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의 주인공이 이름을 바꾸어야 했던 까닭

태기왕은 맥(貊)국의 임금인가, 아니면 진(辰)의 임금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강원도 태기산에 두 가지의 전혀 다른 태기왕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태기산의 동쪽인 평창군 봉평면에 남아있는 이야기(이하 평창군 전설)에는 태기왕이 맥국의 군주로 나오고, 산의 서쪽인 횡성군 둔내면과 갑천면, 청일면에 남아있는 이야기(이하 횡성군 전설)에는 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이 진한(辰韓)의 마지막 임금으로 나오는데, 그럼 대체 어느 쪽의 말이 옳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태기왕은 서나벌(:신라)에 쫓겨 강원도로 내려온 진의 마지막 임금이며, 맥국 왕의 이름은 ‘태기’가 아닌 ‘가리’였다고 생각한다.

평창군 전설은 태기왕이 예(濊)국과 싸웠다고 하고, 그의 부하인 ‘호령(號令)’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궁지에 몰린 ‘삼형제(森炯濟)’ 장군이 태기왕을 업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말로 끝나는 반면,

횡성군 전설은 태기왕이 삼랑진(三浪津) 전투에서 져 덕고산으로 쫓겨 내려왔으며 “4년” 동안 군사를 기르다가 혁거세왕한테 들켰고, 결국 신라군의 칼에 죽었다는 내용이어서 두 전설이 결코 같은 이야기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순 없기 때문이다.

(만약 두 이야기가 같은 사실史實을 담았다면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같고 세부사항이 달라야 하는데, 군주의 이름이라는 단 한 가지 사항만 비슷할 뿐 나머지는 같지 않기 때문에 이 두 이야기가 원래는 각각 다른 사건을 다룬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두 군(郡) 가운데 어느 한 군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군의 전설에서 군주의 이름을 빌린 다음, 자기네가 기리는 군주에게 본명 대신 빌려온 이름을 붙였다는 얘긴데, 그럼 어느 군이 군주의 이름을 바꿨을까?

우리는 이쯤에서 (맥국의 왕이 나오는) 또다른 전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선군과 평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가리왕산은 맥국의 ‘가리’왕이 예국의 침입을 피해 달아나 대궐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인데, 이 이야기가 평창군 전설의 수수께끼를 풀 단서를 제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산에는 가리왕이 군사를 길렀다는 이야기와, 가리왕의 궁녀들이 바위 위에 올라가 고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부모형제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바, 이 이야기들이 평창군 전설과『삼국유사』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동사연표』와『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진변(辰弁)이 일으킨 난리를 피해서, 도읍을 지리산(智異山) 반야봉(盤若峯) 아래로 옮겼다.”

―『동사연표(東史年表)』마한(馬韓) 효왕(孝王) 30년 조 : 서기전 84년

“춘주(春州 : 오늘날의 춘천)는 예전의 맥국(貊國)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고려시대 - 옮긴이)의 삭주(朔州 : 평안북도 북부에 있는 삭주군)가 곧 맥국이라 하고, 또는 평양성이 맥국이라고 한다.”

―『삼국유사』<기이> ‘마한’ 조

한(韓)씨족 (: 새 마한의 왕실)이 평양에서 지리산으로 쫓겨난 때가 서기전 84년이다. 맥국은 원래 평안북도에 있다가 이 시기에 평양으로 내려왔을 것이며 이후 낙랑국에게 밀려 강원도(춘천)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리왕산은 - 춘천이 맥국의 새 도읍이므로 - 맥국의 수도가 아닌 임시 피난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춘천에 살다가 강릉에 있던 예국의 공격을 받아 달아났다면 당연히 남쪽인 태기산이나 가리왕산으로 달아날 테니 말이다(단, 가리왕이 궁궐을 태기산이 아닌 가리왕산에 지은 점으로 미루어볼 때 가리왕은 예국에서 멀리 떨어진 가리왕산을 임시 수도로 삼고 태기산을 ‘감시 초소’로 삼아 예국을 경계한 듯하다).

