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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답변] 백제 비유왕의 죽음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60169 2008.10.30 13:21:29 (*.147.81.244) 백제사1 Comments 374 Views
비유왕은 삼한백제계열로서 한성백제 왕위를 장악한 인물입니다. 왜국도 삼한백제계열이지만 둘의 차이는 왜국은 영락 6년과 10년에 일방적으로 밀리다 패한 집단이고, 한성백제는 영락 17년에 대규모 기갑군단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맞선 집단입니다.
비유왕의 나이는 일본서기에서 확인 가능한 곤지(웅략)의 나이로부터 역산하면 전지왕과 비슷하여 4세기 후반 출생입니다. 백제본기는 유일하게 庶子표현을 썼는데 庶子는 왕통이 완전히 바뀌고 여인을 통해서도 이전과 연결되지 않는 경우로 생각됩니다. 만일 부자관계는 아니지만 여인을 통해 연결되면 제2자입니다.
그러면 비유왕대의 주요사건의 연표를 보겠습니다.
427; 비유1, 눌지11, 장수15: 한성백제에 진왕백제계열(扶餘隆 百濟 辰朝人也)인 부여씨 왕통시작
428; 비유2, 눌지12, 장수16: 백제본기 마지막 왜국기록, 반정(아지왕, 珍)이 왜국의 정권을 장악함. 패배한 세력이 백제로 도망오고 왜국과의 관계가 단절됨, 이후 일본서기에서 백제가 사라지고 왜국의 도독주장 시작
429; 비유3, 눌지13, 장수17: 백제가 송에 조공, 백제-왜국의 외교전 시작, 진왕계인 여신이 죽고 한성백제 구왕족인 해구가 상좌평이 됨
432; 비유6, 눌지16, 장수20
433; 비유7, 눌지17, 장수21: 백제가 신라에 화친을 청함
434; 비유8, 눌지18, 장수22: 신라와 선물교환
435; 비유9, 눌지19, 장수23
449; 비유23, 눌지33, 장수37
450; 비유24, 눌지34, 장수38: 신라와 고구려의 우발적 충돌과 신라의 사과
451; 비유25, 눌지35, 장수39
452; 비유26, 눌지36, 장수40
453; 비유27, 눌지37, 장수41
454; 비유28, 눌지38, 장수42: 8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을 침범
455; 개로1, 눌지39, 장수43: 9월 흑룡이 출현하고 백제왕이 죽음.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가 구원. 비유왕의 長子인 개로왕 즉위, 백제본기 기록공백 14년 시작
삼국사기를 보면 차마 붓으로 표현화기 어려운 사건인 경우에 용의 등장 같은 기이한 현상으로 이를 대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부식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되는 기록들은 모두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들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신라본기의 용 출현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첨해 3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첨해 7년 여름 4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우로는 첨해 7년 4월에 죽었는데 전해 내려오는 중에 기록이 잘못되어 첨해 3년조에 옮겨 가 있습니다. 기록의 위치가 이동했음은 열전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앞으로의 설명에서는 이 글을 읽는 독자정도면 근거를 다 안다고 보고 과거에 나온 중복되는 근거설명은 생략합니다.
정변이 발생해도 통상 황룡은 좋은 소식이고, 흑룡은 나쁜 소식이며, 그냥 용은 판단하기가 어려운 경우입니다. 왕족인 석우로의 죽음이 흑룡이 아니고 그냥 용인 것은 이로 인하여 미추가 경쟁자를 제거하고 즉위에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2] 다른 백제본기의 용 출현 예를 보겠습니다.
*기루왕 21년: 여름 4월, 두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기루왕조는 21년을 경계로 앞과 뒤의 통치자가 다릅니다. 대 신라정책도 전쟁에서 화친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한 명에게만 백제왕의 시호를 준 것은 앞의 통치자는 자립위왕을 못하고 죽었고 뒤의 통치자는 자립위왕에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을 통치하던 왕이 21년째에 죽고 정변이 일어나 새로운 통치자가 들어선 후 신라 지배층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였을 것입니다. 신라본기는 왕비기록이 거의 다 있고 백제본기는 왕비기록이 거의 다 없는데, 그 이유는 백제는 담로제로 통치하였으나(주로 다른 소국과의 혼인을 뜻함) 신라는 담로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주로 자국 내에서 왕비를 택함).
온조왕조에 왕모는 나옴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안 나오는 이유는 담로제 때문입니다. 다루왕조에 왕비가 안 나오는 것도 담로제의 흔적입니다. 기루왕조에 왕비가 안 나오는 것도, 개루왕조에 왕비가 안 나오는 것도 다 담로제의 흔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백제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담로제로 덥혀 있습니다.
