 갖추자 경쟁이 끝나버렸다.
BC 2세기에 흉노와의 전투를 살펴보면 한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할 수 있는(전투를 하고 돌아올 수 있는) 최대수송능력이 약 보름이었다고 한다. 약 천년 후 고구려를 침공하던 수나라와 당나라가 한과 크게 다른 점의 하나가 수송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씨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은 한에서 왕복 보름 이내의 거리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패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은 대동강이다. 그 이유는 평안남도에서 발굴되는 낙랑유적의 대부분이 대동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기도 하다. 위씨조선이 대동강 북쪽에 있었고, 대동강을 경계로 한나라와 접했다면 한나라는 황해도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수정설이 "패수=청천강"설이다. 이는 한나라가 평안북도나 압록강변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평북이나 압록강유역에서 한나라의 유적이 나온 적이 없다. 한나라의 유적은 압록강에서 수천리 떨어진 서안(장안)에서 나온다.
산동반도 동단은 황해를 통제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요충지로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수군기지가 있다.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수군은 여기에서 출발하였고, 훗날 장보고도 여기에 수군기지를 두었다. 그런데 산동반도에서 수군을 황해로 출발시킨다고 하면 발해만도 황해에 속하는 등 황해가 아주 넓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는 다행히 조선을 침공할 때 수군을 산동반도에서 발해로 출발시켰다고 하여 방향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만일 수군의 목표지점이 대동강유역이라면 발해로 출발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패수 문제는 다시 다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