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출신이 없는 것은 기록의 망실이거나 쓰기 곤란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쓰기 곤란한 경우라 함은 (1)시조이거나, (2)평민출신이거나, (3)삼한의 다른 소국 출신이어서 삼한사 삭제할 때 빠졌거나 등이다. 

[나] 후계자 명칭

태자: 태자책봉을 받은 사람. *전기와 중기에서 유리이사금과 문무왕 둘 뿐이다.
장자: 혈연적 관계가 있으나 태자 책봉은 받지 못한 사람
적자: 왕족 중에서 실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사람

아들: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계보상에 오른 후계자.
손자: ?
同母弟: ?
再從弟: ?

제2자: 백제본기의 제2자는 담로관계로 왕권이 계승될 때이다. 신라본기의 제2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사위: 지배세력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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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혁거세거서간-출신 없음
알영부인-출신 없음

2. 남해차차웅-혁거세거서간의 적자
운제(아루)부인-출신 없음

3. 유리이사금-남해차차웅의 태자
왕비-일지갈문왕의 딸(허루왕의 딸 박씨)

4. 탈해이사금-다파나국
아효부인-출신 없음

5. 파사이사금-유리왕의 제2자
사성부인-허루갈문왕의 딸 김씨

6. 지마이사금-파사이사금의 적자
애례부인-마제갈문왕의 딸 김씨

7. 일성이사금-유리이사금의 장자
왕비- 지소례왕의 딸 박씨

8. 아달라이사금-일성이사금의 장자
내례(內禮)부인-지마이사금의 딸 박씨

[해설 1]

서라벌국은 몽골초원의 유목민족이 "몽골 -> 만주 -> 한반도 북부 -> 한반도 중부"를 거쳐 한강 상류에 들어왔다. 왜 신라본기는 박혁거세 이전을 잘라내고 박혁거세부터 기록하였는지가 의문이나, 그 이전은 계속 이동하던 중으로 국가를 선포할 여유가 없었고, 한강상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안정되게 정착한 후 새로운 나라를 선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1-3대는 한강유역 기록이고 4대는 비상시국으로 다시 남하하는 중이다. 남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여 비상시국을 지휘하였는데 훗날 왕통에 들어간 석탈해와 겹치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은 2명의 기록인데 석탈해에게만 왕력을 준 것이라고 판단된다(삼한사의 재조명 참조). 

1-3대는 혈통을 통한 계승이라고 보이나 5대 파사이사금은 새로운 왕통으로 추정된다. 그는 경북일원을 정복하고 서라벌국의 경주시대를 연 사람으로 정복자이다. 또 제2자는 친아들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파사이사금의 "파사"라는 호칭은 훗날 법흥왕대에 신라 왕통을 정리하면서 준 것으로 보인다. 신라 중기에 또 한명의 "파사"왕이 있는데 그는 파사매금이라고 불렸던 내물왕이다. 

6-8대는 파사이사금 계통이 왕권을 이어왔다. 아달라이사금의 "아달라"라는 호칭은 신라왕 중에 유일하게 3자 시호이다. 이 역시 법흥왕 때 준 것인데, "아달라"라는 이름은 아버지 또는 강력한한 왕이나 정복자의 의미로서, 김병모 선생의 견해대로 이전에 로마를 공포에 몰아넣던 훈족왕 아틸라의 이름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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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추각간-탈해이사금의 아들
지진내례(只珍內禮)부인 김씨 *內禮는 지위높은 여인에게 붙이는 보통명사로써 지진내례는 김씨이고 내례는 박씨이다.

9. 벌휴이사금-구추각간의 아들
왕비- 기록이 없음

골정갈문왕(세신갈문왕)
옥모부인-구도갈문왕의 딸 김씨

10.나해이사금-벌휴이사금의 손자
왕비-조분이사금의 누이

11. 조분이사금-벌휴이사금의 손자, 골정갈문왕의 아들, 파사이사금의 사위
아이혜부인-나해이사금의 딸

12. 첨해이사금-조분이사금의 동모제, 골정갈문왕의 아들
왕비- 기록 없음

13. 미추이사금-구도갈문왕의 아들
광명부인-조분이사금의 딸

14. 유례이사금-조분이사금의 장자 => 진한에 들어감
왕비-기록 없음

15. 기림이사금-조분이사금의 손자, 이찬 걸숙의 아들
왕비-기록 없음

16. 흘해이사금-나해이사금의 손자, 각간 우로의 아들 => 진한에서 나옴
왕비-기록 없음

[해설 2]

