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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 2

백제사 조회 수 76 추천 수 0 2018.08.16 17:58:35
一道安士 *.232.249.91


[문제] 다음 빈칸에 백제와 백제왕을 구분하여 넣어라.


*내물이사금 11년(366); 봄 3월, (  가  )의 사람이 예방하였다.

*내물이사금 13년(368); 봄, (  나  )가(이)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다.

*내물이사금 18년(373); 백제 독산성주가 3백여 인을 거느리고 귀순하여왔기에 왕이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다  )가(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진왕제를 아는 사람은 이 문제를 바로 풀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백제건 백제왕이건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지 모른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와 백제왕이 구분된다.


*탈해이사금 7년(63), 겨울 10월, <백제왕>이 국경을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신라는 백제 3루왕 시절인 다루왕 36년조의 백제 사신을 백제왕의 사신이라 부른다. 하지만 초고왕 이후에는 모두 백제 사신이라고 부르다, 근초고왕 28년부터 다시 백제왕의 사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김부식이 받은 원사료에 이렇게 되어 있었고 김부식도 이해를 못하고 그대로 옮겨 썼을 것이다.


백제왕이라고 부르려면 가장 강력한 소국 왕실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세우고 공립되어야 한다. 삼국사기의 백제는 3루왕 시절 마지막 왕이 공립에 실패하고 죽은 후, 초고왕부터는 진왕 아래의 마한왕 아래의 신지가 통치하는 소국이었던 것이다. 국호도 百濟에서 伯濟로 변경하여야 했다. 따라서 고이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면 백제의 신지가 보내는 것이므로, 백제의 사신이지 백제왕의 사신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368년에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비로 세우고 공립되었으므로  그 이후에는 백제왕으로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위 문제의 답은 다음과 같다.


[답] 가: 백제, 나: 백제, 다: 백제왕


368년 봄 3월에 근초고왕이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비로 맞고 한성백제가 3백여 년 만에 백제왕을 칭하게 되자 지금의 서울은 온통 국가적 축제에 빠졌을 것이다. 제2의 건국이나 마찬가지다. 한강유역에 작은 부여가 재건국된 것이다. 근초고왕의 공립을 알리는 사신이 전국으로 파견되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의 소국들이 일제히 근초고왕에게 굴복하고 신민이 되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그 이전에는 기천명의 군사만 동원하였는데 이제 경기, 황해, 강원 지역의 모든 소국들이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므로 수만 대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황해도가 고구려의 지배 하에서 이탈하면서 남방전선이 무너지고 국가의 지방통치가 흔들리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국가적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당시의 진왕이던 여구의 입장에서 이것이 기분 나쁘기는 하나 근초고왕도 공립되었으므로 명분상 꼬투리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진왕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격파한 후 북으로 천도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진왕 여구의 공립을 기록하고 있는데 책을 잘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라는 책은 진왕의 삼한사를 삭제한 책이다. 만일 삼한사를 삭제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발생한다.


만일 근초고왕에게 진왕의 사신이 왔다면, *근초고왕 xx년, 백제에서 사신이 왔다.

만일 근구수 태자를 진왕에게 보냈다면, *근초고왕 xx년, 태자 근구수를 백제에 보냈다.

만일 진왕과의 사이가 틀어져 군사를 내어 공격했다면, *근초고왕 xx년,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쳤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읽는 사람은 사관이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진왕이 왜국으로 천도한 후에는 다음처럼 기록하면 논리적 모순이 안 생긴다.


*아신왕 6년(397),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빠졌다.


*아신왕 6년(397), 여름 5월, 왕이 (백제 진왕이 통치하는)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왜국은 나오나 왜왕은 안 나온다. 왜국을 통치하는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왜국 기록인데, 396년 9월에 진왕이 왜국으로 천도하여, 397년 1월에 기내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달까지 정확한 기록이다.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에 4개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세력 순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1. 백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왜)

2. 백잔 (말갈족, 삼국사기의 백제)

3. 임나 (가야족,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

4. 신라 (흉노계 선비족, 삼국사기의 신라)


따라서 이들 중에 2.백잔과 4.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문제] 고구려 고국원왕은 369년부터 백제를 공격하여 두 나라 사이에 긴 전쟁이 시작된다. 왜 고구려는 368년도 아니고 370년도 아니고 369년부터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원년(346, 병오);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契王>薨, 繼位.

*02년(347, 정미); 春正月, 祭天地神祇.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狠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19년 공백>>

*21년(366, 병인); 春三月, 遣使聘<新羅>.

*23년(368, 무진); 春三月 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24년(369, 기사);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26년(신미, 371);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釗}>,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27년(372, 임신);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地震.


