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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출도의 위치

신라사 조회 수 129 추천 수 0 2019.04.19 07:25:40
一道安士 *.3.199.170

 지금의 김해평야는 1세기에 석탈해가 경주에 도착할 무렵에 김해바다였다. 지금의 김해평야에 있는 산들은 당시에는 섬이었다. 그러다 3세기 중반 이후 아시아대륙의 평균기온이 낮아지는 한랭화가 찾아온다. 몽골초원의 목초지가 만리장성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를 따라 가축을 기르던 유목민족들도 만리장성 이남으로 남하하게 되니 4세기에 중국대륙이 대 혼란에 돌입하게 된다. 이를 흔히 5호16국 시대라 부르는데 이 시기를 통하여 중국 漢族의 주류가 북방계로 바뀐다.


 3세기 이전에 경주는 항구였다. 석탈해 선단은 남해안을 항해하다, 김해에서 방향을 틀어 김해와 부산 사이의 바다를 통과하여 북상한 후 경주의 남쪽 항구에 상륙한 것이다. 따라서 돌아가는 모서리에 있던 김해가야를 만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래는 김해지역에 상륙하려 하였으나 여기에 먼저 와 있던 수로왕의 가야에게 밀려 상륙하지 못하고 계속 북상하여 경주항에 상륙한 것이다.


 김해바다는 3세기 중반 이후 해수면이 낮아지면 3~4세기에 걸쳐 서서히 메워지기 시작하여 ‘바다->호수->강’의 변화과정을 거쳤다. 김해바다를 통하여 100척 규모의 대규모 선단이 항해가 가능했던 것은 3세기 초 이전이었고, 이후부터 5세기 초 사이에는 소규모 선단이 항해할 수 있을 정도로 메워졌다고 생각된다. 5세기 초에는 고구려의 대규모 기마군단이 지나갈 정도로 육지화 된 것이다. 그리고 5세기 중반 이후에는 선단이 지나가기에는 이미 너무 메워졌다. 


김해평야가 바다였을 때는 가야의 해상군단이 신라의 기마군단을 압도하였으나, 바다가 점차 육지로 바뀌자, 5세기에는 신라의 기마군단과 가야의 해상군단이 대등하게 되었다. 그러다 6세기 이후에는 신라의 기마군단이 가야의 해상군단을 압도하게 되어 결국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게 된 것이다.


  가야가 신라에게 진 것은 기후변화에 따른 김해바다의 지형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결과였다고 본다. 김해바다가 평야로 전환됨에 따라 가야의 해상군단도 기마군단으로 전환하였겠지만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수백 년을 거쳐 쌓아온 기술을 가진 신라의 기마군단을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탈해이사금 17년(73), 왜인이 木出島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거기서 죽었다.


  이 기록은 1세기 후반에 왜인들이 목출도라는 섬에 쳐들어오자 왕이 우오라는 장군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게 하였으나 패하였다는 기록이다. 이후 목출도는 나오지 않는데 왜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목출도라는 섬이 지금의 어디일까?

  당시 석씨 신라는 이미 경주에 들어와 있었고, 박씨 신라는 아직 충청북도 지역이 있었을 때다. 따라서 훗날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가 박씨 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가면서 함께 들어간 기록이다. 따라서 우오를 보낸 왕은 석탈해다. 탈해에게 이사금이라는 시호를 주고, 우오에게 각간이라는 시호를 준 것은 훗날 신라사를 정리하면서였다고 본다.


  신라에서 임나를 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변으로 길게 연결된 반도지형을 따라 육로로 가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왜가 남변으로 침입하기도 하고 동변으로 침입하기도 하는데, 남변은 해로와 육로가 모두 가능하지만 동변은 모두 육로로 침입하는 것이다. 후대로 갈수록 동변 침입이 많아지는 것은 남변은 김해바다가 메워져 선단이 항해할 수 없기 때문에 육로인 동변을 택한 것이다.


  2세기의 신라인은 경주항에서 바다를 건너면 임나에 이르고, 임나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면 대마도에 이르고, 대마도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면 구주에 이르렀는데, 이를 통칭하여 왜라 불렀다. 이들 지역은 모두 가야인들이 개척한 땅이다.


*숭신천황 65년(115), 가을 7월,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수인천황 2년(118); 이 해에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왕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나왕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이 일본서기 기록은 숭신이 죽어 임나에서 조문사절이 왔다가 3년 상을 마치고 돌아간 것을 기록한 것인데, 신라본기 지마이사금조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모두 연대가 정확함을 알 수 있다. 또 임나는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라(계림)와 나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2세기의 김해바다 지형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후 돌아가던 임나 사신이 신라군에게 선물을 뺏기는 일이 발생하여 두 나라의 원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5세기 이전에 신라가 부산 일대에 내려왔던 것은 2세기 지마이사금 때뿐이다. 이후 신라가 다시 내려오는 것은 6세기 법흥왕 때다.


*신공황후 섭정 전년(401); 겨울 10월,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 없었다. ...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일본서기 신공조에 나온 신라정벌이 영락 11년(401)인데 당시까지도 경주에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일본서기는 내물이사금을 '파사매금'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서역에서 온 신라왕'이란 뜻으로 마립간신라의 기원까지 설명하는 구절이다. 신라에 '파사'라는 왕명은 2세의 파사이사금이 또 있는데, 둘 다 북방에서 강력한 기마군단을 이끌고 경주에 내려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김해평야에 있는 산들은 1세기 당시에는 섬이었다. 따라서 목출도는 지금의 가지산과 신불산 일대로 추정된다. 木出島라는 이름이 나무가 많이 나는 섬이란 뜻인데, 가지산과 신불산이 山이라서 섬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그림 1] 임나와 가야는 동서로 나란히 위치한(竝立) 나라였다. 


  


 


댓글 '1'

김해만

2019.07.28 04:41:25
*.209.219.23

7세기 전 까지 낙동강 하류는 해수면 상승으로 김해만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현재 삼랑진역이 있는 밀양시 동남부 지역은 조선시대까지도 밀물 시 바닷물이 들어와 조운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http://www.gimhae.go.kr/00204/00050/00051.web?amode=view&gcode=1186&idx=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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