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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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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
2004.03
▩절강성의 신라국 왕묘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7655 2004.03.08 02:18:01 (*.153.157.95) 신라사0 Comments 1192 Views 213 Voted / 0 Devoted
이른바 ‘월주(越州) 신라’를 다룬 일도안사님의 글을 읽은 사람은 신라인은 서기 9세기에야 당나라로 건너갔고, 그 때 절강성에 신라계 땅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그 증거로 서기 816년에 굶주린 신라 사람 “1백 70명”이 “절강동도(:절강성 동부)”로 몰려들었다는 기록(『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조)을 내세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도안사님이 아니라, 일도안사님의 이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지방 지리지인『절강통지(浙江通志)』에는 절강성 평양현(縣) 신라산(新羅山)에 신라 임금들의 묘당(:사당)이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절강성은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었고 절강성에 묻혔다는 신라 임금도 없어 이 기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미심쩍다면 김성호 박사님이 찾아내신『절강통지』의 기사를 읽어봅시다.
“현(縣 : 절강성 평양平陽현. 이 현의 동쪽에는 동중국해가 있다 - 조약돌)의 남쪽 2리에 <신라국 왕의 무덤이 있다>.”
―『절강통지』권 9 -21 ‘산천’조 (< >는 옮긴이)
“신라산(新羅山)은 현 남쪽 2리에 있으며, <신라국 임금의 묘당>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有新羅國王廟焉故名).”
―『절강통지』에 실린「평양현지(平陽縣志)」의 기사 (< >는 옮긴이)
절강성 동쪽에 신라(新羅) 임금의 ‘묘(廟)’가 있습니다. ‘묘(廟)’는 ‘사당(:신위를 모셔놓은 집)/묘당(廟堂. 임금의 조상들을 모신 곳)’이라는 뜻이므로 우리는 신라 임금들이 절강성 동남부의 뫼(:山)에 자신들의 조상을 모신 건물을 지었음을 알 수 있죠.
문제는 고고학 유물과『삼국사기』/『삼국유사』는 신라의 중심지가 경주라고 증언하고, 어떤 책을 뒤져봐도 신라 임금이 절강성에서 죽었다는 기사는 안 나오는데 어떻게 “신라왕”들이 절강성에서 선조를 제사지낼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신라 왕이나 왕족의 망명을 숨길 까닭이 없는 중국 사서의「신라전」도 신라 임금이 절강성으로 달아났다는 말은 안 함)
이 의문을 풀려면 김인문(: 신라 문무왕인 김법민의 아우)이 죽은 다음 절강성에 묻혔기에 신라왕묘가 세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석(昔)씨족이 절강성으로 건너가 식민지를 만들었고, 그들이 죽은 옛 왕들의 신위(:위패)를 한데 모을 곳이 필요해서 묘당을 세웠다고 봐야 하는데,
저는『삼국사기』와『신당서』가 전자를 부정하므로 후자를 지지하는 바입니다.
아시다시피 김인문은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의 왕족이고, 한때 당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신라로 보낸 적도 있어요(문무왕이 반당反唐 노선을 내세우자 당이 그 대신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려고 했기 때문임).
그러나 그는 신라로 오던 중 당나라로 되돌아갔고(『삼국사기』「신라본기」문무왕조), 왕위를 반납(『신당서』「신라전」)한 뒤 임해군공(臨海郡公)에 봉해졌기 때문에(「신라본기」문무왕조) 죽을 때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는 당의 수도인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고 신라 효소왕에게 - 왕이 아닌 -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와 그의 후손들을 제사지내는 곳을 “왕묘(王廟)”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냥 ‘사당(祠堂)’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그의 시신은 신라로 옮겨져 경주 서쪽에 묻혔으니(『삼국사기』「김인문전」), 김인문이 “신라국왕묘”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죠.
그래서 저는 ―『절강통지』와 박창범 교수님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
‘경주에 신라를 세운 석(昔)씨족이 남해의 항구와 제주도를 거쳐 주산군도(:상해上海시 앞바다에 있는 섬들)로 건너갔고, 일단 그곳에 식민지를 세운 뒤 영역을 절강성 동쪽까지 확장했다. 그들은 중심지를 절강성 평양현으로 옮긴 듯하며, 그 때문에 평양현 신라산에 신라 임금들을 모시는 묘당이 나타났을 것이다.
(경주의 고분군도 월성과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신라산은 이집트에 있는 왕들의 계곡처럼, 신라 왕족과 귀족이 묻히던 공동묘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어쩌면 신라산에서 절강성 식민지의 신라왕들이 묻힌 무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식민지의 지도자를 “왕(王)”이라고 부른 사실로 미루어볼 때, 식민지는 <또다른 왕국>이었으며 경주의 이사금과 절강성 식민지의 “신라국왕”은 백제 진왕(辰王. 일도안사님의 글을 참고하기 바람)과 해외 담로를 다스리는 담로주(檐魯主. 담로를 다스리는 제후. 김성호 박사가 만든 역사용어임)의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유지했으리라.’
는 결론을 내립니다.
Comment : 1, Read : 66, IP : 218.153.157.129
- 2004/02/03 Tue 20:51:03 에 올림 → 2004/02/03 Tue 21:00:23
▩덧붙임 : 저는 일도안사님이 '월주신라'라고 부르는 나라를 '절강성의 신라 식민지' - 줄여서 '절강성 식민지' - 라고 부름을 밝힙니다 - 2004/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