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에 몰려든 백제 피난민(광개토왕비문의 왜)을 이끌고 도해한 사람으로 응신 이후 왜국의 절대 권력자였다. 현재 인덕능과 응신능으로 전해오는 5세기 초에 건립된 전방후원분 둘이 규모로써 일본 내 1위와 2위인데, 나는 이것이 순서는 바뀔지 몰라도 주인은 하나는 응신이고 또 하나는 인덕으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대형 고분은 정복자의 상징인데 이 둘은 정복자이자 건국자였다.

408년에 토도태자가 죽고 다음 해인 409년에 인덕이 즉위한다. 그는 본래 변진한 지역 소국왕으로 추정되는데, 연배가 응신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았다. 절대 권력자였던 인덕은 즉위와 동시에 전임 응신의 왕후를 태후에 봉한다.

仁德天皇 元年; 春 正月, 大鷦鷯尊卽天皇位 尊皇后曰皇太后

이 황태후가 신공 5년(418년)조에 박제상 일행이 잠시 귀국을 요청했던 왜국의 황태후라고 생각한다.(이 부분은 네티즌 고대사에서 해석했던 것과 약간 다르다.) 새 진왕이 들어서면 전임 진왕의 왕후가 황태후로 봉해진 기록이 일본서기에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부터 진왕제의 주요한 특징 하나를 더 알 수 있다. 진왕제는 담로제가 발전하여 왕실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진왕제가 탄생한 배경은 담로제이다. 백제는 담로가 담로를 만드는 방식으로 팽창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에 담로를 만든 진왕보다 더 많은 담로를 거느리게 된 다른 소국왕들의 권력이 강해지자 진왕은 부여왕과 같은, 여러 소국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인 지도자로 변모하게 된다. 그 진왕의 권력수준이 3세기 후반에는 외교권 마져 마한왕과 진한왕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 결과 진왕, 즉 백제왕은 강력한 소국과의 혼인동맹을 통하여 후원자를 얻어야 주변에서 권력을 인정받는 처지가 되었고(자립위왕), 이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4세기 이전 한성백제에 백제왕을 칭했던 사람은 3루왕 시대의 3왕과 근초고왕을 합해 4명뿐이었다. 근초고왕 이후 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은 백제왕의 지위를 두고 진왕에게 도전하였다고 본다.

 *언젠가 인덕과 응신의 아들인 토도태자 중에서 누가 형이냐고 묻는 사람을 보았는데 법률적으로는 토도태자가 형이다. 훗날 인덕이 응신과 담로제도로 연결되므로(응신과 인덕의 왕후가 서로 친인척임) 나중에 왕력을 기록할 때 나이나 혈연관계에 무관하게 응신의 제4자로 기록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마찬가지인데 만일 개로왕 뒤에 문주왕이 아니라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가 왕통을 이었으면 둘은 여인을 매개로하여 즉, 담로제로 연결되었으므로 백제본기는 '곤지왕은 개로왕의 제2자야' 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과거 내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백제사 전공하는 어떤 분에게 일본서기에 담로제가 나온다고 하였더니 "일본서기에는 담로도 밖에 안 나오는데 그것도 다무로가 아니고 아와지로 읽습니다"  하였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일본서기 자체가 담로제의 기록이란 것을 알 것이다.

인덕은 즉위 다음 해에 반지원명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다.

仁德天皇 2년, 春 3월。
(1) 立<磐之媛命>爲<皇后> - 갈성습진언의 딸
后 生 大兄去來穗別天皇(이중천황, 왜왕 미)。住吉仲皇子。瑞齒別天皇(반정천황, 왜왕 진)。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윤공천황, 왜왕 제)。
(2) 又 妃<日向髮長媛> - 신분은 모름
生 大草香皇子。幡梭皇女。
- 이 중에 실제 생물학적 관계는 반지원명의 소생 중 앞 부분 아들 2명(大兄去來穗別, 住吉仲) 정도라고 생각한다.


