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님. 질문하신지 아흐레(9일)가 지난 뒤에야 님의 질문에 답하는 글을 써서 정말 죄송합니다(하지만 저도 대학원 졸업 논문을 준비하느라 바쁘답니다).


우선 님의 질문에 단도직입적으로, 거두절미하고 대답을 하자면, 신라 정부가 자신들의 군주를 '황제'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님이 말씀하신 대로 신라의 금석문에는 '왕'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신라(서나벌, 사로국, 계림국 포함)의 군주를 모두 '왕'이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부르지 '황제'로 부르지는 않거든요.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한 뒤부터는 '황제'라는 칭호를 더더욱 쓸 수 없었겠지요. (일찍이 일도안사 님이 인용하신 진순신 선생의 말에 따르면, 중국 왕조는 다른 나라의 군주가 스스로를 '신하'라고 일컬은 외교문서만 받아들일 정도로 호칭에 집착했으니까요) 게다가 신라가 당나라와 접촉한 뒤의 상황을 다룬『삼국사기』기록을 보면 신라의 군주는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부르지 '짐(朕. 천자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황제라는 말은 정부의 공식 역사기록이나 외교문서에 쓰이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삼국사기』를 정리한 김부식의 설명에 따르면, 신라의 관리이자 지식인이었던 최치원의 역사책『제왕연대력』에도 '왕'이라는 명칭만 쓰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화랑세기』에 '제(帝)'라는 말이 쓰인 건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보실 겁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비록 '황제'라는 말은 안 썼지만, 신라인은 자신들의 군주를 '천자(天子)'라고 여겼고 자신들의 나라를 '천자의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라 왕실이 당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제후국과 같은 체제를 갖춘 뒤에도, 지배층과 민간인들에게는 그런 의식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고 말입니다.


게다가『화랑세기』는『삼국사기』와는 달리 외국에도 보여주는 역사책이 아니라, 신라 안에서만 유통된 책이었고, 그것도 화랑 가문과 신라 귀족 계층이라는 한정된 독자층을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호칭을 쓸 때 외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자신들의 군주를 '제(帝)'라고 불렀던 것입니다(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자신들의 군주를 '하늘의 황제(天皇)'라고 불렀던『고사기』와『일본서기』도 자신들의 역사를 외국에 소개하려고 만든 역사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호칭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처음부터 이렇게 저자세를 취한 건 아니었습니다. 박씨족의 군주는 복속된 6촌(6부) 사람들에게 '천자(天子)'라고 불리웠고(『삼국유사』「기이」<신라시조 혁거세왕> 조), 석씨족은 탈해이사금의 죽음에 오직 천자의 죽음에만 쓸 수 있는 '붕(崩)'이라는 낱말을 썼으며(『삼국유사』「기이」<탈해왕> 조) ― 다만 박씨족이나 김씨족과는 달리, 석씨족은 스스로를 "용왕의 자손"이라고 하지 "하늘의 자손"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 , 계림국을 세운 김씨족(모씨족)은 아예 연호를 스스로 만들어 쓰고 군주가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불렀으며 군주의 여행에 '천자가 제후의 땅을 두루 다니며 그곳의 현실과 민심을 살펴보는 일'이라는 뜻을 지닌 '순수(巡狩)'라는 말을 쓸 정도였으니까요(진흥왕 대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마운령 비의 비문과 황초령 비의 비문에는 "짐朕"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진흥왕이 "'朕이라 자칭(노용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김씨족은 당나라의 추궁을 받기 전에는 군주를 '제왕帝王'이라 불렀고, 군주는 스스로를 '짐'으로, 다시말해서 '천자'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이랬던 까닭은 신라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상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대외적(對外的)으로는 당시에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맺고 있던 중국(中國) 남북조(南北朝)의 여러 군주(君主)들과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지 않았나(노용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고구려 ․ 백제의 합동공격을 받고 궁지에 몰리게 되자, 신라는 두 나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당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그 때 신라의 연호 사용과 군주에 대한 칭호를 알게 된 당나라는 이를 트집잡았죠. 국가의 생존과 강대국의 원조를 우선시해야 했던 신라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천자국으로서의 위상을 포기하고, 대신 형식적인 제후국 체제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당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여서 쓰게 되고 군주에 대한 호칭도 '왕'으로, 왕은 스스로를 '과인'으로 부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신라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나라를 '신의 나라', 즉 "신국(神國)"이라고 부르는 의식(『화랑세기』)이 남아 있었고, 이런 생각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자 군주를 황제(皇帝)라고 부르는 천자국 체제가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고려의 군주는 발해나 베트남처럼 밖으로는 '왕'이라고 칭하고 안으로는 '황제'라고 칭했지요).


(물론 왕건의 집안인 개성 왕씨가 신라의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애초에 갖추고 있지 않았던 권위를 만들어내느라 천자를 자칭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호족과 백성들의 마음속에 그와 비슷한 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이 글이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연구』(노용필, 일조각, 서기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