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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다른 삼국유사의 미사흔 볼모 기록

신라사 조회 수 121 추천 수 0 2019.05.10 15:13:25
一道安士 *.194.45.182

삼국사기를 보면 내물이사금의 아들인 미사흔왕자는 실성이사금이 즉위하던 402년에 왜국에 볼모, 즉 인질로 보내졌다. 403년에 응신이 웅습을 정벌하다 화살에 맞아 죽기 때문에 402년은 응신의 재위기간이다. 인질로 간 이유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잔국토벌로 신라/가야 땅에 백제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제 때에 왜국으로 건너오지 못하자, 바로 전 해인 401년에 응신이 군대를 보내 내물이사금을 위협하여 피난민들의 도해를 도우라는 보장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 사건이 신공즉위 전년조에 실린 신라정벌이다.


미사흔은 왜국에서 19년을 머물다가, 인덕이 새 왕후를 세우고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 거국적 축하분위기에서 정치범에 대한 대사면을 단행한 418년에 신라로 귀국한다. 418년은 눌지왕 2년으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연도까지 일치한다. 따라서 미사흔이 가고 오는 두 시점에 대해서는 명확하여 더 이상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보면 이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내물왕과 김제상

  제 17대 내물왕 36(那密王 卽位 三十六年 庚寅, 391년, 신묘년) 왜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나타내기 바랍니다." 라 하였다이에 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못하였으므로 내신인 박사람(朴娑覽)을 부사로 삼아함께 보냈다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를 아니하였다.

(중략)

  눌지왕 10(426) 왕이 친히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 호협한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는데술이 세 순배 돌게 되자 모든 음악이 시작되었다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옛날 아버님께서는 성심으로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먼 곳으로 보냈다가 다시 못 보시고 돌아가셨고 내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이웃 나라의 군사가 강하여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고고구려가 화친을 맺자고 말했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었다그런데 고구려에서도 아우를 억류해 놓고 보내지를 않고 있으니내 아무리 부귀를 누린다 하여도 일찍이 그 하루라도 이 일을 잊지 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고만일 두 아우를 만나보고 선왕의 사당을 보게 된다면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소누가 능히 이 계책을 이룰 수가 있겠소."  

  이 말을 듣고 백관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반드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합 니다.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의 태수로 있는 제상이 가할까 합니다." 하였다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묻자 그는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미사흔이 391년에 인질로 갔다가 눌지왕 10년인 426년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질기간이 36년인데 30년이라고 하고 있어 자체로도 6년이나 틀린다. 길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30년이 아니라 오히려 40년이라고 해도 된다. 삼국사기에 눌지왕 10년은 기록이 없는 해다.


나는 그 동안 이에 대하여 삼국유사의 단순오류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내용을 쓸 때 일연은 당시 고려 최고의 석학으로 이미 삼국사기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삼국사기와 모순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도 다르게 썼다. 


삼국유사 기록들 중에 눌지왕 十年은 눌지왕 一年의 오자라고 본다. 눌지왕의 저런 이야기는 보통 즉위했을 때 하는 말이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박제상이 왜국에 보내졌다가, 1년 후인 눌지왕 2년에 미사흔을 귀국시킨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일본서기가 모두 일치한다.


그런데 떠난 시점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402년인가? 아니면 삼국유사의 391년인가? 왜국에 머문 기간이 19년이 아니라 30년이라고 하는데 만일 391년에 왜국에 갔다면 418년에 돌아오므로 머문 기간이 28년이므로 대충 30년이라고 해도 맞는다. 거기에 박사람이라는 인물을 함께 보냈다고 하고 있다. 추가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고 성이 박씨인 것을 보면 이 사람도 지배층이다. 미사흔의 나이가 당시 10살이라고 나이까지 적었는데 귀국할 당시에는 거의 40세였을 것이므로 형인 눌지왕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어 합리적이다. 