인덕은 즉위시에 왕비가 둘 뿐이었고 그들의 신분도 그리 높지 않다. 이로부터 인덕이 본래 백제 진왕이 될 신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이민시대의 대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집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의히 9년(413) 12월, 동진의 安帝에게 사신을 보낸다. 중국왕조에서 보면 3세기 중반 왜 여왕 일여 이후 약 150년만에 왜국에서 사신이 오는 것이지만, 인덕의 입장에서는 여휘-응신-인덕으로 가는 중에 응신시기만 전쟁으로 사신을 쉬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 권력자라 할지라도 갈성습진언의 딸(이중천황: 母曰磐之媛命 葛城襲津彦女也) 정도를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른다. 더욱이 왜국에는 백제에서 신제도원 공주가 와 있었다. 인덕 본인은 아무리 반지원명 왕후 체제로 계속 가려고 해도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신제도원을 황후로 세우고 떳떳하게 자립위왕하라고 요구할 지도 모른다.

갈성 습진언은 5세기 왜국에서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한 갈성가문의 시조다. 그는 특별한 직책이 없으면서도 큰 권력자로서 왕명을 대행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훗날 동성왕의 어머니인 韓媛이 그의 손녀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박제상 편을 보면 왜왕이 등장하여 그를 죽이는데, 이 왜왕이 신공 5년조를 보면 갈성 습진언이다. 박제상전은 그 사건을 목격한 미사흔 왕자의 증언이 기반이 되어 남은 것으로 보이는데, 습진언을 왕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그가 왜국에 오기 전에 삼한 소국의 왕 중에 한 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덕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천황들 중에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인물로서,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일본서기 편자들도 그를 성군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그에게 仁德이라는 시호를 주고 聖帝라 호칭한 것 외에도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다.

◎ 인덕 4년(410년); 3월, 백성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가득했다.

즉, 성군의 판단기준이 아래로부터의 인정인데 이는 본래 부여왕의 모습이다. 이 외에도 5세기의 왜국은 한마디로 부여의 계승이다. 만일 부여 왕실 자체의 기록이 남아있다면 비과학적인 기록까지를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일본서기와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자, 이제 일본서기가 기록한 그 성군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자.

◎ 인덕 16년(414); 7월, 천황은 宮人 <상전구하원>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보이고 이 婦女를 사랑하려하나 황후의 질투 때문에 부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 왕이 새 왕후 후보를 신하들에게 보였다가 불합격 맞았다. 상전구하원정도로는 안 되는 것이다. 삼한 소국들 서로 혼인으로 엮어져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왕이 부인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

◎ 인덕 22년(416); 1월, 천황이 황후에게 팔전황녀를 들여 장차 비로 하겠다고 말했다. - 팔전황녀는 합격이었다.
◎ 인덕 30년(416); 9월, 천황은 황후가 없는 틈을 타 팔전황녀를 궁중에 불러 들이셨다. 11월, 천황은 황후의 노여움이 큰 것을 한탄하였다. 천황은 아직도 황후를 사모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而猶有戀思).
◎ 인덕 35년(417); 6월, 황후 반지원명이 통성궁에서 죽었다.
◎ 인덕 37년(417); 11월, 황후를 내라산에 장사지냈다.
◎ 인덕 38년(418); 1월, 팔전황후를 황후로 세웠다(立八田皇女爲皇后).

인덕은 황후가 죽자마자 바로 새황후를 들인다. 팔전황녀는 인덕초기부터 왜국의 실질적인 왕후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반지원명을 내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왕후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리는 성군 중의 성군이라는 인덕이 여자문제에 대하여 왜 이렇게 복잡해야 했는지를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진왕제 국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진왕제 하에서 왕후는 원칙적으로 하나만 두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서기 418년, 인덕은 새 황후를 세우고 떳떳하게 자립위왕하니 동아시아에 경사가 났다.

o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14년(418)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o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2년(418),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으로부터 도망해왔다.

o 송서 왜국전 高祖 영초 2년(421), 고하여 말하길 "왜왕 讚이 만리를 닦아 조공하니 멀지만 그 정성이 가마와 같다. 제수함이 마땅하다."

418년의 경사 중에 가슴이 찢어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면 아마 반지원명의 아버지인 갈성 습진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부족하여 딸이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미사흔을 탈출시킨 박제상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