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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2008.11
신묘년조 논쟁의 종식을 위하여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63547 2008.11.08 19:43:28 (*.68.174.111) 고구려사0 Comments 416 Views
밴년이상 지속되어온 광개토왕비 해석 논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391년의 사건을 기록한 신묘년조입니다.
이에 대하여 백년동안 가능한 판독이란 판독은 다 나왔습니다. 백년동안 나올 수 있는 한자용례는 다 나왔습니다. 백년동안 가능한 모든 해석은 다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누구나 납득시킬만한 해석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묘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개토왕비문에 신묘년이라고만 적힌 사건의 연도가 신묘년 봄 3월이었다는 것까지 압니다. 앞으로 삼국지 동이전과 무령왕릉지석 등을 들이대며 신묘년조 논쟁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결론은 당시 일본서기의 응신은 여구-여휘를 잇는 금강유역의 백제왕(칠지도 보낸 나라 왕)이었고, 진사왕은 백제를 구성하던 삼한의 여러 소국들 중 한강유역에서 고구려를 방어하던 마한지역의 최대 실력자로 백제왕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진사왕이 의도한대로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백년동안 가능한 판독이란 판독은 다 나왔습니다. 백년동안 나올 수 있는 한자용례는 다 나왔습니다. 백년동안 가능한 모든 해석은 다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누구나 납득시킬만한 해석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묘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개토왕비문에 신묘년이라고만 적힌 사건의 연도가 신묘년 봄 3월이었다는 것까지 압니다. 앞으로 삼국지 동이전과 무령왕릉지석 등을 들이대며 신묘년조 논쟁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결론은 당시 일본서기의 응신은 여구-여휘를 잇는 금강유역의 백제왕(칠지도 보낸 나라 왕)이었고, 진사왕은 백제를 구성하던 삼한의 여러 소국들 중 한강유역에서 고구려를 방어하던 마한지역의 최대 실력자로 백제왕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진사왕이 의도한대로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