평창군 전설도 태기왕이 예국과 싸우다 죽었다고 하지 태기산이 태기왕의 도읍지라고는 말하지 않으므로, 가리왕산의 전설과『삼국유사』의 기록은 평창군 전설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다.

『삼국유사』에는 가리왕산 전설에 나오는 사람들의 근거지를, 평창군 전설은 그들의 전진기지와 그들이 몰락한 까닭을, 가리왕산 전설은 - 평창군 전설이 다루지 않은 - 그들의 임시 도읍을 다루고 있으므로,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는 셈이다.

이제 조각그림(:퍼즐) 맞추기(맥국의 멸망과정 추적)를 끝내고 다 맞춘 조각그림을 보자. 어떤 그림이 보이는가? ‘가리’라는 이름을 지닌 맥국의 임금이 덕고산에서 ‘태기’라는 이름으로 죽은 이상한 그림이 보일 것이다.

전설로 미루어볼 때 예국과 싸운 기간은 아주 짧았고 맥국이 무너진 전투는 몇 달 만에 끝났으니, 이런 현상을 ‘가리’라고 불린 군주가 죽고 그의 아들(또는 형제)인 ‘태기’가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생긴 일로 볼 순 없겠고, 그렇다면 두 지역 가운데 한 지역이 군주의 이름을 잘못 전했거나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텐데 어느 곳이 이름을 바꿀 가능성이 높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왕이 궁궐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보다, 왕이 적국의 군대와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검열당할 가능성이 더 크니만큼(정치사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민감하고, 가장 왜곡되기 쉬운 사실史實임을 기억하라), 가리왕산이 아닌 평창군 사람들이 왕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생각해야 이치에 딱 들어맞는다.

이에 우리는 덕고산(태기산)에서 예국과 싸우다가 죽은 맥국 임금의 본명은 ‘가리’이며, 평창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태기’로 바꿔 버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창군 전설의 주인공은 가리왕이었던 것이다.

그럼 평창군 사람들은 왜 가리왕에게 그와는 - 같은 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빼고는 - 닮은 점이 없는 진한 왕의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그 까닭을 알려면 강원도의 역사를 되돌아 봐야 한다.


서나벌은 서기전 32년(혁거세거서간 26년)에 강원도를 정복(나중에 자세히 다룸)했는데, 이후 서기 61년 중심지를 충청북도로 옮길 때까지 아흔 세 해 동안 그곳의 선주민(예/맥)을 지배한다.

횡성군의 주민들은 서기 1세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강원도를 나눠 가진 뒤에는 신라의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서기 504년 이후 신라가 다시 강원도를 정복하자, 그들의 전승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신라본기」지증마립간 조에는 신라가 서기 504년 - 지증마립간 5년 - 에 지금의 강원도 삼척으로 추정되는 파리波里에 성을 쌓았다는 구절이 나오므로, 신라가 이때부터 강원도를 재[再]정복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함)

박씨족의 군주인 혁거세거서간을 “시조”로 모시고 박씨족에게서 나라를 물려받았음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경주 김씨들이 혁거세왕이 진(진한)의 마지막 군주인 태기왕을 잡아죽인 이야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라 왕실은 태기왕을 모시는 평창군/횡성군 주민들을 탄압했을 테고, 주민들은 태기왕 신앙 자체를 내버리던가, 아니면 믿음을 교묘하게 위장해 몰래 전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실제로 횡성군 주민들은 태기왕의 이야기만 전할 뿐 위령제를 지내지는 않음. 이는 신앙이 박해받은 뒤 사라져 버렸음을 암시한다).

에스파냐인에게 정복당한 잉카인들이 “성인(聖人)이나 예수의 표상(表象) 뒤에 ‘우아카(잉카인의 말로 <대기의 정령>, <성스러운 기념물>, <작은 동상> 이라는 뜻 - 옮긴이)’를 숨겨, 겉으로는 성인이나 예수를 섬기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우아카’를 섬기는 의식을 치렀(까르멘 베르난드의 책『잉까 - 태양신의 후예들』에서)”듯이, 평창군 주민들은 맥국 군주와 맥국의 장군들이 죽은 사실을 다루는 위령제를 지내되 군주의 이름을 ‘가리’에서 ‘태기’로 바꾸어 실제로는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한 태기왕의 넋을 달래었다는 얘기다.

