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功皇后 46년; 봄 3월, 斯摩宿禰를 卓淳國에 보냈다. 卓淳王 末錦旱岐는 斯摩宿禰에게 고하여 "甲子年 7월 중순에 백제인 久氐, 彌州流, 莫古의 3人이 우리 땅에 와서 '...' 라고 하였다. ... 그래서 斯摩宿禰는 從者인 이파리(爾波移)와 卓淳人 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초고왕은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오색의 綵絹(비단) 각 1필, 각궁전(角弓箭)과 아울러 <철정> 40매를 이파리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 각종 진기한 물건을 보이며 "이 진보가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

*백제사신 3명의 이름(久氐, 彌州流, 莫古)은 이곳 일본서기 특수부분인 신공 46~52년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백제왕은 군대동원의 대가로 왜국에게 철정을 준다고 하였는데 철정은 삼국지 동이전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결과를 보아도 3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교역품이었다. 4세기에는 문화가 발달하여 철정은 더 이상 국가간 선물감이 못된다. 또한 후한서와 삼국지를 보면 3세기 초 변한은 백제 진왕의 통치하에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부여라는 나라는 중앙에 왕이 있기는 하나 각 지방은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나라였다. 그러다보니 천재지변 같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왕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하였다. 전쟁을 할 때도 각 지역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군으로 참전하는 것이지 왕의 직속군대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부여의 전통은 백제에 계승된다. 1세기 온조왕조를 보면 전투에서 노획한 물품을 왕이 가져가지 못하고 전투에 참가한 부족이 각기 가져간다.

<백제본기 온조왕 22년; 9월, 왕이 기병 1천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갈의 적을 만나 이를 단번에 깨뜨리고 포로들을 붙들어 각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형식이야 왕이 나누어준다는 모양을 갖추지만 실제로는 군사를 동원한 대가를 경제적으로 보상해주는 것이다. 건국 무렵 온조왕의 직속군대는 1천명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전통은 4세기까지 이어진다.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3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을 맞아 싸우는데 이 중에 왕의 직속군대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은 백제 소국들의 신지들이 각기 자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참전하는 것이다.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민가를 약탈하므로 왕이 태자를 보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이를 깨뜨리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얻었으며 노획한 물품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역시 각 소국들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한 대가를 경제적으로 보상해주고 있다. 태자 근구수가 대승의 여세를 몰아 북진하려 하자 신하가 말린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서 근구수왕 자신의 군대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소국 군사들이 안 간다면 자신만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현상은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도 비슷했다. 형식은 왕의 군사라 하나 왕의 직속군대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각 호족들에게 각 지역의 조세권을 주어 경제적인 대가를 보장해야 했다. 조선도 이와 비슷했다. 조선초 이방원의 군대는 대부분 우호세력이 이끌고 온 군대였고 자신의 직속군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은 광종과 태종대를 거쳐 사병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의 기틀을 다진다.

유교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도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군주의 덕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부여의 전통은 이어졌다. 그리고 이 부여의 전통은 조선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서구에서 유래하였다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실시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형식만 바뀌었을 뿐 바탕에 깔려있다.

왕권이 강력해진 4세기에도 백제 진왕의 군대가 소국 군대를 통합한 것이었는데 3세기에는 훨씬 더 했다. 그야말로 소국의 군대를 경제적인 대가를 보장하고 동원한 것이었다. 백제 진왕은 변진한 소국들(포상팔국)을 동원하여 가야를 쳤으나 신라의 간섭으로 대패하고 실패하였다. 이제 중앙군인 마한군이 남았는데 신공 46년조를 보면 왜국 군대를 철정교역이라는 경제적인 대가를 보장하고 동원하고 있다.  

왜국은 백제 진왕의 간접세력권이지 직접세력권이 아니다. 이때 왜국 외에 간접세력권의 또 다른 어떤 나라를 동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 진왕이 간접세력권의 나라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이 무렵 직접세력권의 군사력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겼다는 뜻이다. 즉 백제 진왕의 직접세력권에 들어가 있던 마한 소국들이 가야-신라군과 전투하다 대패하였을 가능성을 준다. 당시 한성백제가 동원했던 최대 군사가 기천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소국 하나의 대패란 천 명 정도가 죽는 것을 말한다.

당시 가야보다 신라가 강국이었음으로 백제의 여러 소국들이 신라에게 패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신라가 백제의 소국들을 아무리 격파해도 한성백제가 아니면 삼국사기의 편집원칙상 삼국사기에 나올 수 없다. 고구려가 백제의 소국을 아무리 격파해도 한성백제가 아니면 당대의 기록인 광개토왕비에는 나올 수 있으나 후대의 기록인 삼국사기에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삼한소국들은 삼한백제에 들어간 시기에는 고구려나 신라와 접촉해도 삼국사기에 나올 수 없다. 나오는 경우에는 3세기 초 포상팔국처럼 애매하게 출현할 뿐이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4세기 초에 신라를 공격하는 이서고국 정도인데, 이미 삼한백제에 들어간 나라이므로 원칙적으로는 삼국사기에 나올 수 없다.

한성백제는 가야 7국을 멸망시키는 신공 49년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성백제도 마한의 다른 소국처럼 신라에게 패했을 가능성은 더 커지고, 그렇다면 이 사건은 삼국사기에 나와야 한다. 3세기 초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서 백제군이 신라군에게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대패한 기록이 딱 하나 있다.

<신라 내해이사금 29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 아래서 싸워 이를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제 구수왕 11년;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범해 오므로 우리 군사가 봉산 아래에서 역전하였으나 패하였다.>

따라서 일본서기 신공 46년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 29년(백제 구수 11년), 즉 서기 224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