 [답] 진왕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문제를 절대로 풀 수 없다. 하지만 진왕제를 알면 이 정도는 쉬운 문제다. 그 전해인 368년조를 보면 신라에 말 2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의 이유다. 말을 주고받는 것은 혼인선물로 근초고왕이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비로 세우고 공립된 것이다. 근초고왕이 드디어 백제왕이 된 것이다. 그러자 고구려 남부지역이 일제히 근초고왕의 신민이 되고, 고구려의 지방통치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만일 고국원왕의 비가 발견된다면 거기에는 대충 다음과 같은 전쟁 원인이 적혀있을 것이다. ‘황해도의 치양지역등은 본래 우리의 속민이었는데, 무진년(368)에 백제가 破하여 臣民으로 만들었기에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이에 대하여 무진년에 백제 군대가 황해도를 정복했나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왕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민은 정치적인 용어인데 신민은 진왕제의 공립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근초고왕은 무진년에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비로 세우고 백제왕으로 공립된 것이다. 만일 비문에 달까지 쓴다면 무진년 3월이다.


금강유역의 진왕은 3세기에는 영산강유역과 혼인하고, 4세기 이후에는 한강유역 최대 세력인 삼국사기의 백제와 혼인한다. 백제본기를 보면 비류왕때 처음으로 혼인한다. 그러면 진왕은 삼국사기의 백제, 신라, 임나(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를 신민으로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이 전통이 진왕이 왜국으로 천도한 다음에도 계속 이어져 왜왕은 백제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워야 공립된다.


진왕은 그 이전부터 공립되어 삼한전체를 통치하였지만 고구려와 충돌하지 않은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말갈왕조인 고이왕조를 보면 위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를 돕는다. 광개토왕비문은 이들이 조공했다고 한다. 즉 한강유역에 말갈국가가 들어서서 친고구려 정책을 펴고 있어서 공립된 진왕과 고구려 사이에 충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말갈왕조가 물러나고 과거 해씨왕통인 근초고왕이 들어서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문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조에서 진왕의 즉위와 공립 기록을 찾아라.


[답] 이것은 약간의 센스만 있으면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진사왕은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2년(386, 병술);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문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길이가 청목령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닿았다. 가을 8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3년(387, 정해); 봄 정월, 진 가모를 달솔로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관미령에서 말갈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5년(389, 기축); 가을 9월,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6년(390, 경인); 가을 9월, 왕이 달솔 진 가모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2백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가모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 대외 정책 변화 발생 ---------------------------

*7년(391, 신묘);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을 7월, 왕이 서쪽 지방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가 직접 <사슴>을 쏘아 적중시켰다. 8월, 왕이 다시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였다.

*8년(392, 임진);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진사왕조를 보면 390년까지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열심히 싸운다. 그러다 391년이 되면 연못이나 파고 새나 기르고 사냥이나 하고,... 고구려왕이 전략에 능통하다는 핑계를 대고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진사왕이 용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충분히 백제왕이 되고 싶은 야심가였다. 진왕이 즉위하는 것은 목지국만 통치하므로 문제가 안 되나, 공립이 되면 삼한전체의 왕이 되므로 진사왕으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다. 거기에 진왕이 자신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공립되어야 자신이 마한왕의 지위를 갖게 되는데, 만일 침류왕 딸을 왕후로 세우고 공립되었다면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침류왕의 딸임을 알 수 있다. 어디를 보아야 할까?")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왕의 사냥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사냥이란 무장을 하고 군대를 이끌고 가는 것이다. 따라서 짐승이 목적인 경우가 있고 정치적인 목적인 경우가 있는데, 짐승이 목적인 경우는 사슴을 잡았다고 하여 구분하다.


390년 10월에 처음으로 사냥을 나가는데 구원은 지금의 화성 부근으로 진왕의 삼한백제와의 국경부근이다. 즉 진왕에게 자신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다. 진사왕의 입장에서는 “누가 고구려를 막아주어 국가의 안전이 유지되는데 감히 내 말을 거부해?”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91년을 보면 무력시위를 통한 협상이 깨진 것이다.


이 말은 진왕이 390년에 즉위하였고 391년에 공립되었다는 뜻이다. 즉 391년 신묘년에 진왕이 백제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삼한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고 삼국사기를 보면 이것은 392년부터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원인이 된다.


"아니 백제(진왕 국가인 삼한, 잔국)가 파했다고 써야지 왜 倭가 파했다고 쓰느냐?"는 비문기록원칙을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광개토왕비문은 영락 9년인 399년에 신라 영토에 倭가 가득하여 다음 해인 영락 10년에 보병과 기병 5만대군을 보내 이들을 쫒아냈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신왕 8년(399); 왕이 고구려를 치고자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니 백성들이 이 일에 시달려 신라로 대거 달아나 호구수가 줄었다.


고구려의 잔국토벌과 백제의 반격으로 인하여 신라에 몰려든 백제 피난민들을 광개토왕비문은 왜라고 기록한 것이다. 즉 기록의 원칙은 전쟁이 끝나고 비문을 세울 때를 기준으로, 한반도에 있으면 잔이나 백잔,  왜국에 건너가 있으면 왜로 기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응신의 진왕정부가 왜국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왜로 기록한 것이다.


끝으로 만일 전쟁원인을 기록한 고구려의 비문이 발견된다면 거기에는 전쟁원인이 어떻게 쓰여 있을까? 대충 이런 내용이 나와야 한다.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는 본래 우리의 속민이었는데, 왜가 신묘년에 이들을 破하여 臣民으로 삼았기에 고구려왕이 군대를 일으켜 삼한을 토벌한다.”라고 나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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