박씨 왕통은 아달라이사금을 끝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왕통이 들어선다. 석씨왕통을 연 9대 벌휴이사금은 석탈해를 선조로 하는 석씨이어서 석탈해에게 연결된 것이지 석탈해의 직접 손자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실체는 아달라이사금 시절에 군권을 장악하고 2만대군으로 한성백제를 공격했던 이찬 흥선인데 왕비기록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그가 왕비 기록이 없는 이유는 왕비가 평민출신이라서가 아니다. 만일 왕비가 평민출신이라면 왕이 되고 새로운 여인을 왕비로 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왕비는 아마도 변진한소국의 왕녀 출신으로 삼국사기에서 삼한사가 빠질 때 함께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10-12대는 벌휴왕통으로 추정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사건이 벌어진다. 10대 나해이사금 시절에는 가야7국이 진왕의 삼한백제에게 멸망하였으며, 11대 조분이사금 시절에는 고구려에게 옥저땅에서 패한 위나라 선비족 기병부대가 신라로 도망쳐 들어왔고, 12대 첨해이사금 시절에는 그들이 신라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13대 미추이사금은 고구려-위 전쟁에 참전하였던 위나라 관구검 부대의 추격군 출신으로 조분이사금 다음에 석우로 대신 첨해이사금을 세운 서불한 장훤이다. 신라에 들어와 당시 세력가였던 구도와 손잡고 그의 양자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장원과 양부를 앞세운 선비족 기병부대가 신라를 장악할 당시에 더 남하한 선비족 기병부대는 임나가야(신라본기의 왜국)를 장악하였다. 이들이 서라벌국과 삼한백제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니 삼한 중 변한이 삼한백제의 직접통치에서 빠지게 된다. 이것이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다르게 말하는 진왕의 통치지역 변동이다. 

*후한서: 진왕(백제왕)은 마한, 진한, 변한을 다스렸다.
*삼국지: 진왕(백제왕)은 마한, 진한을 다스렸다.

3세기 후반 마한왕 진한왕은 중국을 통일한 서진에 사신을 보내나, 위나라 추격군 출신들이 왕권을 장악한 변한왕은 위나라 왕통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서진에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 3세기 후반 - 4세기의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병은 관구검 부대를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선비족 기병부대의 후예들이다. 동족이 왕이되었던 미추이사금 시절에는 서라벌국을 공격하지 않으나 미추이사금 사후 정권이 구 왕통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랑하는 4세기 가야 철갑옷이 당시 신라를 공격하던 왜병의 무구다. 

유례이사금 말기에 서라벌국이 망하고 삼한의 진한에 들어가게 된다. 14-16대는 몰락왕족 출신들 중에서 임명된 왕들로서 왕비는 모두 삼한 소국에서 왔을 것이다. 따라서 왕비 기록이 3대를 대를 이어 없다. 변진한에 들어간 나라는 국호를 변경하며(신라), 통치는 왕이 아니라 실세 관료가 하는데 이를 臣智(엄지)라 불렀다. 따라서 백제 진왕은 엄지들의 왕(聖音)이다. 또한 국가를 둘로 분할하게 된다.

*흘해이사금 3년, 봄 3월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 이 기록을 통해 왜국의 통치제도가 담로(다물)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왕(주몽)이 사신을 보내 아들(유리왕)의 혼인을 청하므로 왕(송양)이 딸(훗날 대무신왕의 어머니 송씨)을 보냈다.-만일 비류국 역사서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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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물이사금-말구 각간의 아들
왕비-미추이사금의 딸

18. 실성이사금-이찬 대서지의 아들
왕비-미추이사금의 딸

19. 눌지마립간-내물이사금의 아들
왕비-실성이사금의 딸

20. 자비마립간-눌지왕의 장자
왕비-서불한 미사흔의 딸

21. 소지마립간-자비마립간의 장자
선혜부인-이벌찬 내숙의 딸

습보갈문왕
조생부인-눌지마립간의 딸,

22. 지증마립간-습보갈문왕의 아들, 소지마립간의 再從弟
연제부인-이찬 등흔의 딸

[해설 3]

신라사는 4세기 중반에 북중국을 통일한 전연의 왕이던 모용황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하던 342-343년을 경계로 전기신라와 중기신라로 나누어진다. 그들이 동원한 서몽골의 흉노계 선비족이 북쪽길을 통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의 군사력을 가지고 신라를 진한에서 해방시킨다. 그들의 지도자가 이벌찬 강세인데 훗날 나물이사금이 된다.

왕통은 혈통을 통하여 정통성을 이어가는데 나물이사금 이전의 3왕이 모두 왕비 기록이 없어서 여기에 연결시킬 수 없다. 그래서 가장 가깝고 또 자기들처럼 북에서 내려와 신라왕이 된 미추이사금에게 연결시키니 이것이 나물이사금과 실성이사금이 미추이사금의 사위로 기록된 연유다. 실제로는 아무 관계가 없거나, 있다면 미추계열의 여인을 왕비로 삼고 기존세력과 결합했을 것이다.

나물계열과  실성가문은 신라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가문출신이었고 눌지마립간은 나물가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 대하여 태자라거나 장자라거나 적자라거나 하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실제로 나물이사금의 친아들일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에 인질을 요구하였을 때 나물의 왕자가 아니고 실성이 간다. 고구려가 기꺼이 왕자 대신에 실성을 데려가는 것으로 보아 실성가문은 신라에 들어오기 전에 나물가문보다 지위가 높았다고 생각된다. 

신라가 안정을 찾은 것은 이민 1세대인 17나물-18실성 대의 혼란이 끝나고 이민 2세대인 19눌지가 왕위에 오른 이후다. 19눌지-20자비-21소지는 부자상속이 이어지다 왕통이 방계로 건너가니 이 이가 마립간 시대의 마지막 왕인 22지증마립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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