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역시 박제상의 귀국 배경을 적고 있는데 하나는 신공 5년조이고 다른 하나는 인덕 38년조이다. 우선 인덕조를 보자. 정복자였던 응신이 403년 2월에 웅습을 정벌하다 화살에 맞아 죽고(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옴) 그 아들인 토도태자가 왕이 되어 왜국을 통치하였으나 자립위왕을 못하고 408년에 인덕에게 죽는다. 자립위왕하지 못하고 죽은 토도태자의 재위기간은 진왕제 기록의 원칙에 따라 자립위왕 하고 죽은 응신의 재위기간을 연장하여 그 안에 포함시켰다. 인덕이 409년에 즉위하였으므로(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옴)  미사흔이 귀국한 418년은 인덕 재위 10년째 되는 해이다. 이 부분의 일본서기 기록이 다음과 같다.

*인덕 31년(417, 재위 9년), 봄 정월, 대형거래수별을 황태자로 하였다.
*인덕 35년(417, 재위 9년), 여름 6월, 황후 반지원명(갈성습진언의 딸)이  통성궁에서 죽었다. 
*인덕 37년(417, 재위 9년), 겨울 11월, 황후를 내라산에 장사지냈다.
*인덕 38년(418, 재위 10년), 봄 정월, 팔전황녀를 황후로 하였다.

일본서기 읽는 기본은 연대를 정확히 읽는 것이다. 연대를 정확히 못 읽으면 사서를 오해하게 된다. 인덕 31년부터 37년은 실제로는 417년이라는 같은해 벌어진 사건을 달은 그냥 두고 연도만 적당히 떼어 배치한 것이다.

언뜻 보면 인덕은 황후가 죽고 3년 후에 새 황후를 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름에 죽자 다음해 정월에 바로 새 황후를 세웠다. 따라서 인덕의 새 황후가 들어서는 418년에 백제가 왜국에 옷감을 보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한다. 이로부터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진왕제 하에서는 백제 진왕은 일단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 하면 그 왕후가 죽기 전에는 새 왕후를 세울 수 없으며, 왕후가 죽으면 또 그 왕후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팔전황녀가 이전부터 이미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래 황후였던 반지원명의 불행은 남편이 진왕이 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반지원명은 갈성습진언의 딸로서 진왕의 황후가 되기에는 부족한 신분이었다. 보통 진왕은 황태자 시절에 이미 강력한 소국의 왕실 여인을 황태자비로 세운 후 즉위와 동시에 그를 황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덕은 본래 진왕이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응신과 인덕은 왕후를 즉위한 해가 아니고 그 다음해에 세운다. 이는 왕후 세우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응신은 무려 3명의 자매가 응신의 왕비가 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첫째가 아니고 둘째가 황후가 된다. 거기에 모든 황후에 출신을 명기하고 있는데 세 딸을 왕비로 넣은 막강한 가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의 장인은 고려초 이자겸과 같은 응신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자였기 때문으로, 첫째 왕비는 침류왕의 딸이고 둘째 왕비는 진사왕의 딸이었다고 본다.

응신의 문제는 침류왕이 1년 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침류왕의 딸을 황후로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즉위하려고 보니 침류왕이 죽고 그 동생인 진사왕이 들어서서 자신의 딸을 황후로 세우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진사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백제 내부에서 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고구려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 마한왕과 같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응신은 결국 진사왕의 힘에 밀려 그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게 된 것이다.

인덕은 본래 소국의 왕이었는데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낙동강유역에 몰린 잔국의 피난민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며 집권기반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그는 보기 드물게 부인이 한 명 뿐이었다. 절대 권력자였던 인덕은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신분이 모자라던 부인을 황후로 <억지로> 세우고 자립위왕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정통성 시비가 생기는 것이다.   

더구나 인덕은 응신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사람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응신의 아들인 토도태자는 첫번째 아들로 되어 있고 인덕은 네번째 아들로 되어있다. 윤공의 5번째 아들로 기록된 웅략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서기를 보면 왕자의 순서가 친자가 앞에 있고 양자가 뒤에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진왕제 하에서는 왕자의 순서를 쓸 때 왕력에 입적된 순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즉, 인덕이 응신의 제4자인 이유는 네번째로 왕력에 입적되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인덕은 고민하게 된다. 보나마나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자격을 갖춘 여인을 다시 황후로 세워야 한다고 압박했을 것이다. 그러자 인덕은 다른 여인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이 정도면 새 황후로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니 황후와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서기가 가장 성군으로 기록한 인덕도 여자관계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황후로서의 모든 자격심사를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여자가 팔전황녀다. 4세기 이후 백제 진왕의 황후로서 최적은 한성백제의 왕녀다. 5세기 일본서기는 4세기에 한반도에서 하던 일을 되풀이 했기 때문에 4세기 삼한백제사를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료다.

팔전황녀는 반지원명이 죽기 전부터 이미 황후의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본서기는 팔전황후의 출신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응신 39년(407년) 봄 2월, 백제 직지왕이 그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은 7인의 여인을 데리고 내귀하엿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왕실에 보낸다는 뜻이다. 무령왕의 어머니를 동반하고 왜왕(웅략천황)으로 부임하는 곤지의 경우도 일본서기는 "섬기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제도원공주와 그와 함께 온 7인의 한성백제 왕실여인들이 5세기 전반의 왜국 왕후를 공급하게 된다. 이 기록에 의하여 삼한백제는 왜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진왕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제도원공주가 도착하면서 왜국은 그녀와 일곱여인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신라의 미사흔 왕자가 귀국하던 418년은 이렇게 인덕이 새 왕후를 세우고 정통성의 시비에서 벗어나던 축제분위기의 해였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사면을 받았다고 본다.

신공 5년조 또한 미사흔의 귀국을 기록하고 있는데, 황태후가 박제상이 신라에 돌아가 가족을 만나보고 다시 오겠다는 잠시 귀국을 허락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 황태후는 응신의 황후라고 본다. 일본서기가 응신의 황후 나오는 기록들을 모두 떼어 신공조에 배열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하필 5년조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공 5년조를 보면 박제상 외에도 2명의 사신이 더 갔다. 3명의 사신은  '한례사벌, 모마리질지, 부라모지'인데 모마리질지가 당시 신라 왕족인 흉노계 선비족 모부 출신인 박제상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박제상이 자신을 회유하던 왜왕을 뿌리치고 죽음을 택하는데 일본서기를 보면 그 왜왕이 갈성습진언이었다.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신라와 혼인하는 백제 동성왕의 외조부가 갈성습진언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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