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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목간학회 발표결과

고조선 조회 수 2307 추천 수 0 2009.05.11 22:01:41
一道安士 *.232.248.181
얼마전 올렸던 낙랑목간에 대한 학회 결과가 한겨레신문 사이트에 올라왔길래 약간 손을 보아 올립니다. 북한학계에서 공개한 배경이 북한학계의 견해와 함께 조금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지명비정을 하였는지는 나와있지 않는 대신에, 낙랑군 25현이 남부도위, 동부도위, 직할지,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직할지는 평안남도 대동강유역으로 본 것이고, 남부도위는 황해도로, 동부도위는 강원북부와 함경남도 남부로 본 것입니다.

이번 목간을 해석하면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만난 낙랑국은 동부도위인 함흥지역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무신왕에게 멸망당했다가 후한이 회복한 살수이남의 낙랑은 함흥지역이 됩니다. 반면에 평양지역은 중원왕조가 바뀔 때마다 주인이 바뀌며 그대로 가다가 고구려본기에 마지막으로 출현하는 313년에 멸망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재야학계도 주류학계와 마찬가지로 평양지역 낙랑이 313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한다고 나와있는데 이는 제 견해와 다릅니다. 저는 평양지역 낙랑은 246년 고구려-위나라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되었으며, 313년에 고구려에게 공격받은 낙랑은 요동의 낙랑으로 이후 요서로 밀려갔다고 보는 것이지요. 

저는 대동강유역이 낙랑군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면 그 지역이 동부도위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었으나, 대동강유역은 조선현으로서 직할지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전한 당시 낙랑인구 28만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인구 5백만 이상에 해당하는 인구일 것입니다. 그러면 평양지역에서 전한시대 유물이 훨씬 더 나와야 합니다. 앞으로 풀어야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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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의 진원지는 지난 2009년 4월14일 낮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장. 첫 발제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새로 발견된 낙랑 목간’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최신 발굴 유물을 갈무리한 소개글을 발표했다.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이 지난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학술지 <력사과학> 198~200호의 논문들을 통해 보고한 이 유물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뒤 60여 년 지난 시점에 나온 유일한 통계 사료다.


윤학예사는 손영종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현별 호구 수를 적은 통계표라고 소개했다. 목간 목록, 사진, 수효, 서체, 판독글자 전문 등은 언급이 없으나, 낙랑군 (1)남쪽관할인 남부도위 7개 현, (2)동쪽관할인 동부도위 7개 현, (3)중심부인 직할 11개 현의 일부 인구와 호구 수가 기록돼 있다.


목간통계를 보면, 고조선 도읍이었고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평양)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학예사는 <후한서> <한서> 등 기원후 한나라 사서의 인구통계와 비교한 결과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8%로 중원 다른 지역의 정상적인 증가율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또 조선현 등 직할지 11개 현은 인구밀도가 높아 대부분 2천 호를 넘었다. 반면 동부도위나 남부도위는 1천 호 미만의 작은 현이 각각 3개, 6개였다. 동부도위의 동이현(함남 안변으로 추정)은 279호 2030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또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사실도 보여준다.


주류학계는 목간의 이런 통계 내용들을 한반도 서북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음을 새삼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사학자 이병도 등이 통설로 제기한 낙랑군의 한반도 주재설은 80년대 이후 거센 반론에 부딪혀왔다. 북한학계와 재야 학자들은 평양에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이란 토착 독립 국가가 기원후까지 존속했다가 후한에 복속되었으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됐다고 주장해왔다.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이의 딸 낙랑 공주와 결혼하면서 내통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 이곳의 중국계 출토 유물들이 기원후 후한 계통이라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이는 중국 왕조가 경영한 낙랑군은 요동벌의 요하 부근이나 더 서쪽인 요서 대릉하 일대에 있었다는 두 개 낙랑 병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조선현(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 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윤학예사를 비롯한 남한 연구자들은 황당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고 이를 반박하고 있다.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학예사는 “북한 스스로 낙랑군의 요동·요서 존재설을 부인하는 자료를 공개한 셈”이라며 “목간 정보의 전모에 대해 북한 쪽이 침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낙랑 목간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평양 부근에서 다섯 차례 발굴됐다. 전모가 파악된 것은 일제시대 남정리 116호분 출토 목간뿐이며, 해방 뒤에는 90년대 <논어> 구절을 새긴 대나무 목간(죽간)들이 출토된 사실 정도가 알려졌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4/0210150002007042606570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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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불사조

2009.05.16 19:45:41
*.176.68.219

일도안사남의 이론과 목간에 따르면 고조선 멸망 후 60년 이내에 낙랑지역에서 어떤집단이 평양지역으로 이주해야 하고,  중국의 군현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왜 조선현이라 불리었을까요? 
주류학계의 이론대로라면 평양이 위만조선의 수도여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니면 북한학계의 주장도 생각해 볼 수 있을는지요?

一道安士

2009.05.20 11:30:52
*.232.248.181

북한학계의 낙랑군위치 주장에 대한 근거는 남부도위와 동부도위의 상대적 크기에 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목간을 보면 남부도위 인구가 동부도위 인구보다 적거나 비슷합니다.
만일 남부도위를 황해도에 동부도위를 함흥 및 강원북부지역에 비정하면 북한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황해도가 함흥지역보다 인구가 적은 것이 되어 지형에 모순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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