개루왕 후반기를 통치한 인물은 신라 지배층인 길선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려 했으나 길선의 지위가 너무 낮아 결국 실패합니다.(박창화의 기록은 정말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무려 35년을 자립위왕 하지 못하자 한성백제는 진왕(백제왕)의 통치를 받는 마한의 1국으로 떨어집니다.
[3] 일본서기는 통치자가 죽었을 때 기이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까지는 삼국사기와 같으나 용이 아닙니다.
*인덕 58년(425) 여름 5월, 황릉의 송림 남쪽 길에 갑자기 떡갈나무 둘이 나타났다. 길을 사이에 두고 둘은 끝이 합쳐져 있다.
이 기록이 인덕의 죽음이 되는 근거는 독자들이 다 아실 것으로 보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인덕의 통치가 사라진다. 능 쌓는 기록들이 나온다. 지방 세력들이 발호한다. 오국과 고구려국에서 조문사가 온다. 왜왕 讚이 죽는다. ... 등등)
*웅략 22년(477) 가을 7월, ... 큰 거북을 잡았다. 거북이 갑자기 여자로 변했다. 여자를 부인으로 하였다. 같이 바다 속에 들어갔다. 신선을 차례로 보았다.
이 기록이 웅략의 죽음이 되는 이유도 독자들이 이미 다 아실 것이므로 제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갑자기 황태자를 세운다. 웅략이 몸이 아파서 국정을 못 본다. 다음 해에 왜왕 武의 국서가 가는데 내용이 비통하다. 문주왕 3년(477) 가을 7월, 내신좌평 昆支卒, ...등등)
자, 이제 본론을 보겠습니다. 비유왕은 한강일대만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비유왕이 한 일은 지방 세력(담로)들을 포섭하는 일이었습니다. 위세품을 지방 세력에게 보내고 이제 나를 새로운 진왕(백제왕)으로 받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한성백제 양대 통치세력인 해씨(부여계)와 진씨(말갈계)의 반발이 있고 나아가 전국의 담로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http://www.histopia.net/zbxe/8766
비유왕이 죽을 때 흑룡이 나타났다는 것으로부터 외부의 침범이 아니라 내부 정변으로 죽었다고 보는데, 아마 왕권강화와 관련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백제에서 비유왕이 즉위할 때 왜국에서는 아지사주가 정권을 잡고 인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운 후 일본서기에서 백제가 사라집니다. 비유왕은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 드문 백제왕입니다. 비유왕의 죽음이 고구려나 왜국 같은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백제의 내부문제로 보는 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 번째 근거:
사건의 순서가 비유왕이 455년 9월에 죽고 고구려는 10월에 백제를 침범합니다. 즉 백제에 내부혼란이 발생하자 고구려가 바로 행동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 침범이 고구려본기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백제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작은 규모의 침범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왕이 죽은 상태에서 당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작은 군사의 침범이라도 중대한 것이지요.
두 번째 근거:
개로왕 21년조를 보면 고구려 승 도림이 말하기를 선왕의 유골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외부문제라면 이런 일은 안 생깁니다. 비유왕의 유골이 있는 지점이, 즉 비유왕이 죽은 장소가 개로왕의 직접 통치지역이 아니라서 유골을 수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가서 유골을 수습하려면 그 지역의 통치자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성백제가 금강유역을 통치하게 되는 것은 문주왕이 남하하며 신라에서 데려온 1만 기병대로 웅진을 점령하면서부터입니다.
세 번째 근거:
비유왕의 죽음이 내부문제인 왕권강화라고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자립위왕에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들인 개로왕이 비유왕의 長子라는 것으로부터 추정이 가능합니다. 만일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으면 개로왕은 전지왕처럼 元子이거나, 성왕처럼 그냥 子이거나 그랬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왕 7-8년의 신라와의 화친 기록은 혼인이 아닙니다.
네 번째 근거:
개로왕이 즉위 후 14년 동안(455-468) 기록이 없는 이유도 내부 정리가 안 되어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14년 동안 왜국은 예전의 진왕국 행세를 하였고 개로왕은 예전의 담로국처럼 지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바뀐 계기는 곤지를 왜국에 보내 진왕(왜왕)으로 세운 461년 이후라고 봅니다. 재위 18년째에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각 지역 담로들의 독자성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타협을 맺고 있습니다. 내부 정리가 어느 정도 된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