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판독에서 백잔 다음 빈칸의 羅자 앞이 新자가 맞습니다. 탁본에서 新자의 오른쪽 변 斤자가 확실히 보입니다. 그러면 '백잔 OO 신라'인데, 가운데 OO 두 글자를 저는 잔국토벌을 기록한 일본서기 응신 7년 9월조를 보고 임나로 추정하였습니다. 참고로 가야는 나올 수 없습니다.


비문은 전쟁 이후 처리를 위한 기념물입니다. 수묘인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그렇고 전쟁업적이 모두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대군을 출동할 때는 반드시 어쩔 수 없이 출동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많은 고구려인들이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왜 죽었는가에 대한 답변서이기도 합니다.


잔국토벌의 토벌은 말 그대로 상대가 없어져야 하므로 단순한 침공과 다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응신조는 396년 9월부터가 일본열도 기록이고 그 이전은 한반도 기록입니다. 따라서 영락 6년에 잔국이 토벌되었다는 표현은 정확합니다. 그리고 다음 달인 396년 10월부터 신무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정벌을 떠납니다. 이 신무의 군대란 응신 9월조에 나오는 고구려군, 백제군, 신라군, 임나군으로 편성된 연합군을 뜻합니다. 잔국이 토벌된 시점을 달까지 따지면 응신조의 왜국기록 출현 1달 전인 영락 6년 8월입니다. 이 기록과 별도로 왜 영락 6년 가을에 고구려군이 아산만에 상륙해야만 하는지는 제 책에 자세히 적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영락 1년인 신묘년조는 영락 6년 잔국토벌에 대한 명분조입니다. 392년부터 고구려가 잔국토벌을 위한 전쟁에 들어가기 때문에 명분조가 392년 이후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물물님 질문의 핵심은 왜  하필 그 이전은 안 되고 신묘년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묘년에 한반도 남부 특히 왜국(삼한백제)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논의의 핵심일 것입니다. 만일 신묘년에 왜국이 백잔과 신라를 비롯하여 삼한을 통치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면 충분히 명분이 됩니다. 잠시 연표를 보겠습니다.


385, 을유, 고국양2, 진사1,
386, 병술, 고국양3, 진사2: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387, 정해, 고국양4, 진사3: 말갈과 백제의 전투

388, 무자, 고국양5, 진사4

389, 기축, 고국양6, 진사5: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390, 경인, 고국양7, 진사6, 응신1: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

391, 신묘, 영락1, 진사7, 응신2: 응신이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하여 삼한의 지배권을 확보함.

---------------------------------------------------------

392, 임진, 영락2, 아신1, 응신3: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393, 계사, 영락3, 아신2, 응신4: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

394, 갑오, 영락4, 아신3, 응신5

395, 을미, 영락5, 아신4, 응신6

396, 丙申, 영락6, 아신5, 응신7: 잔국토벌, 9월 응신조에 왜국 최초 출현

397, 무술, 영락7, 아신6, 응신8


삼한의 진왕은 자립위왕하여야 전체를 아우르는 통치자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비록 명목상의 왕일지라도 진왕은 한반도 중남부를 통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응신은 390년 경인년에 왕이 되었으나, 그 다음 해인 391년 신묘년 봄 3월에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합니다. 즉 왜국의 응신이 백잔, 임나, 신라 등을 아우르는 진왕이 된 것은 신묘년이라는 뜻입니다. 신묘년에 응신이 자립위왕하였으니 모두 복종하라는 통고가 사신을 통해 한반도를 비롯한 전 백제 영역에 시달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문에 신묘년이라고 적힌 사건의 달은 봄 3월입니다.


조금 만족할만한 답변이 되었는지요? 일본서기를 보면 392년의 진사왕 실각도 진사왕이 응신의 자립위왕을 보고 자신도 자립위왕하고 백제왕을 칭하려다 발생한 사건입니다. 391년 신묘년에 응신이 자립위왕한 사건의 파장이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상당히 크게 퍼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