그런데 인질이 말과 행동이 익숙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가? 인질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말과 행동은 외교행위를 할 때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거기에 왜 지체 높은 귀족이 부관이 되어 인질을 따라가는가? 왕자를 표면에 내세우지만 결국 자신이 실무를 다 본다는 말이 아닌가? 삼국유사의 인질로 가는 시점에 대한 기록은 인질이 아니라 외교행위에 가까운데, 그 외에는 전체적으로 논리에 무리가 없는 합리적 기록이다.


391년은 웅진성에서 응신이 왕후를 세우고 대외적으로 삼한의 지배자인 백제왕이 되었음을 선포한 해다. 이른바 신묘년이다. 진왕이 전 백제권의 소국들에 사절을 보내 공립을 알리고, 이를 받은 소국들은 축하사절을 보냈을 것이다. 일본서기 웅략조를 보면 웅략이 진왕으로 즉위하자 중국 남부의 吳國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측위 축하사절이 온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원수의 취임식은 외교무대의 큰 장이다. 혹시 이때 신라에서 미사흔과 박사람을 축하사절로 보낸 것은 아닐까? 402년에 하필 왕자들 중에 미사흔이 왜국에 가는 볼모 선택된 것도 혹시 이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391년 축하사절 기록이 나중에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한 것을 강조하다 보니 이때부터 볼모 생활을 한 것으로 변하여 삼국유사에 남게 된 것은 아닐까?


내물이사금은 392년에 고구려에 실성을 볼모로 보낸다. 하필 392년인 이유는 간단하다. 391년에 응신이 왕후를 세우고 공립되어 삼한의 지배자인 백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라도 응신의 신민이 되었으니 고구려는 분노하여 신라를 응신쪽으로 가지 못하게 인질을 요구한 것이다. 신묘년조 기록은 이렇게 삼국사기 백제본기뿐만 아니라 신라본기 및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것이다.


4세기 이전에 웅진성에서 백제 진왕이 즉위할 때마다 전국에서 축하사절이 왔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진왕과 관련된 모든 직접적인 기록을 삭제해버렸지만 다행히 삼국유사에 흔적이 남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문제다.



댓글 '2'

카오스

2019.07.06 15:49:10
*.139.80.119

일도안사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그동안 안녕하셨지요?.. 카오스입니다.
여전히 의욕적인 연구를 지속하시는 것 같아 부럽기도하고 또 크게 성원드립니다.
모처럼 웹 검색하다가 ‘4말5초, 복호와 미사흔의 인질기간’에 대해서 안사님께서 곤란을 겪으시는 것 같아, 외람되지만(?) 아이디어 한가지 소개 드립니다. 한번 참고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우선,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보고있는 ‘통설’에서 ‘잘 못 해석한 부분’을 먼저 지적해 두는 것이 필요하겠군요... 즉, ‘삼국유사/紀異第一/奈勿王,金堤上/나물왕이 셋째 아들 미해를 일본에 보내다’란 내용의 원문,... “(전략)...長壽王又留而不送...至十年...乙丑王召集群臣及國中豪俠親賜御宴,...(후략)”에서 중간의 ‘至十年’은 앞문장[長壽王又留而不送]에 포함시켜 해석해야 하는데, 통설에서는 뒷문장[乙丑王召集群臣及國中豪俠親賜御宴]에 포함시켜 해석함으로서 첫 단추부터 삼천포로 빠지고 있습니다.

즉 이 문장[至十年]은, 앞문장에 붙여서 ‘장수왕이 또한 (寳海=복호)를 10년이 되도록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실제로는 복호가 419년에 돌아왔었으므로 (402~419=18년간;十數年) 억류된 것임]’로 해석하여야 하는데, 뒷문장에 붙여서 ‘19눌지10(426)년, 을축(425년)에...(이하생략)’으로 해석하게 되니 엉뚱한 ‘426년’이 갑자기 등장하게 되어서 스토리가 미궁속으로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참고 : 그리고 또, 바로 뒤의 ‘乙丑’은 425년인데, 이는 앞의 ‘至十年’을 426년으로 보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틀린 기록을 삽입한 것입니다. 머리좋은 일연선사의 친절함(?)에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일도안사께서는 내공이 있으시므로 그냥 통설을 따라 가지 않고, 슬그머니 무시해 버린 것 같더군요.]

