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안사님은『네티즌 고대사』와『삼한사의 재조명』에서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 신라에 원군을 청하러 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신라 출신의 백제 관료였다고 주장하신 적이 있다. 당시 백제 땅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 문주왕이 즉위하기 전에는 좌평이었듯이 - 백제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어 이 가설이 진실성을 인정받지 못했는데, 최근 영산강백제의 영역이었던 나주에서 신라 유물들이 나와 문주왕이 집권한 서기 475년(서기 5세기)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계속 신라계 사람들이 백제 땅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문제의 기사를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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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초 전남 나주고분서 신라토기 다량 출토

[쿠키뉴스 2007-02-22 17:49]    

[쿠키 문화] 6세기 초반에 조성된 전남 나주시 영동리 고분에서 신라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영동리 고분군을 발굴 중인 나주 소재 동신대박물관(관장 김경주)은 지난해 10월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30여기의 무덤과 함께 전형적인 신라토기 5점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토기는 모두 개배(蓋杯·덮개) 형태로 삼족기(세발토기) 등 백제계 토기 30여점과 함께 발굴됐다.

책임조사연구원인 동신대 이정호 교수는 “개배 토기의 문양이나 소성도(토기를 굽는 온도) 등을 고려할 때 신라토기가 분명하다”면서 “함께 출토된 백제계 토기를 볼 때 제작시기는 6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신라가 500년대 초반 이전에 나주 지역에 들어간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조사단은 1998년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 마구류(馬具類) 등

신라쪽에 가까운 유물이 나온 적이 있으나 6세기 초반 백제 지역에 신라토기가 발굴된 것은 보기 드문 경우로 당시 신라와 백제의 문화교섭을 밝히는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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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 주지하다시피 - 백제(영산강백제)의 영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신라토기가 나왔다는 사실은 신라인이 서기 500년대 초반 이전부터 백제 땅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98년도에 같은 땅에서 “신라쪽에 가까운” 마구가 나왔다는 사실도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이정호 교수(이하 존칭 생략)과 나(그리고 일도안사님)의 의견의 다른 점은 이정호는 신라토기를 신라군이 나주에 들어온 증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신라인이 백제 신민(臣民)으로서 백제 땅 안에서 살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만약 신라군이 서기 6세기에 나주까지 쳐들어갔다면 <신라본기>나『일본서기』에 그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그런 기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내가 알기로는『화랑세기』에도 그런 기사는 없다). 따라서 신라토기와 신라마구를 남긴 사람들이 들어온 시기가 서기 5세기라 할지라도, 그들이 들어온 것은 ‘망명’이나 ‘귀화’지 ‘침입’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당시 신라는 흉노계 선비족이 다스리는 ‘계림국’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신라토기와 마구를 들여온 것은 당연하다). - 이로써 선비족(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흉노계 선비족)이 신라뿐 아니라 임나가야, 가야, 고구려, 백제 땅에도 들어왔을 것이라는 일도안사님의 가설이 정확함이 입증되었다 -

결론을 내리자면 나주의 신라토기와 마구는『삼국사기』「백제본기」문주왕 조의 초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고학 유물로써, 국보급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물건들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사족 : 영산강 백제의 담로들은 흉노계 선비족(계림국인/임나가야인)을 ‘용병’으로 여겨 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배를 이용해 이동하고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는 - 그리고 장사도 하는 - 사람들은 그들의 군대에 기병이 모자라는 현실을 이들 유목민을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써 타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왕위쟁탈전에 동원되기도 했겠지만, 일부는 북위와의 전쟁에 동원되어 싸웠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