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o Korean History+새한국고대사
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첨부파일은 hwp, zip, jpg, gif 만 가능합니다.
※첨부파일은 hwp, zip, jpg, gif 만 가능합니다.
글수 941
26
2008.10
2008.10
말갈의 묘제와 관련해서..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57575 2008.10.26 10:16:44 (*.135.218.179) Q&A4 Comments 414 Views
고이왕 시절을 김상님은 말갈백제라 하여 말갈세력이 한성백제의 중심세력으로
들어온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삼한사의 재조명이나, 네티즌고대사에서 보이신대로
고이왕 시절 갑자기 말갈과 백제가 매우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갈의 묘제라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한성에 남아있는 적석총 양식은 전형적인 고구려양식인데 반해
말갈이 고구려 못지않은 적석총을 갖고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측에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조사한 말갈의 무덤양식을 보면,
토광수혈봉토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발해건국전후에 말갈의 적석봉토분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양식도 일정치 않구요..
구당서 말갈전에도, "죽은자는 땅을 파고 묻으며, 시신 위에 흙을 덮는다. 관이 없이 시신을 수습한다."
(死者穿地埋之, 以身천土, 無棺斂之具)고 하여 토광묘의 형태로 전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합니다.
말갈 이전의 숙신, 읍루, 물길의 묘제 역시 토광수혈묘로 알려져 있고,
말갈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여진족이나 만주족 역시 적석총 형태의 무덤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또 국내에 말갈이 남긴 적석총에 대한 기록이나 발굴도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고이왕 시기에 등장하는 한성의 적석총 양식의 무덤들을
말갈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고이왕 대에 말갈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것같다고 해서 곧 말갈이 한성백제의 중심세력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될 수도 있고요.
더구나 님께서는 말갈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드는 것도 비교적 후대로 보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말갈이 애초부터 적석총 양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한성에 들어와 남겼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말갈의 무덤양식과는 맞지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들어온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삼한사의 재조명이나, 네티즌고대사에서 보이신대로
고이왕 시절 갑자기 말갈과 백제가 매우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갈의 묘제라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한성에 남아있는 적석총 양식은 전형적인 고구려양식인데 반해
말갈이 고구려 못지않은 적석총을 갖고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측에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조사한 말갈의 무덤양식을 보면,
토광수혈봉토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발해건국전후에 말갈의 적석봉토분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양식도 일정치 않구요..
구당서 말갈전에도, "죽은자는 땅을 파고 묻으며, 시신 위에 흙을 덮는다. 관이 없이 시신을 수습한다."
(死者穿地埋之, 以身천土, 無棺斂之具)고 하여 토광묘의 형태로 전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합니다.
말갈 이전의 숙신, 읍루, 물길의 묘제 역시 토광수혈묘로 알려져 있고,
말갈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여진족이나 만주족 역시 적석총 형태의 무덤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또 국내에 말갈이 남긴 적석총에 대한 기록이나 발굴도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고이왕 시기에 등장하는 한성의 적석총 양식의 무덤들을
말갈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고이왕 대에 말갈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것같다고 해서 곧 말갈이 한성백제의 중심세력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될 수도 있고요.
더구나 님께서는 말갈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드는 것도 비교적 후대로 보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말갈이 애초부터 적석총 양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한성에 들어와 남겼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말갈의 무덤양식과는 맞지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갈은 3세기 한강유역에 살던 사람들이고 말씀하신 당서의 말갈은 7세기 북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입니다. 삼국사기든 당서든 똑같이 말갈로 기록되었으면 3세기 한강유역과 7세기 북만주의 장례양식이 같아야지 왜 다르냐는 질문으로 이해합니다.
말갈문제는 질문이 항상 가장 근본적인 곳, 즉 말갈의 정체성으로 갑니다. 정체성이 무엇이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갔느냐는 의문입니다. 몇가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건국과 동시에 나오는 말갈이 중국사서에는 고구려의 평양남천 이후에 나옵니다. 따라서 3세기에 백제가 만난 말갈은 경기북부지역이나 고구려의 평양남천 이후에 나오는 말갈은 북만주의 말갈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둘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릅니다. 인용하신 당서의 말갈기록은 7세기 이후입니다. 이때는 고구려의 묘제도 적석총을 벗어나 봉토분으로 바뀝니다.
고이왕조의 출현과 관련된 고고학적 문제는 3세기의 말갈묘제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3세기는 아직 중국사서에 말갈이 독립된 세력으로 대두하기 훨씬 전으로서 고구려의 평양남천 이전에 말갈이 중국사서에 독립된 세력으로 나오지 않는 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첫번째는 고구려의 중심이 만주에 있었으면서 북만주 지방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당시는 말갈이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문화적인 면인데 5세기 후반까지 둘 간에 문화적으로 구분이 가지 않아서입니다. 중국왕조에서 볼 때 어디까지가 고구려이고 어디까지가 말갈인지 나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상징인 묘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원인, 즉 정치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은 사실은 별개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세기 고이왕조의 출현과 관련된 말갈은 아직 고구려의 독립된 지방 세력으로 대두하기 전입니다. 따라서 말갈의 묘제도 고구려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그렇게 보는 이유는 삼국사기 고이왕조가 보이는 기록은 고구려의 복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말갈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로 들어온 말갈계는 말갈의 본류가 아니고 지류입니다. 일반적으로 지류가 본류보다 고 문화를 더 오래 보존하므로 이들은 4세기까지 고구려 양식을 상당기간 유지하고 있었겠지만, 만주의 말갈본류는 그 이전부터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다 고구려의 평양남천 이후에 북방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자 이들이 중국왕조에 고구려와 구별되는 세력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독립은 문화적인 독립과도 연결되어 묘제도 고구려양식이 아닌 자신들 고유의 묘제를 보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갈이 중국왕조에 보낸 국서 중에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당시는 眞씨를 중심으로 말갈계가 백제의 주축세력으로 성장하여 한반도 및 요서에서 고구려와 대립하던 때이므로 충분히 나올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말갈관련 글을 몇개 올렸는데 검색해보니 쓴 2개가 있습니다.
http://www.histopia.net/zbxe/17668
http://www.histopia.net/zbxe/17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