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 전역에서는 삼국시대 환두대도가 출토된다. 손잡이에는 지배자를 상징하는 용무늬나 봉황무늬를 조각하기도 하였다. 환도대도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무령왕릉 출토 용무늬 환두대도인데 칼의 기품으로 보나 작품성으로 보나 단연 최고다(사진 참조). 환두대도를 백제 지방통치의 상징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왕이 자신의 칼과 같은 종류의 칼을 지방 수장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지방 수장은 중앙정부에 신속하고 중앙정부는 권력을 분양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환두대도 출토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1) 백제문화다.
- 고구려에서는 칼은 나와도 이런 환도대도 문화는 없었으며, 신라에는 환도대도가 출토되나 형식이 다소 다르다.
(2) 한반도는 3-6세기 것이, 일본열도에는 5-6세기 것이 출토된다.
- 일본에 4세기 이전 환두대도가 없는 것은 백제식 국가가 5세기에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 이전의 왜국은 5세기 이후의 왜국과 전혀 다른 존재로 가야문화권이었다. 일본은 변두리보다 중앙에서 많이 나오고, 후반기로 가면 한반도의 환두대도를 꼰 손잡이형태라는 독특한 형태로 진화시키기도 하였다.
전해지기로는 인덕능에서도 백제식 환두대도가 나왔는데 다시 매장했다고 한다. 인덕능에서는 백제식 칠자경도 출토되어 현재 미국 박물관에 있는데 무령왕릉 출토 칠자경과 같은 양식이다.
왜 하필 3세기에 백제에 환두대도 문화가 출현하였느냐는 삼국사기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초에 백제가 마한과 진한과 변한을 통합하고 삼한소국체제를 출범시키기 때문이다. 환두대도의 출현시점이 이와 일치한다. 이런 면에서 3세기 초에 삼한백제 진왕이 왜왕 비미호에게 보낸 칠지도는 환두대도의 원시형태로 볼 수 있다.
(3) 가야지역 환두대도는 백제식이다.
- 가야지역 환두대도는 문양이 백제와 같으므로 백제에서 보내주었거나 백제의 기술자가 와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후에는 환도대도가 사라진다. 가야지역의 금동관은 환두대도와 다르게 신라양식인데 이 역시 신라에 통합된 이후에는 사라진다.
(4) 한강유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 문제인데 왜 한강유역에서는 환두대도가 출토되지 않는냐는 것이다. 앞으로 설령 한 두개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수십개씩 출토되는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예를 들면 금동관이 출토된 나주 신촌리 옹관묘에서는 봉황무늬 환두대도 2점을 비롯하여 4점의 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에는 왜 다른 백제권과 다르게 환두대도가 출토되지 않느냐에 대하여 아직까지 뚜렷한 답변을 보지 못했다.
[ 해설 ]
한강유역은 환두대도의 공백지이자 담로계지명의 공백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3세기 이후 금강유역의 백제 진왕으로부터 전국에 환두대도가 보내질 때 한강유역은 제외되었다는 뜻이다. 그 말은 한강유역에는 자체적으로 강력한 통치자가 있어 백제 중앙정부의 통치권 밖에 있었으며 그 문화도 백제의 전통문화와는 다른 문화였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한강유역은 3세기 초 고이왕부터 새로운 집권세력이 북에서 말갈군과 함께 내려온다. 그리고 한강유역에서 기존 무덤을 파괴하고 고구려식 적석총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3세기 초에 한강유역에 고구려계통에 의한 정복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강유역은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서 백제문화와 다른 문화라면 고구려문화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백제의 칼문화에 대응하는 고구려 문화는 활문화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는 고이왕때부터 활문화가 등장한다. 이 활문화는 고구려 동명왕에서 시작하여 고려태조와 조선태조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가 세계 양궁대회를 석권하는 등 한국의 대표문화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3세기 이후 한강유역은 금강유역에 자리잡았던 백제의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독립적인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5세기 이후 이들이 백제를 인수하고 백제본기에 자신들의 왕력을 남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