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응신의 죽음과 인덕의 즉위를 정확히 기록하여 혼란의 우려가 없다. 특히 응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2월이라는 달까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응신은 2월초에 죽고 왜국의 사자는 2월 말에 백제에 도착하였다.

*아신왕 12년(403년) 2월, 왜국의 사자가 이르자 왕이 맞이하여 크게 위로하고 특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 응신의 죽음을 알림
*전지왕 5년(409년), 왜국이 사신을 통해 야명주를 보내니 왕이 두터운 예로써 대접하였다 -> 인덕의 즉위선물이 도착함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왕이었던 응신과 인덕에 대해서는 호칭을 하지 않으나, 그 중간의 토도태자에 대해서는 전지왕이 귀국할 때 '왜왕'이 병사 백명으로 호위하게 했다고 하여 '왜왕'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자립위왕 하던 것은 백제왕이었지 왜왕이 아니었으므로 이는 합당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다시 다룰텐데, 박제상 열전에 나오는 418년에 박제상을 죽인 왜왕은 갈성습진언이다.

응신 사후 왜국은 토도태자가 왕이 되었으나 자립위왕하지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었다. 특히 403년에 신라군은 바다를 건너 응신이 죽고 혼란에 빠진 왜국을 공격하였는데 왜국은 백제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여러 세력가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하는 내전상황이 계속되는 중에 응신의 왕후는 당시 각료 중 최대 세력가이던 무내숙녜에 기대어 아들의 왕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에 영락 17년(407년), 낙동강 유역까지 다시 내려온 고구려군과 삼한백제군 사이의 마지막 전투가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난다. 삼한백제가 패하여 회복불능에 들어가자 이 지역의 구 가야제국이 일제히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407년 전투에서 패한 비문왜의 지휘부는 한성백제와 결합하게 되니, 이것이 영락 17년에 한성백제에 부여씨가 최초로 출현하는 배경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한지 180년 만에 좌지왕에 의해 재건국이 이루어진다.

다음 기록이 고구려 광개토왕에 의해 잔국이 토벌되던 응신 7년(396년) 9월의 사건으로 진왕국가의 왜국 이주를 기록한 것이다. 즉, 칠지도를 주던 백제가 이제 스스로 바다를 건나가 왜국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칠지도의 백제의 후손이지 왜국의 후손이 아니다.

응신 7년(396년); 가을 9월,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함께 내조하였다.

396년 9월, 백제 진왕이던 응신이 왜국으로 피신하여 397년 1월에 국가를 건국하였으나 403년에 웅습을 정벌하던 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러면 이후에도 한반도에서의 진왕국가가 왜국에서도 이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한성백제 출신의 왕후를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와 같다. 왜국에 혼란이 계속되던 중에 영락 17년, 왜국에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겼다.

응신 39년(407년); 봄 2월, 백제의 직지왕이 그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은 7인의 부녀자를 데리고 내귀하였다.

응신 7년조의 기록이 진왕국가의 왜국 이주를 기록한 것이라면 응신 39년조는 그 진왕국가가 계속될 수 있는 근거를 준 셈이다. 이제 누구든지 신제도원이나 그가 데리고 온 백제 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면 자립위왕 하고 백제 진왕이 되는 것이다. 이후 신제도원과 그가 데리고 온 백제왕실의 여인들이 5세기 전반의 왜국 왕비들을 공급하게 된다. 따라서 일본서기 응신 39년조는 진왕국가의 유지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의 하나이다.

이후에도 백제 왕실로부터 왜국 왕실로의 왕비 공급이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그 공급이 끊기고 461년에 백제 좌현왕(곤지)이 백제 왕실의 여인을 대동하고 왜국에 출현하게 된다. 이후로는 백제 왕실의 여자가 아니고 남자들이 왜국에 파견되는데 이 현상이 백제 멸망무렵까지 계속된다.

토도태자는 자립위왕 하지 못하고 408년 인덕세력에 의하여 실각한다. 따라서 그는 천황의 시호와 대수를 받지 못하고, 대신 선대인 응신의 재위기간이 인덕의 즉위 전 해인 408년까지 연장되어 토도태자의 집권기간을 포함하여 기록하게 된다. 이것이 백제 진왕력의 기본 서술방식이다. 만일 비류에서 여구와 여휘에 이르는 4백년 삼한백제 진왕력이 발견된다면 틀림없이 이 원칙에 따라 왕력이 기술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가 아는 것 하나는 3세기 초 진왕 한 명이 227년과 230년 사이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227년에 가야제국을 토벌할 때 진왕은 살아있었으나, 이후 230년에 칠지도를 보낼 때는 다음 진왕이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를 칭함으로써, 이전 전왕이 죽고 새 진왕이 들어섰으나 아직 자립위왕 하지 못한 상태란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227년에 가야제국을 토벌한 진왕의 재위기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공손도와 혼인을 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이 가야제국을 토벌한 진왕이 혹시 공손도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공손연을 담로국 삼아 자립위왕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