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13&articleid=2007010920433557423&newssetid=85“6세기 백제목간서 가장 오래된 우리말 ‘도치(돼지)’로 확인”

[한겨레] 김영욱 교수 “향찰, 신라에 100년 앞서”

1500년 전 백제 사람들이 썼던 목간(글자를 적었던 나무쪽)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말 ‘도치’(돼지)가 확인됐다는 연구 결과 나왔다. 아울러 신라 향가를 지을 때 한자 뜻과 음을 차례로 빌려 우리 말을 표현한 향찰법을 백제인이 100년여 앞서 썼다는 견해도 함께 나왔다.

이런 주장은 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국문학)가 10~11일 한국목간학회 국제학술대회에 발표할 논문에서 나왔다. 그는 “2002년 백제의 옛 도읍인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6세기께 사면목간에 쓴 글자를 분석한 결과 ‘저이’(猪耳)란 한자어가 돼지란 뜻의 백제 고유어 ‘돝+△ㅣ’, 곧 ‘도치’를 한자의 뜻과 음을 빈 향찰로 표현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猪耳는 국내에서 일차 자료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고유어”라고 덧붙였다.

이 사면목간은 길이 44cm의 막대모양 나무쪽이다. 네 각면에 비교적 뚜렷한 먹글씨로 능산리 절터 혹은 부여 나성을 쌓는데 동원된 현지인들에게 쌀을 나눠준 내역을 기록한 장부로 추정해 왔다. 문제의 ‘猪耳’는 목간 3면의 ‘소리저이기신자여흑야’(小吏猪耳其身者如黑也)란 문장 가운데 일부다. 김 교수는 문장을 ‘작은(하급) 관리(小吏)가 곧 저이(猪耳)로 몸의 색깔이(其身者) 까무잡잡하다(如黑也)’라는 뜻으로 풀면서 ‘돼지처럼 생긴 하급 관리’로 해석했다.

여기서 猪는 도치(돼지)란 뜻인데, 그 뜻의 앞발음인 ‘돝’으로 읽는 훈독이며, 耳는 오직 발음만 빌려 읽는 음독으로서 합치면 ‘돝+△ㅣ’라는 발음이 되면서 훈독이 앞서고 말미에 음독이 따르는 향찰의 전형적 표기와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猪와 耳에 대한 이런 차용 표기법이 <향약구급방>과 백제 인명 등에서도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신라인이 향가를 창안했다는 통설은 재고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백제시대 목간은 모두 6~7세기 것으로 현재까지 옛 도읍 터인 충남 부여에서만 30여점이 출토된 바 있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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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언어 차이가 상당하였다고 생각되나 삼국시대 7백년을 통하여 평균적으로는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삼국에 여러 민족이 유입되면서 당연히 여러가지 언어를 가지고 왔었을 것이므로 시기적으로 집단에 따라서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다 서로 동화되었다. 예를 들면 근초고왕의 국서를 내물이사금은 읽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성-눌지를 거치며 신라의 지배층도 점차 한자를 배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국가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다는 개념은 없었고 주도집단이 각자의 시조신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신라어가 한국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하지만, 본래 수적으로 소수였기 때문에 한국어의 바탕을 만들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만일 신라어가 한국어의 주류가 되었다면 오늘날 한국어에서 경상도 방언만 유달리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한국어의 기본 바탕은 부여어(삼한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어의 주도세력은 황해도-경기도 일대의 한강유역세력이다. 좀 더 따지면 3-4세기 말갈백제인들이다. 그들의 문화가 이후 경기문화로 자리잡아 고려-조선을 거치며 서울문화가 되고, 오늘날까지 한국문화에 가장 큰 역할을 미쳤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