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님. 제 평범한 글(「▩[답변]신라인의 천자국(天子國) 인식」)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 보잘것없는 답변이 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이번에는 수로왕의 성씨와 수로왕의 계통(그러니까 가야인의 계통)에 대해서 물어보셨으니,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그 질문에 간단히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수로왕의 성씨에 대해서인데요, 저는 전기가야의 왕들(수로왕/이진아시왕/나머지 형제들)이 김(金)씨였다는 주장에는 회의적입니다. 먼저 '수로(首露)'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시호일 가능성이 높고(『가락국기』에는 "수릉首陵은 죽은 뒤의 시호"라고 했는데, 이 구절 앞에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거나 수릉首陵이라 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둘은 같은 말을 이두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야사를 다룬 다른 기록에는 수로왕의 이름이 '뇌실청예'로 나오고, 그의 형제인 대가야 시조(이진아시왕)의 이름은 '뇌실주일',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름은 '이비가'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김(金)'이란 성씨는 전기가야 시절에는 쓰인 적이 없고, 서기 6세기경 신라의 모씨족(경주김씨)이 성을 '모'에서 '김(金)'으로 바꿀 때,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행동을 본받아 가야의 왕실도 성을 김(金)씨로 바꾼 게 아니냐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볼 수 있습니다(『가락국기』에도 서기 5세기의 금관가야 왕인 '좌지왕'이 계림국[:신라]의 신하인 박원도의 말을 듣고 첫 왕비를 내쫓은 사례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후기가야 시절에는 전기가야 시절과는 달리, 가야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 신라가 가야에 영향력 - 내지는 압력 - 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김이라는 성씨는 후기가야 시절부터 쓰인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전기가야 왕족의 성이 무엇이었는지는 불행히도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름은 '이비가'인데 아들의 이름은 '뇌실청예'인 것을 보면 이씨도 뇌실씨도 아닌 것은 분명한데, 사료가 부족하니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사료가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죠.


비록『가락국기』가 인용한『개황력』에서는 "성은 김씨니 대개 시조가 황금 알에서 난 까닭에 금을 성으로 삼았다."는 말이 나오지만, 이는 신라의 경주김씨들이 훗날에『국사』를 정리하면서 설명한 김씨의 유례(김알지 신화)와 마찬가지로 건국신화에 성씨의 유래를 적당히 갖다 붙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상이 전기가야의 왕성(王姓)을 보는 저의 시각입니다.


(사족이지만 가야의 왕족은 박씨가 될 수 없습니다. 박씨는 - 저와 일도안사님이 고증하였듯이 - 오환족이고 애초에 가야 왕족과는 계통이 다르니까요. 박씨족과 서나벌의 유래가 궁금하시면 이 게시판에서 '신라사'라는 카테고리로 글을 찾아서, 제 글을 읽어보세요)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할 차례군요. 독도 님이 약간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일도안사 님의 학설과 반대되는 내용을 주장한 게 아닙니다. 저 또한 가야인(저는 수로왕이 김해애서 가야를 다시 세우기 전의 가야를 '원原 가야'라고 부릅니다)이 북(北)아시아의 유목민(또는 수렵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의 '탄생'(하강) 과정이 전형적인 시베리아 원주민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강상파부(에가미 나가오) 교수의 글에 따르면,


"과거 시베리아에서도 부족이나 씨족의 대표로서 신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여겨왔던 무자(巫者)나 무녀(巫女), 즉 샤먼(Shaman)이 되기 위한 의식이나, 이와같이 한 시대에 가장 최고의 직위에서 백성을 다스려야 할 지도자를 머든 민중으로 하여금 가장 위엄있고 존경스러운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기마민족의 왕 즉위시 새로 추대된 왕이 특별한 모전(毛氈), 즉 양탄자에 태워진 채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기마민족들 사이에 있어서 지상의 인간이 천신의 아들, 즉 신령(神靈)으로 바뀌기 위한 성스러운 도구였음이 틀림없다는 기록(전설)과 같으며, 따라서 천손강림이라는 표현으로 된 가락국 수로왕이 홍포(붉은 베)에 싸여 구지봉에 강림했다는 설과『고사기』에 일본 천황의 시조가 후스마(이불)에 싸여 다카치호미네에 강림했다는 설은 기마민족설의 경우보다 좀더 위엄있고 신비스럽게 표현된 것(김향수의 책에서 재인용)"


이라고 합니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지도자(제사장이나 왕, 족장)을 양탄자 위로 올라가게 한 뒤 양탄자를 흔들어 지도자가 정신을 잃고 튀어올랐다가 떨어지게 하고, 그 뒤 그를 이불이나 옷감으로 덮은 뒤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의식을 치렀는데, 그런 의식이『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 하강 과정과 비슷하다는 것이지요(충격에서 깨어남 = 다시 태어남으로 풀이할 수 있음). 그래서 저는 원 가야인이 원래는 수렵과 목축을 겸한 북아시아계 민족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 신화가 전기가야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야가 변한의 식민지이던 시절(서기 3세기 이후)이나, 흉노계 선비족들이 대거 밀려온 서기 4세기 이후(계림국이 세워진 때)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저는 이 가설을 내다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저는 원 가야인의 왕족이 이런 정체성을 유지한 체 마한의 왕족인 청주 한(韓)씨의 신하(또는 제후)가 되었고, 그 관계가『숭선전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백년 동안 유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마한('기'나라 - 기자조선 - )의 신하가 된 까닭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기자족이 팽창하면서 기존의 세력들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굴복한 것인지, 아니면 원 가야인이 얻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단 말이지요). 이것도 앞으로 새로운 사료가 더 나와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부디 이 글이 답변이 되었기를 빕니다.


※참고자료


―『삼국유사』


―『일본은 한국이더라』(김향수, 문학수첩, 서기 19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