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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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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고왕조 기록들 중에 본래 일본서기 편자들이 받은 원사료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성무-중애조인데 여기서 후대인 5세기 초의 응신기록을 빼면 다음 정도가 남는다. 천황의 시호라든가 대수라든가 연도는 8세기에 일본서기 편자들이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다.

(13대) 치족언천황(稚足彦天皇) 성무천황(成務天皇)

성무 원년, 봄 정월 갑신삭 무자(5일)에 황태자가 자리에 올랐다.
성무 60년, 여름 6월 기사삭 기묘(11일)에 천황이 죽었다.

(14대)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 중애천황(仲哀天皇)

중애 원년, 봄 정월 경인삭 경자(11일)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중애 2년, 봄 정월 갑인삭 갑자(11일)에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을 황후로 세웠다.
중애 9년, 봄 2월 계묘삭 정미(5일)에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 

이것이 전부였다고 본다. 대외기록은 물론이고 기록이라고 할만한 것 자체가 별로 없었다. 일본서기 편집진의 고민을 알만하다.  그런데 일본서기 편집진이 찾은 비미호 기록 역시 즉위와 퇴위에 관한 기록 외에 거의 없었다. 다음이 일본서기 편집진이 받은 비미호에 관한 기록의 전부였다고 본다. 이 기록을 가지고 신공황후조를 만들었는데 대단한 능력이다.

중애 9년, 여름 5월, (왕이 죽고 왕비가 신라와 접촉함.)
신공 69년, 여름 4월 신유삭 정축(17일)에 황태후가 치앵궁(稚櫻宮)에서 죽었다(崩). 이때 나이 100세였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첫번째는 당시, 즉 2세기 후반이 역사를 기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기였다는 것과, 두번째는 혼란기 막판인 내란 직전에 비미호를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위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중애 9년이 비미호가 왕이 되어 신라에 사신을 보낸 173년이라는 것이다.

만일 두 세력 중 한쪽이 월등하면 내란이랄 것도 없다. 그런데 장기간 내란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두 세력의 힘이 엇비슷했다는 뜻이다. 또 삼국지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서로 공격했다(상벌)고 한 것을 보아도 두 세력의 힘은 엇비슷했다.

BC 1세기에 한반도에 여러 소국들이 건국되었듯이 이 직후 일본열도에도 여러 소국들이 건국되었다. 일본열도의 지형에 맞추어 소국들이 구주는 주로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기내는 주로 동서로 배열되어 있었다. 구주를 대표하던 세력이 북쪽의 야마대와 남쪽의 구로국이었다. 대표적인 나라가 1세기 후반에 임나인들이 바다를 건너가 구주에 건국한 야마대고 이 초대왕이 일본서기의 숭신인데 후한서의 수승이다. 

이로부터 약 3~4대가 지난 2세기 중반인 아달라이사금대에 다시 한반도에서 우세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낙동강유역에서 구주로 건너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충돌한 것이 2세기 후반 왜국대란의 원인이다. 우세한 문명을 가지고 왔으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본다. 성무는 이들을 힘으로 누르려다 실패한 것이다. 성무를 이어 중애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방법이 달랐다. '기장족히'라는 여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이다.

기장족(足)히라는 말은 기장벌여자의 이두식 표현으로 지금의 부산시 기장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결국 신 이민자들의 대표자였다. 중애는 171년에 그녀를 왕비로 맞아 두 세력간의 통합을 시도했는데 그만 실패하고 2년만에 중애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왕비였던 기장벌여자가 왕이 되어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그 유명한 아달라이사금 20년조의 기록이다. 이 기록이 한중일 사서를 하나로 연결하는 열쇠다.

*아달라20년(173), 여름 5월 왜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비미호라는 여자의 출신과 왜왕이 된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비미호는 본래 중애의 왕비였던 것이다. 건강하던 중애가 갑작스럽게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나오는데 내란 직전의 상황인만큼 신뢰성이 높다.  

중애 9년조에 실린 웅습을 정벌하다 죽은 왕은 응신이다. 2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를 보니 달이 맞다. 403년 2월 초에 웅습을 정벌하다 화살에 맞아 갑자기 죽자 왕후였던 중희가 응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오누이간이었던 백제 아신왕에게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하지만 비밀이 지켜질리 없고 곧 왜국은 토도태자를 명목상의 왕으로 세운채 여러 세력들이 왕권을 두고 싸운다. 토도태자는 왕후를 세울 수 없었다.

죽기 전 응신은 태자를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왕인에게 맡기고, 왕후인 중희는 응신이 죽자 아들을 응신과 동갑이자 응신의 오랜 친구인 무내숙녜에게 맡기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408년에 토도태자가 죽는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에게 공격받던 가야/신라 땅에 가득찼던 피난민을 데리고 바다를 건넌 삼한백제 궁월군이 409년에 즉위하니 이 사람이 인덕이다. 왕인은 인덕 이후에도 왜국 최고의 석학으로 남지만 무내숙녜는 실각한다. 응신과 인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가 즉위와 퇴위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일본열도에는 야요이시대의 중반인 2세기 후반에 대란이 있었고, 야요이시대에서 전기고분시대로 전환되는 3세기 후반에도 대란이 있었다. 물론 시대의 전환을 가져온 3세기 대란이 훨씬 더 컸다. 3세기 후반에 구주쪽에서 사람들이 대거 기내로 몰려가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왜국에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도 대란이 있는데 이것은 왜국으로 천도한 삼한백제 정부가 일본열도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 대란이 전기고분시대를 중기고분시대로 전환시킨다. 이로부터 다시 백년 후인 6세기 초에도 대란이 벌어지는데 이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백제에서 새롭게 건너온 기내정부가 구주를 비롯한 여러지역을 자기 통치하에 두는 것인데 이것이 후기고분시대로의 전환이다. 