(만약 신라 관헌이 의심을 품고 위령제를 지내는 까닭을 물어보아도, 태기왕이 맥국 군주이며 진한의 임금과 이름이 같은 건 순전히 우연일 뿐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으니 얼마나 효과적인 위장 전술인가?)

신라 왕실은 한때나마 자신들과 우호관계를 맺었던(「신라본기」참고) 맥국의 군주를 모시는 의식을 막을 까닭이 없었고, 평창군 주민들은 이런 식으로 태기왕 이야기를 지켜냈다.

이제 신라가 망한 지 즈믄예순여덟 해 (1067년)가 흘렀느니만큼, 맥국의 임금에게 본명을 돌려주고 맥국의 역사와 진(:진한)의 역사를 분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해야 열국시대의 역사가 온전히 되살아날 수 있으며 전설을 간직한 사람들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함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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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30 Thu 00:53:21 → 2003/10/30 Thu 00:58:10

#이 글을 읽은 一道安士  님의 답변 :

Re: 마한, 진한, 변한의 멸망 이후

마한의 멸망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온조왕조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한강유역으로 남하한 마한은 만주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부여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부여인들의 지도자가 비류와 온조였습니다. 이들이 마한을 멸망시키고 비류가 새 마한왕이 되니 훗날 초대 진왕에 해당합니다.

진한은 만주에서 진국이 해체되면서 남하한 사람들입니다. 한반도 중부에서 백제와 서라벌국(초기 신라)을 만났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마한의 멸망만을 기록하고 잇는 것으로 보아 진한은 초기백제에게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은 저는 잘 모르고 2세기에 벌어진 진한의 역사는 알 수 있습니다. 2세기에 진한이 마한(백제)에 흡수됩니다.

진한이 마한에 흡수될 때 진한은 6국이었습니다. 진한 6국이 백제에게 흡수된 후 12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신라본기의 기록대로입니다. 2세기로 판단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신라군이 진한지역을 더 이상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2세기 후반이기 때문입니다. 제 책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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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는 2세기 중반 아달라이사금 후반부터 약해지기 시작하다가, 벌휴이사금 7년(190, 초고왕 25년) 진한지역에 마지막으로 진출한다. 이 후로는 더 이상 진한지역에 나가지 못한다.

․벌휴이사금 7年(190); 가을 八月, 百濟襲西境<圓山鄕>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이로부터 마한이 진한을 병합한 것이 2세기 후반으로 후한서와 삼국지가 한예가 강성해졌다고 한 시기와 일치한다. 삼국지나 후한서 한전은 桓․靈 之末(146-189)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즉, 2세기 중후반에 해당하는 후한의 환제, 영제 말년에 한예가 강성해져서 군현이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지 및 후한서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어느 왕 때인가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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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왜 진국이 한반도로 내려온 후 6국으로 분할되었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약돌님의 설명을 들으니 진한이 서라벌에게 망한 후 흩어져 6국으로 각기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2세기 후반에 백제에게 모두 흡수된 것이지요.

그러면 가야도 혹시 만주에서 남하하여 들어온 후 가야의 전신이 망하고 6국으로 흩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가야제국이 3세기초에 백제에게 흡수된 것이지요. 가야제국 중에서 백제에게 가장 먼저 흡수된 나라는 임나가야입니다. 그 시기는 3세기 초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2세기 초에 신라와 화해한 왜가 3세기 초부터 신라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백년의 화평이 깨진 이유는 임나 측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후 227년 3월 나머지 가야 7국이 백제에게 흡수됩니다. 따라서 한반도 동남부의 최대거점이던 임나가 3세기 초에 해양국가이던 백제에게 흡수된 후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27년에 멸망한 가야7국에 이미 흡수된 임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