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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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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
2007.02
[re] 일본서기 신공황후 46년조에 대한 다른 연구자의 견해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9093 2007.02.21 16:32:03 (*.232.248.181) 백제사0 Comments 753 Views 29 Voted / 0 Devoted
>神功皇后 46년; 봄 3월, 斯摩宿禰를 卓淳國에 보냈다. 卓淳王 末錦旱岐는 斯摩宿禰에게 고하여 "甲子年 7월 중순에 백제인 久氐, 彌州流, 莫古의 3人이 우리 땅에 와서 '...' 라고 하였다. ... 그래서 斯摩宿禰는 從者인 이파리(爾波移)와 卓淳人 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초고왕은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오색의 綵絹(비단) 각 1필, 각궁전(角弓箭)과 아울러 <철정> 40매를 이파리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 각종 진기한 물건을 보이며 "이 진보가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
김현구, 박현숙, 우병재, 이재석 공저로 나온 <일본서기 한국관계사 연구 (I)>의 87쪽에 신공 46년조에 대한 해석이 있다. 잠시 인용해보면
(1) "이 기사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백제가 제3국을 귀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 왜에 가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을 백제가 몰랐다는 점, 왜와 통교 목적이 진보를 바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 일본이란 후대 용어가 보이는 점 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기사에 일본서기 편자의 윤색이 가해져 있음을 뜻한다."
(2) "따라서 신공 46년조는 백제측 기록인 백제기를 토대로 하면서 일본서기 편자의 작문. 윤색이 가해져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1)에서 일본서기 기록이 8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7세기 이전 용어가 나올 필요가 없다. 김현구(4인의 저자를 말함, 이하 존칭 생략)는 일본서기를 한중사료 읽는 방식으로 대하고 있다. 통교 목적은 3년 후인 신공 49년의 가야토벌전쟁에 왜군동원인데 김현구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
(2)번의 해석은 나와 같다. 신공 46~52년조는 왜국 자체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들, 즉 삼한백제인의 대 왜국교섭기록을 보고 주객을 바꾸어 기록한 것이다.
철정에 대하여 김현구는 모순된 해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은 4세기 후반인데 당시 왜가 가장 필요한 물품이 철정이었다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아도 왜국이 철정이 필요한 시기는 3세기이다. 또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 가야 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석하면서 또한 동시에 가야제국과 전쟁하여 이를 정복하였다고 하니 이 역시 해석의 모순이다.
그 외에 313년에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완충작용을 하였던 대동강유역의 낙랑이 멸망하여 두 나라가 충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낙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재고해야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한반도 북부는 313년보다 훨씬 이전에 벌써 고구려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구, 박현숙, 우병재, 이재석 공저로 나온 <일본서기 한국관계사 연구 (I)>의 87쪽에 신공 46년조에 대한 해석이 있다. 잠시 인용해보면
(1) "이 기사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백제가 제3국을 귀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 왜에 가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을 백제가 몰랐다는 점, 왜와 통교 목적이 진보를 바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점, 일본이란 후대 용어가 보이는 점 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이 기사에 일본서기 편자의 윤색이 가해져 있음을 뜻한다."
(2) "따라서 신공 46년조는 백제측 기록인 백제기를 토대로 하면서 일본서기 편자의 작문. 윤색이 가해져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1)에서 일본서기 기록이 8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7세기 이전 용어가 나올 필요가 없다. 김현구(4인의 저자를 말함, 이하 존칭 생략)는 일본서기를 한중사료 읽는 방식으로 대하고 있다. 통교 목적은 3년 후인 신공 49년의 가야토벌전쟁에 왜군동원인데 김현구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
(2)번의 해석은 나와 같다. 신공 46~52년조는 왜국 자체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들, 즉 삼한백제인의 대 왜국교섭기록을 보고 주객을 바꾸어 기록한 것이다.
철정에 대하여 김현구는 모순된 해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은 4세기 후반인데 당시 왜가 가장 필요한 물품이 철정이었다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아도 왜국이 철정이 필요한 시기는 3세기이다. 또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위해 가야 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석하면서 또한 동시에 가야제국과 전쟁하여 이를 정복하였다고 하니 이 역시 해석의 모순이다.
그 외에 313년에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완충작용을 하였던 대동강유역의 낙랑이 멸망하여 두 나라가 충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낙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재고해야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한반도 북부는 313년보다 훨씬 이전에 벌써 고구려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