이후 7세기 후반(672) 백제구원군이 실패한 직후에 다시 대란이 벌어지는데 천지로 대표되는 신이민집단과 천무로 대표되는 구이민집단 사이에 왜국의 장래를 두고 싸움이 벌어져 천무집단이 승리한 것이다. 이를 '임신의난'이라 부르는데 왜국으로부터 일본으로의 전환이다. 천무도 7세기 중반에 왜국으로 온 신이민집단이나 구이민집단과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중국왕조 기록에 2세기 대란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으나 3세기 대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3세기 중반을 끝으로 약 150년 동안 왜국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가 5세기 초에 다시 중국왕조에 왜국이 나타난다. 중국왕조 기록에 2세기 후반의 대란 기록이 남아있는 이유는 3세기에 중국왕조의 관리와 왜국관리가 만났는데 왜국관리가 2세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3세기의 왜국관리는 2세기 야먀대국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5세기 초에 중국왕조 관리와 접촉한 왜국관리는 3세기 후반 이후 4세기 왜국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주지 못했다. 그러니 3세기 후반의 왜국대란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이다. 5세기 왜국 정부가 4세기 말에 일본열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열도에 국가가 없었다. 이전에 국가가 있었으면 그 국가를 무너뜨리더라도 무엇이라도 이전 왕조 기록을 받았겠지만 아무 것도 없어 정보를 취득하지 못한 것이다.

5세기 초에 중국왕조에 온 왜국관리는 4세기 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안 하고,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이야기만 한다. 여구왕과 여휘왕을 계승한다고는 안 했지만 하는 행동을 보년 여휘왕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晉書 무제(世祖 武皇帝 司馬炎) 太元 十一年(386년), 夏四月, 以百濟王世子 餘暉 為 使持節 都督 鎮東將軍 百濟王.

백제 왕세자 여휘를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책봉하고 있는데 '도독'이라는 지위가 5세기 왜왕들이 중국 남조왕조에 요구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해는 진사왕의 재위기간인데 진왕 여휘는 마한지역에서 가장 큰 제후국이었던 한성백제의 진사왕이나 침류왕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백제왕세자"에서 세자를 떼어버려야 했지만 이를 못하여 중원왕조의 책봉으로 권력의 정통성을 메우려 한 것이다. 

당시 왕이 거처할만한 변변한 왕궁도 없었다는 것을 일본서기로 알 수 있다. 기내지역에 궁이 없어 새로 지어야 했다.

*인덕 원년(409), 궁전을 난파에 지었는데 이것을 고진궁이라 한다. 궁전의 담장과 건물에는 흰색을 칠하지 않았다. 서까래, 들보, 기둥도 장식하지 않았다. 억새로 지붕을 이을 때도 끝을 가지런히 하지 않았다.

(이 기록으로부터 웅진의 4세기 백제 진왕의 궁전은 담장과 건물에 흰색을 칠했으며, 지붕을 기와가 아니라 억새로 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언젠가 웅진부근에서 진왕의 궁전 흔적이 발굴되기를 희망한다.)

3세기 왜국관리가 2세기 후반의 왜국대란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왜국 대란 후에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신을 보낼만한 외교부서가 있었고, 사료를 관장할만 한 기관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3세기 후반에 대란이 끝났을 때는 이런 일을 할 만한 국가가 없었다.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서로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세력경쟁하기에 바빠 백년이 지나도 그런 일을 할만한 국가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민간에 혹시 3세기 후반의 대란이나 4세기 기록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나 8세기에 왜국 정부가 일본서기를 쓸때 전국을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4세기 기록이 지금까지도 안 나오고 있다.). 그래서 4세기 왕통공백을 메우고자 390년에 즉위한 응신을 120년 앞으로 올려 270년에 즉위한 것으로 하고, 247년에 퇴위한 비미호를 22년 뒤로 내려 269년에 즉위한 것으로 하여 왕통을 연결한 것이다. 일본서기 편자들은 응신의 백제 15대왕이라는 대수와, 경인이라는 즉위 간지를 지키고 싶어했기 때문에 2주갑에 해당하는 120년을 이동시킨 것이다. 

1주갑만 이동시켜 330년에 즉위한 것으로 하고 비미호의 퇴위를 22년에 60년을 더해 89년 내려 329년으로 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4세기를 주로 기록해야 되어 중간을 채울 기록이 더 없다. 그들이 120년을 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재위기간이 120년이 늘어난 것은 5세기 응신부터 5명 왕들 중에 왕비가 후인 3명(응신, 인덕, 윤공)의 재위기간을 대폭 늘려 합이 120년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5세기 중반 안강 때부터 연도가 1, 2년 차이로 맞아 들어간다. 왕비가 '후'가 아니고 '비'나 '부인'인 이중과 반정의 재위기간은 늘려주지 않았는데 진왕제 때문이다.

이 결과 응신부터 윤공까지의 연도를 정확히 읽는 것은 역사지식과 논리가 필요하다. 나는 삼국사기 및 중국 사서를 이용하여 이 연대를 거의 정확히 복원하였다. 복원하면서 일본서기가 삼국사기와 일치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일본서기가 해만 손대고 달은 손대지 않았으며, 응신과 인덕의 즉위 및 퇴위가 삼국사기에 나온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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