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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
박제상 1. 미사흔 왕자의 인질사건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20854 2008.06.02 13:49:53 (*.68.174.111) 신라사0 Comments 1146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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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박제상을 언급하고 있다. 그 주요부만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 2년(418)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관직 이름)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왕의 동생 미사흔(美斯欣)이 왜로부터 도망쳐 돌아왔다.
삼국사기 열전 제5, 박제상 열전 : 박제상(朴堤上)<모말(毛末)이라고도 함>은 시조 혁거세 후손이며 파사니사금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이고,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勿品)이다. 제상은 벼슬길에 나가 삽량주간(=良州干)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402)에 왜국과 강화하니, 왜왕이 나물왕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고 싶다고 했다. 왕은 일찌기 나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음을 원망해 그 아들에게 앙갚음하고자 했으므로 거절하지 않고 보냈다. 또 11년 임자(412)에는 고구려가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를 볼모로 삼고자 하니 대왕이 또 그를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말 잘하는 사람을 구해 보내 (두 아우를) 데려오고자 생각하고 있었으니,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 물었다.“내 동생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의 정이라 그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소. 제발 살아서 돌아오게 해야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세 사람이 똑같이 대답했다.“신들은 삽량주간 제상이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 들었습니다. ...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요, 왕 역시 어진 임금이므로 신이 한 마디의 말로 깨우치게 할 수 있었지만, 왜인의 경우는 입과 혀로 달랠 수는 없으니 마땅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청컨대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하여, 저들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도록 하소서!”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율포(栗浦)에 다다라 배를 띄워 왜로 향하였다.
..., [제상이] 밖으로 나오자,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드디어 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제상을 왜왕의 처소로 돌려보냈더니,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에 목 베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고,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그 가족에게 후히 물품을 내리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맞아 아내로 삼게 하여 보답하였다. ...
박제상이 402년에 왜국에 간 이유는 광개토왕비문과 일본서기 신공조에 적혀있다. 영락 6년 고구려의 잔국토벌로 신라를 비롯한 낙동강유역에 수많은 피난민이 운집하였다. 이 혼란에 대하여 신라 정부는 고구려에게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고 고구려는 보병과 기병 5만대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몰아낸다.
왜국으로 도망친 삼한백제 정부는 신라가 고구려 편에 서서 낙동강유역에 밀집한 자신들의 백성들이 도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고 군대를 보내 신라 내물왕(파사 매금)을 위협하게 된다. 이것이 응신 16년(401) 8월조이다. 당시 삼한백제군을 이끌고 내물왕을 위협한 인물이 평군목토숙녜(왜왕 제, 훗날의 윤공천황)와 적호전숙녜다. 그리고 신라가 잔국 백성들의 도해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보증으로 내물왕의 왕자를 인질로 요구하니 이것이 미사흔 왕자가 왜국에 가게 된 연유다.
원칙적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임나)사는 나올 수 있으나 백제(삼한)사는 못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흔 왕자의 인질사건이 신라본기에 남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가야지역의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신라본기의 원본 편집진이 가야사의 일부로 보고 이 기록을 버리지 않고 보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래 일본서기의 응신조에 있던 기록이 일부 떨어져 나가 신공조에 들어간 이유는 173년의 비미호 사건 때문이다. 일본서기 편집진이 보니 중애 말년(9년)인 173년에 비미호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나 국정이 불안하여 당시 한반도 동남부의 최대세력인 신라의 아달라이사금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사신을 보낸 기록만 있었다. 하지만 신라로부터 거절당하고 비미호는 6년의 내란을 거쳐 179년에 즉위한다. 즉, 서기 179년이 비미호 1년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이 69년째에 죽는데 그러면 247년이다. 중국사서를 보면 247년은 왜여왕 비미호가 죽은 해라서 일본서기의 69년 재위가 정확함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편집진들이 신공조의 신라정벌을 만들기 위해 비미호의 사신이 있던 자리에 응신조에 있었던 신라위협 기록을 떼어 옮겨놓은 것이다. 그 외에 응신의 왕후 기록들을 몽땅 떼어 신공조로 옮겼다. 따라서 신공 초반기의 기록은 응신의 왕후이다. 반면에 신공 후반기의 기록이 비미호이다. 신공 초반에 나오는 신공에게 무척이나 보살핌을 받는 황태자는 응신이 아니고 응신의 아들인 토도치랑자이다.
응신은 황태자였던 적이 없다. 응신의 정벌기록을 떼어놓은 신무조를 보면 신무의 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응신의 형은 자립위왕에 실패하여 진왕이 못 된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응신은 동생도 있었으나 영락 6년에 고구려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응신의 동생이 수도를 지키고 응신과 그 형만 빠져나온 것이다. 고구려가 잡아간 왕제와 대신 10인은 모두 응신의 동생과 관료들이다. 만일 아신왕의 동생이 잡혀갔으면 삼국사기에 반드시 나와야 한다. 왕위 계승권자인 왕자도 있는데 이를 두고 대신 왕위 계승에서 탈락한 왕제를 잡아가는 바보는 없다. 일본서기가 무네숙녜를 대신으로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대신은 삼한백제에서 숙녜급 고위관료를 부르는 호칭이었다고 생각된다. *삼한사의 재조명에 고구려군에게 잡혀간 잔국 대신들의 이름들이 있음.
중애 9년조에 나오는 천황 기록은 중애와 응신이 섞여 있어 2중적이다. 예를 들면 중애 9년에 천황의 죽음에 대하여 2가지 설을 기록하였다. 하나는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고 하여 이유 불명이고, 다른 웅습을 정벌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하여 죽은 이유가 분명하다. 전자가 내부에서 암살당한 중애의 죽음이고, 후자가 왜국의 정복과정에서 죽은 응신의 죽음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403년 2월에 응신이 죽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이를 기록하고 있다. (침류왕이나 진사왕의 딸로서 아신왕의 누이인) 응신의 왕후가 보낸 사신이 백제에 역시 2월에 도착한 것으로보아 응신은 2월 초에 죽었고, 사신은 2월 말에 백제에 도착하였다.
미사흔은 실성왕이 정치적 라이별을 정리하는 것과도 맞아 떨어진다. 미사흔이 잡혀간 다음 해에 응신이 죽자 실성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한다. 인질을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왜국 정부는 인질인 미사흔을 해치지 않는데 이는 실성왕과 미사흔 사이의 관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박제상은 본명이 모말로서 본래 토착 신라인이 아니고 4세기 중반에 북방에서 들어온 유목민족의 후예다.(엄밀히 따지면 신라에 토착인은 없다) 훗날 법흥왕 시기에 이들이 김씨와 박씨로 성을 바꾸는데, 어떤 기준으로 누구에게는 김씨를 주고 또 누구에게는 박씨를 주었는지가 어렵다. 왕족에 가까우면 김씨를, 왕비족에 가까우면 박씨를 주었을 가능성이 하나 있고, 미국이민 초기에 영국계냐 프랑스계냐를 나누듯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의 출신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보면 박제상에게 김제상이라는 이름도 동시에 전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뚜렷한 분류기준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혁거세 후손이며 파사니사금 5세손이다"로 보아 단순히 성만 주는 것이 아니고 어느 족보에 체계적으로 끼워넣은 것이다. 이런 성씨를 주고 족보에 끼워 넣는 작업은 외부에서 신라사회의 지배층에 들어오는 경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6세기에 임나가야인(신라본기의 왜인)인 김무력이 신라에 들어올 때도 비슷하였다고 생각된다.