(2) 다음, 왜왕(응신)이 ‘(백제가 지은 죄?) 때문에, 신라왕자 한분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한 것은 17내물36(391=신묘)년이 맞지만, 신라17내물왕이 셋째아들 美海(미사흔,당시4歲:393生~433年41歲卒)를 왜국에 인질보낸 시기는 391년이 아니라 396년이고 왜국도착이 367년인데, 417년에 신라로 귀환했었으므로 [397~417=31년=30년?간 왜에 억류]된 것이 맞습니다.
[참고 : {백제가 지은 죄? = 백제17아신왕의 요청으로 백제로 파견되어 신라지역에 주둔하게 될 #2次열도응신군의 안전보장을 위함}이고, {美海年十歲 = ‘미사흔의 나이가 당시 10살’이란 말이 아니고, ‘미사흔은 (아직 인질로 보내기에 충분한 나이가) 아니다’라는 의미(일종의 反語法)임, 그래서 미사흔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므로(言辭動止) 內臣朴娑覽을 副使로 함께 보냈었다는 것임]

(3) 안사님께서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17내물왕의 #2왕자 寶海(복호)는 18실성왕이 즉위하는 402년에 고구려로 인질 보내져서, 19눌지왕 즉위원(417)년 왜국에서 #3왕자 美海(미사흔)을 데리고 귀국한 박제상이 418년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寶海(복호)를 귀국시키려 했었지만, 장수왕의 반대로 실패하자 무리하게 寶海(복호)를 몰래 탈출시키고 박제상 자신이 고구려에 남아서 ’제방 위(堤上)‘에서 화형당한 것임, 따라서, 寶海(복호)의 인질기간이 [402~419=19년間(十數年)]이 되는 것임
또, {朴娑覽(박사람)=朴氏집안사람=사실상 朴堤上을 말함}으로 추정되므로 박제상은 396년 처음부터 4살짜리 주인 美海(미사흔)을 모시고 왜국에 인질갔었다가 큰형인 7내물왕의 장자 19눌지가 왕으로 즉위하자 바로 왜국을 출발해서 417년에 신라로 돌아 온 것임. 물론 美海(미사흔)가 왜국에서 결혼한 아내[왜왕應神의孫女?]와 자식들이 바로 뒤따라 신라로 들어왔으며, 이후 美海(미사흔)과 박제상의 후손들이 신라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하게 된 것임

(4) 결국, 삼국사기, 일본서기, (심지어 남당유고 까지도) 한통속이 되어서 ‘4말5초, 복호와 미사흔의 인질기간’에 대해 왜곡된 기록을 남기고 잇지만, 13C에 이런 내막을 잘 아는 일연이 삼국유사에다가 ‘아주 교묘하게 꾸며진 스토리’를 삽입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實史를 알려주고 있는 것임.
[참고 ; 그러면, 왜 ‘이런 복잡한 왜곡을 하게 된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을 것인데...그것은, 중후기 신라사에서 ‘복호계와 미사흔계의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의 역사’에서 유추할 수 있음, 즉, 후대에 왜곡역사서를 펀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왕 왜곡해서 편찬하는 왜곡역사서이므로 그 흔적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었다고 보임. ]

-------
하나씩 곱씹어 보시면,... 우리 후손들은 삼국유사를 남기신 일연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카오스

2019.07.06 16:12:37
*.139.80.119

위의 답글에서...
' [397~417=31년=30년?간 왜에 억류]된 것은 맞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건 잘 못 기록네요...죄송^^

즉, 이 문장..../ ' [397~426(19눌지10년)=30년간 왜에 억류]된 것으로 기록한 것'은 맞지않고,....
' [397~417=21년간 왜에 억류]된 것'이 맞습니다/.....로 고쳐서 보시기 바랍니다.

삼국유사의 '30년이란 언급'도 '426(19눌지10년)년'이라는 虛記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매우 교묘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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